평상시 인자하신 아버지가 명절이면 이성을 잃고 울었고, 아직 날개 없는 어린 새에 불과한 우리 육 남매는 구석에서 떨어야했다. 우리에게 명절은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자리 잡았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보름달만큼 크게 자리했다.

아버지는 6·25때 북한 군인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군복을 입은 채 고향집에 찾아가 부모님께 월남하자고 했다. 피란 준비가 안 된 부모님은 아버지 먼저 남으로 가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탈영한 사실을 알고 인민군이 쫓아왔는데, 6월이라 군복과 비슷한 떡갈나무에 숨어 지내며 구사일생으로 남쪽에 왔다.

남으로 오신 아버지는 부모님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나중에 내려오신 친구를 통해 부모님이 못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언젠가 만날 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살아만 계시면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살아냈다.

하지만 친구가 비밀을 이야기한 것은 오빠가 태어난 후였다. 남에서 가정을 꾸리고 산 지 십 년쯤 지났을 때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인민군 옷을 입고 마을에 나타난 것이 문제였다. 아버지의 남한 행이 반동분자의 가족으로 낙인 찍혀 부모님은 공개 총살당하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은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맑은 정신일 때는 이성의 힘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술만 드시면 몹시 괴로워하시며 울부짖었다.

특히, 명절 아침에는 고향에 두고 온 아버지 가족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느라고 우리는 벌 받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하기엔 우린 어렸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다짐도 명절이면 쉽게 무너졌다. 한 해를 시작하는 설날은 많이 인내했지만, 추석은 술이 아버지를 마시기 시작하여 매번 체면을 벗어던지고 통곡을 넘어 온몸으로 절규했다. 그리운 부모님과 동생들, 당신 혼자 살고 가족을 죽였다는 죄의식으로 한없이 피눈물을 토하신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런 아버지가 좋을 리 없었다. 아버지를 이해할 만큼 성장했을 때도 아버지의 고통을 보려고 하지않았다.

아버지는 가족을 떠나온 것을 후회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시적인 헤어짐일 줄 알았던 것이 평생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으니, 자식들만은 곁에서 살길 바라고 또 바랐다. 자식들이 학교나 직장 문제로 떠날 때는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는 희망을 품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식들은 속초를 떠났다가도 결혼을 앞두고 속초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속초에 남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평을 거침없이 뱉은 나였다.

난 아버지께 부모가 자식을 낳기만 하면 되는 줄 아느냐고, 자식이 원하는 것을 해 주지 못하면서 왜 자식을 많이 낳았느냐고 말하곤 하여, 아버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내 말이 아버지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 친구 분이 고성 사람에게 중매를 섰고 결혼을 서둘렀지만,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름 석 자만 알고 있었던 지금의 남편을 선택했다.

그 당시 나보다 두 살 적은 스물네 살에 직업도 없는 남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곁을 떠나 멀리서 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족했다. 남편이 아버지께 결혼 허락을 받겠다고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경기도가 집이라는 말에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내가 결혼하여 속초를 떠날 때, 아버지는 우시고 난 기뻐했다.

가족을 떠나오신 아버지는 자식을 타향으로 보내는 것이 힘들었는지, 일 년에 한 번씩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씩 갈아타고 고달픔을 감수하며 십년을 찾아 오셨다. 직접 사는 모습을 봐야 안심이 되기라도 하듯이 일흔여덟 살까지 오셨다. 그때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의 마음의 짐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생각하게 된 것은 큰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후부터였다. 내 말에 토를 달며 한마디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아이를 보며 아버지를 원망한 나를 보기 시작했다. 아버지 가슴에 아픈 말을 거침없이 해서 아들을 통해 벌을 받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아버지께 죄스러워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고향이 그리워졌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아파트 숲으로 이루어진 도시이다. 16층에서 올려다보아도 하늘이 다 보이지 않는 곳. 거리를 조금만 걸어도 메케한 냄새가 코를 싸하게 감싸는 곳. 아침이면 종종 안개가 도시 전체를 덮어버리는 곳. 해가 어디에서 뜨는지 언제 뜨는지 보이지도 않는 곳.

고향 바다가 그립고 가족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친정집은 바다 옆이다. 속초에서는 매일 옥상에서 또는 바닷가에서 푸른 바다를 보며 상념에 잡기고 바다를 보며 희망을 품었다. 바다는 바라만 봐도 가슴이 뻥 뚫렸다.

내 그리움이 아버지의 고통스런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난 갈 고향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갈 수 있는데도 고향만 생각하면 가슴이 시린데, 고향은 있지만 갈 수 없는 곳. 부모님과 동생들을 죽게 한 죄책감으로 산 아버지의 한을 그때서야 보게 되었다. 명절 때면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야속한 말들을 뱉은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모습이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 아버지를 이해할 줄 아는 마음 깊은 딸이 되었더라면, 아버지의 아픔은 줄어들었을까? 아버지는 덜 외로웠을까? 자식들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었더라면 세상을 달관한 모습으로 사시지는 않았을까? 엄마 혼자 생활고에 시달리게 두지 않았을까? 아버지 탓으로 여겼던 것들이 내 탓으로 느껴졌다.

김소월 시인의 시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세상 어디에서도 이해 받지 못하고 살았던 아버지. 자식들이 함께 아파했어도, 아버지의 고통을 보려고만 했어도, 아버지는 덜 외로웠겠지. 보름달 같은 덩어리를 가슴에 안고 추석이면 차마 들을 수 없는 울음만 토해내던 아버지. 저 보름달이 아픔이고 슬픔이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