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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국화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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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윤상
댓글 0건 조회 5,230회 작성일 06-02-2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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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국화전시회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이윤상 (제114호)


예술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그저 아름답게 느끼고 감동할 따름이
다. 그러나 예술을 창작하는 예술가는 어떠할까? 피 말리는 노력과 인내, 눈물과 고뇌의 산
물일 것이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하나의 예술품을 세상에 표출해 내는데는 작가의 숨은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물론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경우도 많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천부적인 소질도 전생에 갈고 닦은 사람이 환생했을 때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윤회(輪廻)사상이다. 원불교 교무로 정년퇴임 후에 수위단(首位團)에서 노후를 보내시는 원로들 중에는 90세가 넘은 분도 서예, 미술, 문학, 작품 수련에 골몰하신다. 생전에 더 연마하여 그
재능을 다음 생에 그 소질을 갖고 태어나기 위해서다. 국화를 재배하는 사람은 예술을 창조
하는 것과 같은 의지와 정성이 아니면, 국화꽃을 피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10여 년 전 전주J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할 때, 3년 간 국화전시회로 큰 보람을 거 두었던 추억이 생생이 떠오른다. 그 당시에 정완배라는 상록수 교사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룬 성과였다. 그 선생님은 자발적으로 해마다 400본의 국화를 재배하여 10월 중순부터 국화꽃이 만발하면, 학교가 온통 국화 향기에 파묻혔다. 2,200명 학생과 학부모, 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 때 국화를 재배하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창작해 내는 것과 흡사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정교사의 국화 재배는 늦은 가을 낙엽을 모아 퇴비장에서 썩힌 다음 부엽토 만들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봄에 국화 종자를 묘판에 파종하여 싹을 틔우는 데도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싹이 튼 후에 묘목을 기르는데는 엄마가 아기에게 젖 먹여 기르는 정성으로 적정량의 급수조절을 해야한다. 어느 정도 자라면 어린 묘를 분산하여 포토에 옮겨 심는다. 그 중에서 튼튼하고 유망한 포토 묘목을 선발하여 늦은 봄에 다시 큰 화분에 옮겨 심는다. 거기까지는 초입단계다.
화분마다 여러 개의 순(筍)이 우후 죽순처럼 솟아오른다. 그 순을 하나하나 손으로 골라서 따주는 작업은 엄청난 일거리다. 그야말로 재배과정은 산 넘어 산이다. 화분에 꽃대가 솟아오르면 키나, 모양, 수량을 조절하여 꽃대마다 시누대를 꽂아서 지주를 세운다. 그 지주에 꽃대를 낱낱이 철사로 묶어주어야 바르게 자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기계나 도구로 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오로지 손으로 해야한다. 순 집기는 전문가가 판단해서 골라야 하기 때문에 섣불리 인부를 동원해서 할 수도 없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정교사 한사람이 오직 도움을 받는다면 6학년 자기 반 학생들을 가르쳐서, 순 집기나, 물 주기, 지주 세우기 등을 할 뿐, 그 선생님이 혼자서 다 해내는 것이었다.
아침에는 2시간 일찍 출근해서 국화를 돌보고, 방과후에는 해가 저물어 화분이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국화 화분 곁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다고 한푼이라도 수당을 받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 교사는 한 번도 짜증내거나 불평을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기 뱃속에서 나온 자식을 기르는 엄마처럼 기쁜 마음으로 재배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탄복했다.
93년 가을부터 95년까지 꼬박 3년 근속하는 동안 매년 400본의 입국(立菊)을 화단에 진열하고 국화전시회를 열었던 기쁨은 40여 년 내 교직생활에서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때 나는 정교사의 노고를 70여명 교직원들 앞에서 가슴깊이 치하 드리고, 국화를 함께 감상하자고 하면서 국화 감상법을 알려주기도 했었다. 나는 재배기술은 없지만 국화를 보고
감상하는 데는 얄팍한 상식을 무기로 설명했었다.
"한 화분의 꽃대는 7-9개정도 홀수라야 하고, 꽃의 크기는 균등해야 하며, 꽃대 높이는 균등하고, 꽃대는 아래서부터 꽃받침까지 잎이 싱싱해야한다. 꽃대는 오동포동 하고 키가 너 무 크지 않아야 한다." 이런 설명에 이어서 선생님들에게 국화 국(菊)자를 한자로 풀이해
주었다.
"풀초 밑에 쌀포 안에 쌀미(米)자로 구성된 글자가 바로 국(菊)자입니다. 쌀 한 톨을 생산하는데 농부들의 손길이 88번 가야 한다는 쌀미(米)자가 속에 들어있는 풀입니다. 바로 국화 한 송이에는 우리 정 선생님의 정성어린 손길이 88번 이상 들어가서 만들어진 작품들입니다. 소중히 보고 학생들에게 교육시키는 교육자료로 활용해주십시오."

전시회 기간에 학급별로 특설시간을 배정해서 국화 전시장을 직접 인솔하고 담임교사가 감
상 지도하고, 동요, 동시, 일기 쓰기. 국화감상 글짓기를 해서 작품을 제출, 심사하여 시상하
고 시화전도 열어 최대한 교육적으로 활용하였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나는 그 당시 국화외교를 성공적으로 벌였었다. 도교육청과 전주시교육청에는 과별로 화분을 보내고, 직할 교육기관, 3개TV 방송국, 일간 신문사, 농협 등 유관 기관에 총 100본의 화분을 차에 싣고 다니면서 선물로 기증하여 학교명예도 빛내고, 유대를 돈독하게 하는데 큰 몫을 했던 것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미당 선생의 '국화 옆에서'란 시구가 가장 절실히 느껴지기도 했다. 화려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열 달간 배속에서 아기를 키워내는 엄마와 같은 고통 속에서 국화가 탄생한다는 진리를 그때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우는 것은 비교가 안될 지경이었다.
그 후로 나는 어느 국화전시회장에 가던지 그 국화를 길러 낸 분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경건한 마음으로 감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 때 그 정 선생님이 순환근무로 진안으로 가셔서는 진안중앙초등에서 밴드부를 지도 육성하여, 도 단위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음악교육에 큰 업적을 쌓더니, 그 분이 금년 학년말 인사에 전주시로 다시 전근해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고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이 글을 쓴다. 그런 분이 승진도 해야 하는데, 또 다시 평교사로 50대 중반에 돌아오셨다니 한편 안쓰럽고, 승진제도에 그런 상록수 교사를 우대하는 조항은 왜 없는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 J초등학교 재직 시에 국화 전시회를 가졌던 추억을 더듬어서 06.2. 25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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