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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학 2006년 여름호 김학 수필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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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탁현수
댓글 0건 조회 5,062회 작성일 06-03-2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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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class=bonmun><FONT color=#0000ff> 
<P>계간 대한문학 인터뷰 -김학 선생님 대담 질문서/탁현수 수필가</P><BR>
<P>1.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 지도를 열정적으로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선생님의 최근 근황을 좀
들려주십시오.<BR>[김학]2001년 9월에 첫 강의를 시작했으니 벌써 만 5년이 되었군요. 지금까지 약 3백여 명이 수강했고, 50여 명이
등단하여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10명이 수필집을 창간했고, 20여 명이 외부에서 주는 각종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올해엔 전북일보와
경남신문 신춘문예에서 수필당선의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주간 기초, 중급, 고급, 야간반 등 4개 반에 80여 명이 등록하여 열심히
수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밖에도 P.E.N클럽 부 이사장으로서 활동합니다.</P><BR>
<P>2. 살아오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과 후회스러웠던 일을 꼽으신다면 무엇인지요?<BR>[김학]보람 있게 생각하는 일은 KBS에서 근무할
때 남원의 춘향제 가운데 가장 하이라이트인 '춘향선발대회'를 KBS가 예산과 방송을 지원하도록 하여 전국적인 민속축제로 격상시킨 일과
전주방송총국에서 경로사상을 앙양하기 위하여 '전북의 어른 상'을 창안하여 연례행사로 정착시킨 일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또 전북문인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 '가람 이병기 시조시인 추모 전국시조현상공모'를 연례행사로 정착시켰고, 1999년 8월에는 전북의 문인들을 인솔하고 금강산문학기행을
다녀온 일이지요. 그때 봉래호 선상에서 시화전, 시와 수필 낭송회, 문학강연 등 문학행사를 가져 600여 명의 일반승객들의 높은 환호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후회스러웠던 일은 어디 한두 가지뿐이겠습니까 만 가장 큰 후회라면 젊은 시절을 낭비해버린 일입니다.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것이 가장 후회가 됩니다. 지금 다시 내가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시간을 아껴서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전력투구하여
1인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P><BR>
<P>3. 많은 문인들이 선생님께서 인터넷을 통해 보내주시는 다양한 자료들을 유익하게 보고 감동들을 하시더군요.  젊은이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는 컴퓨터를 어떻게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다루시는지 궁금합니다.<BR>[김학]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요? 내가 KBS에 재직 중 회사의
지원으로 컴퓨터 학원도 다녔고, 본사에서 연수도 받았습니다. 또 집에는 아이들의 컴퓨터가 두 대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창기라서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월간지의 뒤 표지에 어떤 노인이 컴퓨터 옆에 앉아 있는 사진이 게재되어 있더군요. 자세히 보니 서해방송
초대 사장으로서 나를 무척 아껴주셨던 진기홍 선생이셨습니다. 그 분은 광주체신청장으로 정년퇴직을 하신 분인데 한국체신사와 한국우정사의 최고
권위자이시기 때문에 원고를 많이 쓰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80세가 되자 팔목에 힘이 없어져서 글을 쓰기 어려웠답니다. 그래서 여든 살부터
컴퓨터를 배워서몇 년이 지나자 전국에 흩어져 사는 자녀들과도 인터넷으로 소식을 주고받고 원고도 컴퓨터로 직접 쓰는 등 아주 편리하게 활용하신다는
기사를 보았지요. 그 순간 팔순 노인도 컴퓨터를 배워서 이렇게 유용하게 활용하는데 나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도 되지 않겠는가 깨달았지요. 참
그때 그런 생각을 하기 잘 했다 싶어요. 컴퓨터는 워낙 컨텐츠가 많고 다양해서 젊은이들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지는 못해도 글을 쓰고 보내고 받는
정도는 한답니다. 거의 날마다 컴퓨터와 씨름하는 시간이 서너 시간은 될 겁니다. 많은 제자들의 수필작품을 메일로 받아서 첨삭하여 다시 제자들에게
되돌려주려니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습니다.</P><BR>
<P>4. 집필 활동에 강의까지 퇴직을 하시고도 끊임없이 왕성하게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런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특별한 취미나 건강관리법이
있는지요?<BR>[김학]좋아서 시작한 수필이 퇴직한 뒤 이렇게 소일거리로 발전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운명이란 묘한 것이구나 싶어요.
수필이 있기에 나의 활동 폭이 커졌고, 인간관계도 넓어졌습니다. 또 그 수필 때문에 내 성격조차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변했어요. 그러니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지 않아요? 그리고 7`8년 전부터 매일 아침에 30분 정도 반신욕(半身浴)을 하고 있어요. 그 반신욕을 하면서 30분
정도 수필을 읽으니 그야말로 1석2조입니다. 나는 후배들에게 늘 하루 세끼 식사로 육체적 건강을 보살피듯 하루 세 편의 수필을 읽어서 정신적
건강을 보살피라고 권하고 있거든요. 그밖에 1주일에 서너 번 우리 동네 뒷동산인 건지산에 오르는 것이 내 운동의 전부입니다. </P><BR>
<P>5. 글은 주로 언제 쓰시고 작품의 소재는 어디서 찾으십니까?<BR>[김학]글은 주로 밤에 쓰지만 가족이 외출하여 집이 텅 빌 때가
좋더군요. 방해받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 최상의 집필기회지요. 작품의 소재를 찾는 공간이나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이 머물고
생각이 깊어지면 꼭 소재가 나타나요.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순간 소재가 떠오르고, 술자리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다가도 소재가 잡히더군요. 본능적으로 내 모든 감각기관이 소재 찾기의 안테나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요? 수필가는 항상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수필의 소재가 사람이던 무생물이나 생물이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그 대상물은 지금 작가인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생각해 보라는 것이지요. 그래야 수필가의 입장에서만 일방적으로 쓰여진 편향된 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P><BR>
<P>6. 평생 방송인으로 사셨는데 방송과 글 쓰시는 일에는 어떤 연관이 있으셨습니까?<BR>[김학]방송PD는 글을 많이 쓰는 직종입니다.
지금은 프로그램마다 작가나 스크립터가 따로 있지만 옛날에는 PD가 직접 원고를 썼어요. 특히 1970년대 초 서해방송에서 일할 때 '밤의
여로'라는 에세이 프로그램을 맡게되어 약 3년 동안 날마다 원고지 8~10매 정도의 수필 한 편씩을 썼어요. 그 글에다 내용에 맞는 음악을 세
곡 넣어서 소개했지요. 아주 인기가 좋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그 원고 중에서 가려 뽑아 방송수필집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술을 마시거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할 때, 또는 잠자리에조차 내일은 어떤 소재로 글을 쓸까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어요. 3년 정도 하니까 너무 힘들어서 전북의
문인들을 필진으로 활용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전국으로 필진을 넓혔습니다. 요일 별로 한 분씩 지정하여 원고를 받아 방송했지요. 그때 정덕룡 씨,
정주환 교수, 김동필 선생 등이 필진으로 들어왔고, 그 뒤에 필자로 참여한 경기대 이재인 교수와 대전의 김영배, 오승영 교장, 대구의 정재호
선생 같은 분들이 필진으로 참가하게 되어 나와 깊은 인연이 맺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나와 문인들 간에 교류가 이뤄진 다리가 되었고,
1977년이던가, 연말에 그 '밤의 여로' 필진들끼리 망년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동인지 '전북수필61호'까지 발간한 오늘의 '전북수필문학회'는 밤의 여로 필진이 주축이 되어 창립된 문학단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초대 회장에 고 정덕룡 씨, 부회장에 김동필 씨, 주간에 정주환 씨가 선출되었지요.</P><BR>
<P>7. 전북수필의 창시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십시오.<BR>[김학]전북수필은 서해방송 '밤의 여로' 필진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된 수필문학동아리지요. 1970년대 후반 어느 날 정덕룡, 정주환, 김동필, 김희선, 김학 등 다섯 명이 우리들의 단골인 전주시
중앙동 '영광상회'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전북수필문학회를 추진하기로 뜻을 세우고 그 자리에서 정주환 씨가 그 자리에서 선정된 발기인들에게 엽서를
발송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사천리로 발기인 모임,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마침내 전북수필문학회가 전북에서 처음으로 탄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전북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C교수가 전북수필문학회 창립을 반대하여 애로가 많았지만 우리는 물러서지 않고 밀어붙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탄생된 전북수필이 어느덧 62호를 인쇄중입니다. 또 내가 두 번째로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을 맡고서 '전북수필문학상'을
제정하였는데 오늘까지 그 전통이 잘 이어져 오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정읍에 사는 김동필, 김희선 씨는 정읍행 버스 안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아
정읍내장문학회를 창립하기도 했습니다.</P><BR>
<P>8. 선생님의 수필 중에는 고향이나 친구 이야기가 특별히 많은 듯합니다. 고향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BR>[김학]처음 수필을 쓰기
시작하면 가까운 소재부터 찾아서 글을 쓰기 마련이지요. 가족이야기, 친구나 친척, 직장이야기, 고향이야기 그러면서 점점 소재를 찾는 범위가
넓어지기 마련입니다. 나도 예외는 아니지요. 내 고향은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삼계리. 박사골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곳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어요. 그곳에서 6,25를 겪었습니다. 그 애환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다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나에게 고향은
영원한 수필소재의 곳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서정수필보다는 서사수필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내 수필에는 메시지가 담기도록
노합니다. 동지 팥죽에 담긴 새알심이 그게 바로 내가 추구하는 수필 속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동지 팥죽에 새알심이 없다면 제 맛이
나겠습니까?</P><BR>
<P>9.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보는 선생님의 모습은 어떤 남편, 어떤 아버지입니까?<BR>[김학]나도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점이 바로 그
점입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측근인 아내나 자식들이 나를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그게 늘 궁금해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입니다. 나 자신은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나의 말 한 마디, 행동 한 가지가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가 그들의 머릿속에 크게 입력되었을지 누가
압니까?<BR> 어디선가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집에서 직장으로 출근할 때는 경비실에 오장육부를 몽땅 빼어내 맡겨두고 사무실로
들어간다고 했어요. 또 직장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것을 귀가로 생각하지 말고 다시 집으로 출근하는 심정으로 하라는 얘기이지요. 자기 가족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자신의 단골손님인데 그들 단골손님을 설득하여 지지나 찬성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성공하겠느냐는 것이지요. 궁예의 관심법을 배워서라도
가족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P><BR>
<P>10. 앞으로 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수필을 쓰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BR>[김학]우리나라의 수필문학단체는 군웅할거시대나
다를 바 없습니다. 내로라 하는 유명 수필가들은 수필전문지를 발간하면서 신인을 배출하고 그 신인들을 조직화하여 동아리를 만듭니다. 그게 꼭 나쁜
일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잡지끼리 벽을 높이 세워서 상호 교류가 어렵지 않나 하는 점이지요. 마치 문단 선거 때 활용하기 위한 정당조직을 닮아
가는 듯합니다. 모든 수필가들을 한 동아리로 묶어서 아직도 우리 문단에서 취약한 수필의 힘을 더 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수필문단을 한
덩어리로 묶을 수 있는 유능한 수필계의 원로가 그리운 시절입니다.<BR>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수필전문지가 무려 17가지나 출간되고
있습니다. 월간, 격월간, 계간 등 양적으로는 크게 수필의 위상이 높아졌지요. 그러나 그 수필전문지는 물론이고 일반 종합문예지들까지도 많은
신인들을 마구 배출하고 있으니 문제가 큽니다. 충분한 습작기간을 거친 사람에게 수필가 자격을 주어야 할 텐데 함량부족인 사람까지 마구 등단을
시키는 풍토는 개선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잡지 발행인이나 등단을 원하는 예비문인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려니 싶습니다.
<BR> 후배 수필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불광불급(不狂不及)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미치지 않으면 어느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한 번 수필과 인연을 맺었으면 수필에 푹 빠져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수필에 미쳐서 노력하면 마침내 경륜 높은 수필가로 우뚝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력하면 불가능은 없을 것입니다. 매달 많은 수필가들이 등단의 영광을 누리지만 그 중에서 많은 신인들이 등단작이 마지막 작품이
되어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게 결코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점을 마음 속 깊이 새져두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BR></P></FONT></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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