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_title05.gif

늦봄에 온 전화 / 서안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정영애
댓글 3건 조회 2,470회 작성일 14-07-31 20:56

본문

 

언니 잘 살고 있어요?

잊힐 만하면 걸려오는 그녀 H는

국문과 출신의 고향 후배다 한 때 같이 시를 쓰고

 밤늦도록 열정적으로 시를 이야기하던

인도풍의 얼굴을 한 여자애였다

부모 반대 무릅쓰고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도망치듯 사라졌던 그녀

남편 사업이 여러 번 실패하고

지금은 경기도 어디쯤 지하 단칸방에서

딸 둘과 남편과 개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일주일에 오일을 야채 트럭을 몰고

남편과 함께 아파트 상설시장을 돈다는 그녀

나도 시를 쓰고 싶은데요.

그게 잘 안 돼요.

언니는 요즘도 시 많이 써요?

야채를 팔며 흥정을 하다 문득 시들어 떼어낸 푸성귀 잎들이

자신의 얼굴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그녀

가냘프던 그녀의 목소리엔

삼십 줄 후반의 노련함이 배어있다 

 

애는 잘 크고 있느냐는 내 안부에

그녀의 목소리가 환해진다

그럼요, 무우처럼 쑥쑥 자라요

토마토처럼 입술도 붉고요

아이들은 무섭게 클 수 있는 힘을 어디서 배우는 걸까요

아이들이 요즘은 구구단을 외는데

엄마가 집에 없으니까 자꾸 셈이 틀리나 봐요

수학공식도 엄마의 손길이 닿아야

아이들에게 뿌리를 내리는 건가 봐요

구구단처럼 집이 빨리 두 배로 넓어졌으면 좋겠어요

 

언니, 시를 생각하면

난 너무 멀리 걸어와 버린 것 같아요

야채를 다듬다가 야채를 싼 신문 귀퉁이에서

시집 소개라도 읽게 되면

왜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이 날까요

 

언니 내가 너무 많이 걸어와 버렸나 봐요

 언니 내일은 가락동 시장에

싱싱한 채소들을 고르러 가야해요

또 전화할게요

 

그녀는 매일 트럭을 타고

온몸으로 푸른 야채들과 함께 시를 쓰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문장 안에서 시든 잎들을 때어내고

아이들 푸른 몸뚱이를 씻기며

너무 길게 자란 생각의 뿌리들을 칼로 다듬고

아이들이 눈동자가 상하지 않게

싱싱한 소금도 듬뿍 뿌리면서

댓글목록

profile_image

권정남님의 댓글

권정남 작성일

<p>삶이 뭉클 묻어나는 시네요. 이런시를 이야기 시라고하지요. </p>
<p>서안나 시인의 '모과'라는 시도 참 좋아요. 세상을 들여다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요. </p>
<p>좋은 시 잘 읽었어요&nbsp;</p>

profile_image

정명숙님의 댓글

정명숙 작성일

<p>시를 '언어의 미학'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짧은&nbsp; 글속에 한 편의 소설이 담겨있는 '함축 미' 그게 시가 아닐까요?&nbsp; 좋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p>

profile_image

지영희님의 댓글

지영희 작성일

<p>싱싱하니 삶이 살아있네요.</p>
<p>가꿈 없이 풀어놓은 것이 외려 감동이 되어 와 닿네요.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