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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위한 기도 /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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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정남
댓글 0건 조회 1,814회 작성일 14-10-28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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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위한 기도

                       이 해인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그 주인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있는 동안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

매일매일 돌같이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 지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게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 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나만의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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