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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 아지랑이/ 장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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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정남
댓글 0건 조회 1,841회 작성일 14-12-26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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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뫼 44집 144쪽


그해 봄 아지랑이

                                    장승진


봄이 되면 나무들도 술을 마시네
하얗게 노랗게 빨갛게
색색으로 벌린 입술로 술을 마시네
갓 나온 풀대궁들도 아침부터 취해
한결같이 구슬픈 노랠 부르네
기쁜 일이 폭포처럼 쏟아질 것 같은
왠지 그런 햇살 속인데
목울대가 부풀도록 서러운 것은
몰라 그래서 바람이 부는지도 몰라


봄이 되면 돌들도 술에 취하네
바보처럼 멀쩡한 물들만 흘러
섞여드는 슬픔의 농도를 헤아리지 못하네
새 새끼들까지 지겹게 울어 울어
메마른 대추나무에 잎이 돋고
초여름 훈풍이 밤꽃 냄새 지천으로 뿌릴 무렵까지
모두들 엉망으로 취해 있네 있어야 하네
취해서야 지랄 같은 봄의 뿌리가 질긴 줄 깨닫네


흔들리며 가는 세상이라고
노여움도 흔들리다 햇볕 속에 잦아들거나
빈 어스름 베고 산허리에 기대면
몰라 그렇게들 잠드는지 몰라
눈뜨면서 잊으면서 사는지 몰라
봄이 되면 나무들도 풀대궁도

하물며 돌들도 술을 마시네
술 취한 입술들 일제히 벌리고
파도 소리처럼 우레 소리처럼
들을수록 눈물 나는 노랠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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