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량 - 박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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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람
나를 덜어내는 일입니다.
상대들을 위하여
그 두려운 상대들을 위해
내 살을 덜어내는 일입니다.
차라리 넘어지는 일이라면 좋겠습니다.
확 엎질러지는 일이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적폐적인 優位를 쏟아낼 수만 있다면
동급 최강이 될 수 있습니다.
체급이란 누구이며 어떤 존재입니까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자리를 지키는 일입니까
땀을 흘리는 고단한 체급
한 방울의 숨까지 따라내고
저울 속에 헛헛한 공복을 구겨 넣습니다.
몇 그램의 소수점을 내보이며
딱 맞는 체급을 비로소 저울 안으로 마감시킵니다.
새라면 좋겠습니다.
지친 깃털 가닥을 부리로 솎아내듯
도마뱀이 두려움 앞에서 꼬리를 뚝 떼어내듯
그렇게 내 몸을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판이라는 곳은 나름 정직합니다.
체급을 벗어난 주먹을 섞지 않으니까요
殘量은 그악합니다.
깡마른 악다구니 같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 헉헉대는 뜀박질이 나오고
斷食이 나온단 말입니까.
여분도 없이 텅 빈 무게
덜어낸 무게 앞에서 안도합니다.
허청대는 공복 속으로 질긴 연습을 넣습니다.
헝클어졌던 머리카락들이 엄숙한 계체량으로 빗겨지는 시간
처음부터 우리에겐 체급이 있었고
체급은 늘 배고픈 일입니다.
1998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낡은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백리를 기다리는 말』이 있음.
제6회 〈시와표현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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