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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겨울 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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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성희
댓글 10건 조회 2,128회 작성일 10-01-19 22:07

본문

<수필>

                                                 아버지와 겨울 딸기

                                                                          
비닐하우스 덕분에 겨울에도 새콤달콤한 딸기를 먹는다. 겨울 딸기 맛이, 제철인 봄에 먹는 것보다 낫다. 두 아이 모두 겨울이 생일인지라 생일 때면 딸기로 식탁을 장식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겨울 딸기를 사지 않고 있다. 한 겨울에 딸기만 보면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려 차마 살 수가 없다.

3년 전 토요일이었다. 오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거든 아무리 바빠도 왔다 가렴.”
작은 아이가 우주정보단 캠프를 떠나는 날이라 학교 앞에서 배웅하고 남편, 큰아이와 속초로 향했다. 속초에 도착하여 무엇을 살까 망설이다, 소고기 한 근을 죽 쑤기 좋게 갈고, 딸기 한 팩도 샀다. 평상시 아버지는 소고기가 질겨서 싫다고 하셨다. 하지만 기운 차리시려면 소고가 나을 것 같았다. 일주일 내내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음식을 드시지 않으신다고 걱정하셨다.

아버지는 천장만 응시하다 나를 보더니 둘째 은관이는 왜 안 왔느냐고 물으셨다. 찾아뵐 때면 이런저런 추억과 덕담을 들려 주셨는데, 힘에 부치시는지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엄마와 오빠는 아버지 총기가 흐려졌다고 했다. 둘째 은관이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총기가 있으시다며 안심했다. 아버지는 왼쪽 어깨부터 팔까지 시퍼렇게 멍든 게 심상치 않았다. 엄마가 팔을 걷어 보여 주셨는데 아버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셨다.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아 엄마가 계속 주물렀더니 그나마 많이 좋아졌다고 하셨다. 엄마와 나의 대화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계셨다. 내가 "아버지 천장에 뭐가 있어요?"하고 여쭤도 항상 시선을 천장에 고정했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만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버지 손만 잡고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보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난 자식 중에서 아버지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다. 언니나 여동생은 아버지의 뜻을 어기면 무조건 용서부터 빌거나 그럴 듯한 말로 노여움에서 벗어났지만, 난 잘못해도 사과나 용서를 비는 말을 할 줄 몰랐다. 잘못했으면 응당 꾸중을 받을 각오를 했다. 변명으로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를 신뢰했다. 술만 드시면 내가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내 고집이 아버지를 힘들게 했을 텐데 손님이라도 오시면 우리 둘째 딸은 고집이 세지만 책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씀하시거나, 딸로 태어난 것이 아깝다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나를 자랑스러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나를 다른 사람 앞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안 뒤부터 자긍심을 가지고 살았다.

여동생, 남동생도 아버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면서도 무엇을 해 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부엌에 가서 소고기 한 근에 쌀을 조금만 넣고 끓였다. 쌀알이 다 풀어질 때까지 은근히 끓였다. 딸기는 삼키기 좋게 으깨서 아버지께 먼저 갖다 드렸다. 딸기 한 팩을 다 드셨다. 난 안심이 되었다. 엄마는 이제 음식을 드시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일어나시려는 모양이라고 걱정하지 말고 자라고 했다. 난 다시 우리에게 인생에 지침이 될 만한 덕담을 들려주실 거라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방에 들어갔다. 자고 일어나니, 아버지께서 한 숨 안 주무시고 그 많은 소고기 죽을 밤새도록 다 드셨다고 하셨다. 내가 사 온 거라고 했더니, 눈물지으시며 엄마가 떠 드리는 손길을 뿌리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드셨다는 거다. 식사를 하셨으니 아버지가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아버지는 혈전으로 강릉 아산병원에서 몇 번 수술을 하셨다. 그 후, 이 년 동안 정기적으로 아산병원에 다니셨는데, 월요일이 정기 진찰일이라고 했다. 난 아버지의 표정에서 통증이 심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오빠와 의논해 가까운 응급실로 모셨다. 그곳에서 X레이 촬영을 했더니 이미 손을 댈 수 없다고 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환자의 통증을 완화시킬 진통제를 놔 주는 것 밖에는 없다는 절망적인 말이었다. 장기가 다 파열되었는데 통증 호소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병원으로 모신다고 했을 때도 싫다고 했고, 팔에  손대지 못하게만 하셨다. 병실로 옮겼을 때에야 비로소 주무셨다. 밤새도록 주무시지 않은 것은 온 몸의 통증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정신력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니, 일주일은 우리 곁에 더 계실 거라고 우리 형제는 믿었다. 일주일만라도 우리와 더 계셨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난 저린 가슴을 안고 캠프에서 돌아올 둘째를 데려오기로 하고 일산으로 왔다. 둘째에게 마지막이 될 외할아버지를 뵙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일산에 도착하니 월요일 새벽이었다. 둘째가 캠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속초로 갈 채비를 하는데 오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빨리 오라는 거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찾는 것으로 봐서 월요일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말이었다. 눈이 내려 미끄러운 길이었지만  140KM로 달렸다. 남편과 번갈아 운전하여 도착하니 새벽1시였다.

그 때까지 아버지는 기다리고 계셨다. 눈의 초점은 이미 육체를 떠나고 있었다. 통증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아주 평온한 얼굴이셨다. 엄마가 성희네 식구가 왔다고 하셨더니, 아버지는 마음의 눈으로 우리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셨다. 아버지는 가족을 다 보셨음에도 눈을 감지 못하셨다. 엄마가 두 시간 동안 옆에서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가라고 눈을 감겨 드려도 눈을 번쩍번쩍 뜨셨다. 난 사람이 죽을 때 보고 싶은 사람을 다 보지 못하면 눈을 감지 못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께서 보고 싶은 사람을 다 보지 못한 한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미쳤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약속드렸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제가 아버지 고향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 묘 꼭 찾을 게요. 아버지께서 고향에 대해 말씀할 때마다 캠코더에 잘 찍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말해 드렸다. 아버지는 그 때야 눈을 감으셨다. 새벽 세 시였다.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도 순천이다. 6.25 때 군인 신분으로 월남하셨다. 월남하기 직전에 고향에 들렸는데 부모님이 아버지만 먼저 가라고 해서 나중을 기약하고 헤어지셨다. 그 후 북에 남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지주라는 이유와 아버지가 월남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총살 당하셨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주검을 보고 그 충격으로 자살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산가족 찾기 할 때도 찾을 가족이 없었다. 이산가족 찾기 할 때마다 아버지가 아시는 분이 나올까 싶어 텔레비전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 아픔이 있는 아버지인지라 북의 가족이 보고 싶어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거다. 난 아버지를 보내 드리며 빌고 또 빌었다.
‘꼭 하늘 나라에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뵙고 행복하세요. 북의 가족 모두 만나 이승에서의 고통 훌훌 털어버리시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난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야만 했다.
한 번도 효도하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고집 센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어서였을까? 그나마 내가 사 가지고 간 소고기 죽을 저승 밥으로 밤새 드시고 가셨다. 고향의 부모님 묘를 찾는다는 말에 안심하고 눈을 감아 다행이다.

그 후 난 겨울 딸기는 먹지 못한다. 겨울이 생일인 두 아이를 위해서도 겨울 딸기를 사지 못한다. 이 겨울, 아버지를 보내드렸던 그때처럼 눈이 쌓인다. 가게마다 예쁘게 자리한 딸기를 볼 때마다, 평생을 피울음 소리를 토해내시며 사셨던 아버지의 피맺힌 한이 떠올라 딸기를 외면한다. 마지막까지 생의 끈을 놓지 않으려던 아버지의 모습이 붉은 딸기를 통해 더 아려온다.      
                                                     2008년 1월(대한문학 겨울 호 등단)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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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자님의 댓글

이은자 작성일

<p>면식은 없지만 한 가족이 됬음을 반깁니다.</p>
<p>나와&nbsp; '장르' 가 같으니 함께 갑시다.</p>
<p>한 마디 덧 부치라면&nbsp; '사건 나열에서 좀 떨어진 &nbsp;거리에 서의 사유가&nbsp; 곁드렸으면 합니다.</p>
<p>초면에 너무 까칠했나요?</p>
<p>만나보면 그렇진 안아요. 건투를 빕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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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만님의 댓글

김춘만 작성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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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님의 댓글

박성희 작성일

  예. 어제가 아버지 기제사였는데 여전히 가슴이 아립니다. 아직도 겨울 딸기를 사지 못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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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금희님의 댓글

노금희 작성일

  부녀간의 진한 사랑이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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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님의 댓글

박성희 작성일

  감사합니다. 감상평까지 남겨 주시니. 지난번 통화 후, 고향으로 한 발 더 다가간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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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화님의 댓글

이국화 작성일

<p>잘 읽었습니다. 인터넷에 글이 올라가면서 200자 원고지에 글쓰는 식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원고 쓰는 법이 없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한 말씀... 이렇게 새까맣게 촘촘히 글을 올리면 읽기에 힘이 듭니다. <br /><br />한 서너 줄 쓴 후에 한 줄 정도 띄어서 쓰면 읽기에 좋습니다. 시력이 약한 이들과 노안을 위해서 드리는 의견입니다. 그리고 글이 아주 감동적이어요.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 따뜻한 정서가 없는 불행한 환경이었음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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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님의 댓글

박성희 작성일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br />
수정해서 올리겠습니다. <br />
앞으로도 지도와 편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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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화님의 댓글

이국화 작성일

<p>됬음을 ----- 됐음을</p>
<p>덧 부치라면 ----- 덧붙이라면</p>
<p>떨어진 거리에 서의 ----- 거리에서의 (띄어 쓰기)</p>
<p>그렇진 안아요 ----- 그렇진 않아요</p>
<p>&nbsp;</p>
<p>위&nbsp;철자법, 띄어 쓰기 </p>
<p>어느 게 맞는지 나도 아사무사구먼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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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자님의 댓글

박명자 작성일

<p>박성희님..아버지를 그리는 절절한 그 마음을 헤아리며 우리 나라 남북분단의 아픔도 함께 아픕니다</p>
<p>우리네 부모님은 그렇게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고 평생을 바쳐서 자식 뒷바라지를 하셧읍니다</p>
<p>그러나 우리가 잘 사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 바르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p>
<p>그것이 아버지를 편하게 보내는 길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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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숙님의 댓글

서미숙 작성일

<p>저도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네요. 혼자서 그냥 줄줄 울고 말았네요.</p>
<p>&nbs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