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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5년 [동화-이희갑]나쁜마을’에 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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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17회 작성일 06-01-3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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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람이 언덕에 불고 있었어요. 길섶마다 들국화가 환하게 웃고, 푸
른 하늘 깊은 곳까지 잠자리들이 헤엄을 쳤어요. 아직 따가운 햇볕이 반
짝이는 잔디밭에 누워 흰 토끼 토리가 하늘을 쳐다보며 빨간 두 눈을 깜
박거렸어요.
‘겨울이 오기 전에 마지막 여행을 떠나자.’
토리는 가을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탐스런 털을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토리는 여행을 좋아해요. 특히 가을에 다나는 여행을 좋아해
요. 가는 곳마다 먹음직한 과일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들판의 곡식들이 황
금물결이 되어 너울거리는 모습을 참 좋아해요. 그리고 겨울을 준비하느
라 구슬땀을 흘리며 양식 준비하는 동물들의 모습 보는 걸 참 좋아해요.
그런 풍경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신나고 몸이 근질근질하여 들판을 마구
달리고 싶어 못 견딜 정도예요.
이제 흰눈이 쌓이는 겨울이 오면 토끼들은 먼 여행을 다니기가 힘들어
져요. 앞발이 짧아 눈에 빠지는 날에는 큰 위험에 빠지게 되니까요. 그런
겨울이면 토리는 마을 아이들을 모아놓고 여행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해요. 정말 세상은 넓고 알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법이지요.
그런데 작년의 여행은 큰일 날 뻔했어요.
“‘큰산’에는 정말 이상한 일이 많이 생겨.”
어느 날 지나가던 너구리의 말을 듣고 토리는 호기심으로 찾아갔다가
하마터면 너구리의 밥이 될 뻔했지요.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달콤한 말
로 남을 꾀고, 거짓으로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은 없어져야 할 거예요.
너구리가 그랬어요. 다정하던 너구리가 그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친절은
변함이 없어야 하는 건데.
토리는 다시는 여행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요. 하지만 가을이 오
니 또 떠나고 싶은 데 어떻게 하겠어요. 가족들은 걱정을 많이 했지만 꼭
한군데만 더 가보기로 했어요. 바로‘큰숲’이어요.
“‘큰숲’에 가보지 않고는 뭘 안다고 말 할 수 없지.”
지나가던 꽃사슴이 말했어요. 토리가 그 말에 그만 걸리고 말았어요.
“토리야, 잘 뛰는 산토끼도 여러 날이 걸리는 곳이야.”
엄마가 말렸어요. 가족들도 말렸어요. 모두 말렸어요. 그러나 토리의 마
음은 벌써‘큰숲’에 가 있었어요. 길을 떠날 때 처음엔 엄마의 걱정스런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깡충깡충 힘차게 뛰다보니 힘이
솟았어요. 토끼 아이들에게 해 줄 이야기를 생각하며 토리는 열심히 달렸
어요. 쉬지 않고 달렸어요.
“어, 어떡하지?”
‘큰숲’에 다다랐을 때 토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어요. ‘큰숲’앞 두
갈래 길에서 토리는 잠시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토리는 오래 망설이지 않
았어요. ‘나쁜동물’마을 보단‘잘난동물’마을로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니
까요.
“와글와글 씨끌씨끌…….”
토리는 잘난 동물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막았어
요. 마을은 온통 싸움이나 하듯 목청 높은 소리뿐이었어요.
잘난동물 사는 마을 ← → 나쁜동물 사는 동물
“웬일이야?”
토리는 그 중에서 제일 큰소리가 나는 여우네 집 창문 밑으로 가만히
다가갔어요. 집 안에서는 한참 말싸움이 벌어지고 야단들이었어요.
‘야, 넌 누굴 닮아 그런 거야. 아빠는 너만 했을 때 2등이 뭔 줄도 몰랐
다. 했다 하면 1등, 나갔다 하면 우승이다. 너처럼 공부 못하는 일은 상상
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당신도 똑같애. 집에서 대체 뭘 하고 있기에 애들
이 다 저 모양이야.”
“그런 아빠는 뭘 잘하셨다고 큰 소리에요, 매일 늦게 들어오고 집에선
신경질만 부리고 휴일엔 잠만 자고, 가족과는 얘기도 안하고-----. 1등 했
다는 걸 누가 믿어요?”
대드는 아들 여우 말이 끝나기 전에 엄마 여우가 질세라 끼어들었습니
다.
“에구, 난 뼈 빠지게 애들 키우고 밥하고 빨래하고, 허구한 날 손에 물
이 마를 날이 없는데 쥐꼬리만 한 돈을 갖다 주곤 무슨 큰 소리야. 큰 소
린.”
여우네 가족은 서로의 잘못을 끄집어내어 욕하고 상처주기에 바빴어요.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상처를 주기위해 열심히 떠들어댔어요. 정말
제 잘난 멋에 사는 가족이었어요.
마을 한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마을 회의가 모두 남의 약점을 물
고 늘어지고 있었어요. 말이 회의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말로 짓누를까
하는 대회 같았습니다. 당연히 회의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회장, 내놓아라. 그 따위로 하려면. 우리 마을이 걱정이야.”
“내가 회장 했다면 우리 마을은 확 달라졌을 거야. 참 걱정이다.”
“피-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 파악이 안 되니 우리 마을 어떻게 해.”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더니 정말 맞는 말이야. 용감한 사람만 있는 우리
마을 큰일 났다.”
“아유아유 모두 못난이들이야. 나만 똑똑해선 우리 마을 정말 걱정이야”
말들은 끝이 없었고 이상하게 마을이 걱정이란 말을 빼놓지 않았어요.
자기만 마을을 생각하고 화를 버럭버럭 내며 걱정한다는 소리뿐이었어요.
그 가운데서 평소에는 표정을 드러내 놓지 않는 늑대, 뭐든지 덥석덥석
차지하기만 하는 너구리, 재주 많고 흉내 잘 내는 원숭이, 예쁜 모자와 옷
으로 화려한 치장을 한 앵무새가 더 심했어요.
토리는 서둘러 마을을 빠져 나왔어요.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었기 때문
이어요. 잠시 더 있었다면 속이 메슥거려 먹은 걸 다 토했을 거예요.
토리가 마을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마을 입구에서 울고 있는 동물이 있
었어요.
“왜 울고 있나요?”
“으흑으흑.”
“어디 아프세요?”
“크윽크윽.”
토리가 동물마다 물었지만 울기만 했어요.
“참 잘 생긴 동물들이 울고 있으면 어떡해요. 저런 멋진 옷도 입고, 키
도 아주 크고, 번쩍거리는 구두도 신고 왜 울어요?”
그제야 울던 동물들은 배시시 웃었어요.
“토끼야, 우리 괜찮게 보이니?”
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물들이 우는 이유를 말해 줬어요.
“흰 토끼야 우린 이제 어쩌면 좋니. 더 이상 잘난 체 할 것이 없어. 자
랑하던 밑천이 다 떨어졌단 말야. 이젠 저 꼴깝 떠는 동물에게 당하기만
하니 그게 서러워서 그래.”
정말 토리가 상상해 보지도 못한 기가 막힌 대답이었어요. 하지만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어요. 자기도 그런 때가 있었어요. 거북이 친구를 놀려준
일이어요.
“야, 짜리 몽땅 거북아, 어딜 기어가니 그러다 해 지겠다 해 지겠어.”
그 때 거북이가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지요..
“흠흠. 여기서 나만큼 잘 뛰는 동물 있으면 나와 봐.”
돼지들이 모인 곳에서 마음껏 뽐내던 생각도 났어요. 토리는 깊이 뉘우
쳤어요.
토리도 이제껏‘잘난 마을에 사는 동물’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토리는
돌아섰어요. 잘난 동물들이 자기 같고 저 모양인데 나쁜 동물들이야 말해
서 무엇 하겠어요.
토리가 막‘나쁜마을’입구를 지나가려고 하는데“하하 호호 깔깔 껄
걸---”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아니, 나쁜 동물들이 저렇게 기쁘게 웃다니…….’
토리는 살며시 다람쥐 집 창문 밑으로 다가갔어요..
“내가 나쁜 다람쥐다. 너희들을 위해 좀 더 통통한 도토리 먹이를 구해
와야 하는 건데.”
“아닙니다. 저희가 더 나빠요. 애써 벌어온 양식을 맛 없다고 불평만 했
으니까요.”
다람쥐 식구들은 식사를 하다말고 서로 자기가 나쁘다고 말하고 있었어
요. 그러니 누가 화를 내겠어요? 나중엔 온 식구가 서로 등을 쳐주며 한
바탕 신나게 웃는 거였어요.
마을 한복판에서 열리고 있는 회의도 마찬가지에요. 황소, 곰, 오리, 양,
들은 모두 자기가 나쁜 동물이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제가 나쁩니다. 밭을 더 깊게 갈아엎질 않아 곡식이 적게 열렸으니까
요.”
“아닙니다. 제가 나쁩니다. 거름을 더 많이 날라 와야 하는 데 그만 꾀
를 부렸습니다.”
“아니예요. 모든 동물들은 열심히 일했어요. 제가 잡초만 제때 뽑았더라
면…….”
“제가 제일 나빴어요. 가뭄을 대비하여 깊은 우물을 팠어야 하는데….”
회의는 조용히 진행지고 있었어요. 모두 미안한 몸짓으로 잘못했다고
하니 화를 낼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다 들에는 저렇게 곡식이 잘 익었는
데 말예요. 그러니 나중에 웃음밖에 더 나오겠어요? 그것도 정말 기쁜 웃
음소리 말이어요. 마을은 윤기가 흐르듯 살기 좋아지고 아이들은 쑥쑥 잘
크고 마을 사람들은 서로 사랑할 수밖에요.
토리는 손바닥에 한번 써보았어요.
내가 잘났다. 내가 나빴다.
어느 것을 더 많이 사용하여 살았는지. 토리는 정말 부끄러웠어요. 토리
는 다짐했어요.
‘이번 겨울엔 우리 마을도 나쁜 마을로 만들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피곤하고 짜증난 게 슬그머니 사라지고 힘이
솟았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토리의 뜀박질이 아주 가벼워졌어요.
‘내가 나빴어.’
라고 말해야 할 곳이 너무 많이 생각났어요. 늦게 가다간 다 말할 시간
이 모자랄 것 같았어요. 그러니 토리의 발걸음이 빨라지지 않을 수 없었
어요.
토리는 커다란 두 귀가 뒤로 재껴져 착 달라붙을 만큼 속도를 내어 달
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