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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5년 [수필-서미숙]엄마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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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72회 작성일 06-01-3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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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통증이 시작되었다. 너무 아프다. “아프다 .나 살려줘 나 살려줘”
소리를 질렀다.
고통을 안고 새벽 0시 14분 아이는 건강하게 나왔다. 3.4kg. 건강한 딸
아이가 태어났다. 피부는 뽀얗고 머리는 검게 숱이 많은 예쁜 아가였다.
난 이 아이를 갖고는 열 달 내내 뭘 먹지도 못했다.
입덧이 심해서 과일로 배를 채웠다. 그리곤 끄덕하면 병원신세에 링겔
로 며칠을 견디기도 했었다. 그리고 겨우 만삭이 되서야 뭘 먹을 수 있었
다. 그것도 엄마가 쟁반 채 머리에 이고 날 위해 날라다 주신 설렁탕만 먹
어댔다.
엄마를 바라다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그동
안 살면서 속도 많이 썩인 것 같고, 엄마를 많이 슬프게 했는데 눈물이 나
왔다. “애 낳고 울면 눈이 나빠진다. 울지 마라 이제 너가 철이 드는 거야”
“하지만 아이 키우려면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이 철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엄마가 되었네? 우리 딸이 엄마가 되었어“
그렇게 낳은 딸 아이가 지금 18세가 되었다. 머리도 좋았고 공부도 잘
해줬다.
예능에도 소질이 있었고 나름대로 잘 키운다고 키웠는데 아이는 중학생
이 되면서 심한 사춘기를 겪었다. 엄마 말은 들으려고도 안하고 좋지 않
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초등 때 우등상을 받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성적도 점점 떨어졌다. 이상스럽게 삐딱거리는 행동들만 했다. 매일 지각
에 온통 멋만 부리고 학교생활을 적응을 하지 못했다. 학교선생님들한테
도 아이는 찍혀진 아이로 낙인이 되고 말았다. 다른 아이들이 한 일도 우
리아이가 한 것이 되었다. 지나가다 만나도 합류가 되어 벌을 받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이리 맞고 저리 맞고 아이는 상처를 입을 대로 입고
찢기고 찢기며 힘들어했다. 그래도 공부는 반에서 15등 내외는 했지만 인
정받지 못했고 모든 선생님들이 이아이가 꼴찌에서 맴도는 아이로 알고
있었다. 행여 학교에서 읽히는 권장도서를 누가 읽었나? 하며 반 아이들
에게 선생님이 손들어 보라 하면 우리아이가 들면 의아해 했고 이상스러
워했다.
선생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백점을 맞겠노라고 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백점을 맞았으나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선생님이
밉다며 밤새도록 울기도 했다. 잠깐 아이가 선생님의 설득력으로 공부도
하고 순간 전교 50등 성적을 올려 기쁨도 주기도 했으니 오해로 빚어져
얽히고 얽혀서 또 다른 사건으로 아이는 휘말렸다. 아이는 선생님들을 신
뢰하지 않게 되었다. 너무나 힘겨워 하는 아이 더 이상 이곳에 이이를 두
었다간 정신병원에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전에 학교에서 아이가 이
상하다며 정신치료를 받아 보라고 권유도 받아 강릉병원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 정신치료를 받을 당시 의사 선생님 말씀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
다. 이 모든 것은 어른들의 잘못이이라고 지극히 정상이고 똑똑한 아이라
며 이제 그만 오라고 했다. 그런대도 학교에서는 상담 선생을 외부에서 데
려와 아이는 또 상담을 받았다. 정신병자 취급을 하던 어른들 아이는 학
교가 지긋지긋 하다고 했다. 미련도 없다고 했다. 결국은 자퇴를 쓰라는
권유를 받고 서울로 학교를 옮기고 침울한 어둠을 안고 사는 내 아이 엄
마와 생이별 아닌 이별을 했다. 3학년 말에 전학을 하니 첫 번째 학교에
서는 이상한 듯 나와 아이를 5시간 세워놓고 결국은 이리저리 핑계로 아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교육청에 가서 이야기 했더니 교육감님이 속상해
하면서 원하면 넣어주겠다고 그러나 받아주지 않는 학교에 가서 아이 고
생 시키지 말고 기독교 법인인 더 좋은 사립학교로 추천을 해 줄테니 그
리 가라고 했다. 첫 번째 학교에서 퇴짜를 맞고 서울의 지하철 역 안에서
아이와 나는 울어야 했다. 그리고 간 두 번째 학교 앞에서 아이와 손을 잡
고 기도를 한 탓일까? 다 퇴근하고 아무도 없어서 포기하려고 했는데. 다
행히 담당선생님만 계시고 그 담당선생님이 담임 될 거라고 하셨고, 마침
그 자리 아이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비어있다고 잘되었다고 일을 빨리
처리 해주시고 그 아이가 입던 교복도 아주 깨끗하다고 새로 사지 말고
이거 입고 졸업하라고 하면서 정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이도 정말 좋
아했다. 자기네 학교가 속초의 k대 보다 터 크다고 하면서 좋아했다.
여기와는 달리 중 고등학교가 같이 있어 시설도 좋았다. 무용실도 있어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서 무용을 배운다고 좋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처럼
머리를 이상스럽게 하고 다니는 아이들도 없고 교복도 줄여 입는 애들도
없고 다들 모습이 모범생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렇게 하고 다니지 말라는 핀은 꽂고 다녀도 아무도 어떤 선생
도 뭐라 하지 않았고 그래 자기도 심심하고 재미없어 그 핀을 안 하고 다
닌다고 했다.
그렇게 머리 갖고 여기선 걸리고 교복을 줄여 난리를 피던 갈등들도 다
어디로 가고 긴 머리에 단정하게 묶은 머리 그 난리를 치며 빼앗기던 운
동화도 그곳에선 신고 다니지 않았다. 아무도 여기서 신던 그 운동화를 신
은 아이도 없었고 아예 학교에서 구두를 신게 규정이 되었었고 굳이 신지
말라 하는 신발도 왜 아이는 이곳에서 고집을 피며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
으며 신으려 했고 왜 그곳에선 신지 않는 걸까? 아이들이 전혀 신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신지 않게 했을까? 신기함, 신기함 뿐이었다. 그렇게 멋과 난리
를 부리던 아이는 멋에 신경도 안 쓰고 평범 속에서 아이들과 어울렸다.
아이는 모습도 많이 밝아졌고 그 난리를 피며 떼놓으려던 아이들과도 연
락이 두절되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하루는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궁금해서 서울로 가봤다. 엄마랑 더 있고
싶은 욕심에 전날 늦잠을 자 지각을 했다. 처음 지각한 것이다. 매일 아침
7시에 학교를 나선다고 했다.
세상에 기이할 일이다. 여기서 지각 대장이던 녀석. 교문 앞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녀석이었는데 그 학교는 좀 달랐다. 교문 앞에서 학
생과 선생님이 커다란 몽둥이 하나 들고 팔짱을 끼고는 지각하는 아이들
에게 눈짓으로 고개를 까딱하면서 옆으로 가라라는 표시를 했다. 아무런
대화도 왜 지각 했냐 어떠한 이유도 달지 않고 아이들도 이유도 대답하지
않고 스스로 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토끼뜀 두 바퀴 돌더니 툭툭 먼지 털
고 일어나 가방 메고 자기 교실로 향했다. 아이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
더니 교실로 간다고 했다. 엄마 여기는 이래 하면서 내게 미소를 보이며
단지 여고 언니들한테는 창피하다고 만 했다.
아이의 학교로 들여 보내놓고 학교의 교정을 밟았다. 내가 다니던 여중
여고 그래 참 낭만 적이었지 한참 학교를 둘러보니 크긴 컸다. 다시 서울
인 내 고향으로 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넓은 곳에서 아이들도
공부 시키고 싶었고 나도 내 고향이 좋아 보였다.
넓은 운동장 대학 캠퍼스 같은 이 학교를 좀더 일찍 다녔다면 그 많은
시간을 상처로 남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 그리고 나 자신의 무력감에
한숨이 나왔다.
갑자기 아이의 예전 학교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도 아이가 말썽을 피웠
다며 당장 학교로 오라 는 앙칼진 선생님의 목소리를 전해 듣고 달려갔었
다. 학교가기가 아이 말마따나 나도 싫었었다. 시간을 뭉그적거리며 끌어
보았지만 불나는 전화통에 발길을 학교로 향했다. 살아간다는 것 힘겨워
숨이 차올랐다. 더 이상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고 이런 상황에서 이
길을 가야 하는지 그만 내 삶의 고단함의 날개를 접고 싶었다. 아이와 같
이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자꾸 엇갈리는 선생님들과 갈등 그리고 이해부
족 서로의 충돌 힘겨웠다. 상담을 받고 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천금을 지
고 걷는 것 같았다. 아이가 뭘 그리 잘못을 했는지 가슴만 답답하고 왜 그
렇게 슬프던지 운동장에 멍하니 서서 울었다. 학교 운동장은 아름다운 음
악으로 가득 차있었고 방송 반 아이들이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가 초등 6학년 때 방송 반 아나운서로 뽑혔다며, 이 엄마와 함께 아름
다운 멘트를 지어내기 위해 밤을 지새우던 일도 있었는데, 너는 이날을 기
억하고 있을까? 오늘도 잘 알지도 못하는 어느 선생님에게 네가 잘못한
일에 대해 사죄하고 나왔었다. 운동장에 힘없이 주저앉아 너라는 딸을 둔
엄마의 모습이 왜 그렇게 더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던지 너는 알고 있
을까? 운동장에서 떠들어 대고 있는 많은 아이들이 볼 새라 끝없이 나오
는 눈물을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닦아도, 닦아도 소용없는 엄마의 눈물샘
은 왜 그렇게 깊은지 하고 원망만 했다. 나의 어린 딸아 무엇이 그렇게 힘
들어서 이 청명한 하늘 밑 교정 시끄럽게 떠드는 저 아이들의 행렬 속에
늘 너는 없는 걸까? 엄마는 묻고 싶다. 너의 작은 가슴에 어떤 멍들이 도
사리고 있어 이렇게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엄마는 그것이 너무 슬
프단다. 몇 번이고 죽음을 시도하고 또다시 이렇게 일어서고 할 수 있었
음은 그래도 아직 까지는 너는 내 딸이고 난 너의 엄마라는 사실임을 기
억 해다오 딸아 언젠가 너를 기다리면서 본 교정 너희들이 뛰노는 모습들
이 보였다. 치마를 줄여 엉덩이가 딱 달라붙게 걸음은 게걸음으로 걸어야
편안한 모습으로 하고 그렇게 벗지 말라는 스타킹을 갑갑하다며 살갗이
틀 것 같은 이 쌀쌀한 봄바람에도 고집을 피며 스타킹을 내 던져 버리는
너희들 한쪽 구석 에서 그 폭이 터질 듯한 치마를 입고 서로 발차기를 하
더라, 아슬아슬한 묘기를 보든 듯 했지 저러다 속옷이 보이면 어쩌나 하
는 엄마의 마음도 무시한 채 장난을 치는 철부지들 치마를 저리도 몸에
꼭 맞게 줄여 입는 것은 과연 멋을 알기 때문일까? 아침 전쟁을 치루고
그 전쟁이 휴전인 동안 엄마는 널 잊지 현실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면서
나름대로 생활에 젖어 이것저것 할 일을 다 못한 채 어김없이 4:30분이면
그 전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네 학교 앞에서 기다리지. 마지막 수업
종이 울리고 시끄럽게 운동장을 배회하는 아이들, 교문 앞에 줄지어선 학
원 차들의 빵빵 거리는 크락션 소리들, 방과 후 활동을 하기 위한 풍물 반
속에서 장구소리 괭꽈리 소리들도 들려왔다. 너도 한 때 장구를 배웠지.
지금쯤 저 속에 같이 있었다면 아마 수준급은 되어있겠지. 무엇이 문제인
지 늘 엄마와의 엇갈림으로 치닫는 너 이 좋은 시간에 장구도 치고 그림
도 그리고 책도 읽으면서 사춘기를 멋스럽게 보내라고 해도 멋 부리고 남
을 따라하는 획일성에 젖어 있지.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양 목슴 걸 듯 덤
비다가 엄마한테 맞아서 팅팅 부은 종아리, 온몸이 멍이 들도록 맞아도 넌
또 튕겨져 나갔지. 힘든 사춘기 엄마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겨지게 하는지?
딸아 여러 생각도 해봤지. 되물어보고 다시 들여다봐도 알 수 없는 수수
께끼야. “ 딸아 엄만 왜 너의 교정을 늘 상 이 초라한 모습으로 눈물을 벗
삼아 밟아야 할까“
“딸아 엄만 많이 아파 그래 알아 너도 이 엄마만큼 더 아프겠지 그러나
이 아픈 엄마를 위해서 아니 앞으로의 너의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 아름
답게 살아 갈 순 없는 걸까? 우리는 인생을 머뭇거리기에는 너무 짧아 아
름다운 내 딸아”
운전을 하면서 수없이 뿌린 내 눈물 속에 이런 글귀가 생각났지
[안경을 잠시 벗고 뿌연 내 눈을 비벼봅니다.
일하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붙여 놓은 노란색 포스트잇이 들어오기에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이런 글들이 써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변화가 없다고 포기하지 말기
상황이 나쁘더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기
옳다고 생각한 일을 끝까지 흔들리지 말기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과 관심을 쏟아 부울 것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일 할 것
내가 어디쯤 와 있는 건지 잘하고 있는 건지 여유를 가지고
안경을 박고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 볼 때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도 있으니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생각했으면 포기하지 말고 더 사랑해주고
기다려 주고 믿어주는 것
우리의 마음이 파릇파릇 봄날이 있었음 합니다.
자 괜찮습니다.
산다는 게 원래 그런 것 인생의 단편 때문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툭툭 털고 일어납시다.
한사람의 마음도 제대로 추스릴 줄 모르면서
마치 삶의 전부를 다 아는 양 슬픈 만용을 부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작자미상
“딸아 엄마도 이젠 또 다른 일을 위해서 일어서야겠다.
엄마에게 그 일어 설 수 있는 힘을 너의 손을 잡고 일어서고 싶구나.
엄마에게 손을 내밀어 다오”
텅 빈 교정에서 혼자 앉아 딸에게 편지를 썼다. 침울한 어둠을 안고 사
는 내 아이 맑은 하늘 서울의 도시 이곳 학교 교정에선 기쁨의 눈물이 흘
렀다. 서울서 학교를 졸업하고 아이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나름
대로 잘 맞는 것 같았으니 학군을 벗어난 학교에서 배정을 받으니 너무
먼 거리라 하루에 전철을 6번씩이나 타야 하는 어려움, 사실 경제적인 것
이 제일 힘겨웠다. 다시 아이를 데려오고 싶은 욕심에 s여고에 알아보니
마침 자리가 있어 어서오라고 하여 아이를 데러왔다. 그러나 아이에게 지
난 중학교의 과오를 들 쑥 이면서 소문이 돌고 급기야는 제자리걸음이 되
었다. 경제적으로 힘겨워도 그냥 둘 걸 하는 후회와 전학한지 54일 만에
학교에서는 자퇴를 섰다. 반 강제였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 그리고 왜 내게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지 이
유를 잊고 말았다. 나름대로 많은 봉사와 생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
곳이 내 제 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뿌리는 내리고 살고 싶은 내 욕심
그리고 사화사업이 꿈인 나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서울로 떠나고 싶었
다. 허술한 환경조건 교육조건 그리고 통하지 않는 지역적인 특성 나와 아
이에겐 역부족인 이 타지, 아름다움으로 살기엔 현실 적으로 힘겨움이 보
이지 않게 내포되었다.
난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그리고 아이도 울지 않았다. 더 당당하게 교
문을 나왔고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로도 함 가보는 거야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분명 넌 할 수 있어 엄마가 도와줄게 맞지 않는 울타리는 가끔 벗어
나도 충분한 생활을 하며 살 수 있다. 왜 넌 아직 어리니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올 듯 했지만 아이도 그리고 나도 눈물을 삼키고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눈 속에 고인 눈물을 삼키는 모습을 그리고 엄
마의 눈 속에 고인 눈물을 삼키는 모습을 아이도 알고 있었다. 지난 일에
는 후회는 하지 말자 약속하자 그리고 더 당당하게 살아가자
아이는 집에 돌아와 허탈한 모습으로 그리고 일주일 내내 종이학을 접
기만 했다. 말없이 그리고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그 접어놓
은 색 색깔 종이학을 보면서 날려 보내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아니 아이
가 문 걸고 자는 방 속에선 소리가 들렸다. 종이학이 날고 싶어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아이들의 사춘기를 곤충으로 비유할 때 변태라고 했다.
애벌레가 성충으로 탈바꿈하는 변태의 과정 속에서 아이도 아닌 것이
어른도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 변태의 과정의 애벌레가 날아다니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땅으로 떨어지거나 지나가던 다른 새들의 먹
이가 되어버린 다면 그들의 인생은 끝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시기 우리 어른들은 어떠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
다 봐야 할지 애벌레가 나비를 흉내 내며 날기를 원할 때 무조건 때리고
부셔서 말려야 하는지 애벌레가 잘 자라서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하는지 생각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가 다니
던 홍익인간을 강조 하며 인성교육을 애쓰는 교사들도 많이 줄고 교육의
형태도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성장 또는 후퇴 해 가고 있다.
가정과 그리고 교사 그리고 아이와 삼위일체가 될 때 그 교육의 효과는
엄청나고 성공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 나부터도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을
버리려 한다. 요즘은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은 안으로 감싸 안고 거두려는
참된 교육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어떡하면 밖으로 내 쳐서 현존에 있
는 아이들에게 물들게 하지 않는 다는 공교육의 현 실정을 이야기 하며
그 아이들은 결국 밀려나게 되어 있다. 갑갑한 교육의 현실에서 소외된 아
이들 정말 너무나 말썽을 부려서 밀려난 아이들과 그리고 너무나 똑똑해
서 감당할 수가 없어서 밀려난 아이들 그 아이들의 공통점은 둘 다 말을
안 듣는 다는 것이다. 말을 안 듣는 것과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내세우는
일도 말대답으로 되어버리는 갑갑한 현실도 있다.
현재 우리 아이는 지금 검정고시를 보고 나름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있다.
가끔 지나는 아이들의 교복에 시선이 가면 가슴 아리던 것도 이젠 다
지나갔다. 서울에 있을 때 아이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면 이 노랫말이
들렸었다.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더는 슬퍼하지 않아
다신 외로움에 슬픔에 난 흔들리지 않겠어,
더는 약해지지 않을게 많이 아파도 웃을 거야
그런 내가 더 슬퍼보여도 날 위로 하지 마
가끔 나 욕심이 많아서 울어야 했는지 몰라
행복은 늘 멀리 있을 때 커 보이는 걸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나게 아픈 날엔 크게 한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가끔 어제가 후회 되도
나 지금 사는 오늘이 내일 보면 어제가 되는 하루 일 테니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나게 아픈 날엔 크게 한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앞만 보고 걸어갈게 때론 혼자서 뛰어 라도 갈께.
내게 멈추던 조그만 슬픔도 날 따라오지 않게
—서영은 <혼자가 아닌 나>”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핸드폰 액정화면에 새겨진 말이다. 지금도 이 노
랫말이 거리에서든 어디에서 들려오면 난 가슴이 져린다. 엄마에게 집착
이 유독 심했던 아이가 엄마와 떨어져 살면서 많은 외로움과 친구들에 대
한 그리움을 대신 하기 위해 자신만이 견딜 수 있는 해결책 이었던 것이
다. 외활머니와 둘이 살면서 아이는 그동안의 모든 외로움을 다 견디고 지
냈을지 모른다. 작은 가슴속에서 견디기 위한 그 한 가지 방침을 난 가슴
아리게 봐왔고 느껴왔다.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더 크게 성장 할 것이다. 지금 오히려 선택된 이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성장해 가
고 있다. 때론 슬프게 그리고 때론 기쁘게 자신의 작은 꿈을 펼치면서 말
이다. 날이 차가운 요즘 옷장을 정리하면서 곱게 쌓아둔 아이의 교복을 보
면서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를 보면 지금의 선택이 정말 잘
한 것 같다. 옷장 맨 밑바닥에 넣어둔 교복이 때론 아쉽기도 하지만 밝아
진 아이의 모습과 성격들 그리고 아직까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공
부를 틈틈이 하는 아이를 보면 난 이렇게 중얼거리곤 한다.
“엄마라는 이름이 힘겹구나. 하지만 결코 이 선택이 부끄럽지 않게 널
앞으로 더 멋지게 아름답게 키울 자신이 있어. 그래 난 역시 너의 엄마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