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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5년 [수필-이은자]논산 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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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40회 작성일 06-01-3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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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시 무렵 부영아파트 3단지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두부장수가
있다. 논산 두부를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는 아주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말 처럼 논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던 논산이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로 변
했다. 論山이라 표지석 하나가 부영 9단지와 6단지 사이 언덕길에 서 있
을 뿐이다.
자식 대여섯 중에 한 둘만 겨우 중학교에 보내고 살던 토박이 농사꾼들
은 속초시가 확장되면서 부영A이 들어설 자리로 택함(?)받아 갑자기 큰
돈을 손에 쥐는 횡재를 잡았다.
두부 파동이 일고 있을 적에도 논산 두부 장수는 여전히 하루에 팔리는
수량 만큼만 만들어 내다 판다. 묵히는 일이 없다. 시간 맞추어 가면 따끈
한 두부 한 모를 2000원씩에 사온다.
비라도 추적추적 오는 날엔 출출함을 달래기엔 더 없이 좋은 먹거리이
다. 두부가 워낙 커서 한 모 가지고서도 우리 두 식구에게 요기가 된다.
시중에서 사온 두부는 냉장고에 이틀을 못 둔다. 쉬어 버리기 때문이다.
유통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가 보다.
그러나 논산 두부는 온기를 식혀서 냉장고에 두면 본래의 맛을 간직한
채 사나흘은 끄떡없다. 방부제가 들었을까 의심 할 필요는 없다.
논산 두부를 먹으면 내 학우들 중에 청대리와 논산에 살던 동무들이 자
꾸만 생각난다.
우리가 중학교 다니던 1950년대 중반, 속초는 인공(人共) 치하에서 막
수복된 고장이다. 전쟁의 잔흔(殘痕)이 산천에 즐비했고 가정마다 아픈
골이 깊이 패어 있었다. 그 애들은 학교에 올 적에 양동이 하나씩 들고 오
기를 자주 했다. 책은 보자기에 싸매어 그 동이 안에 담거나, 애기를 업는
것처럼 등에 메고 양동이 손잡이를 틀어쥐고 교문에 들어선다. 영문을 모
르는 애들이 처음엔 너들 지금 뭐 하는 거니? 하며 깔깔댄다. 그러다 차
차 그 사정을 알게 되면 무안해 한다.
그 당시 논산에는 두부를 안 하는 집이 거의 없었다. 두부 만들 때 간수
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인데 어른들은 일 손이 모자라 아이들에게 간수(간
水)를 길어오게 한 것이다. 소금이 귀한 시절이기도 하거니와 두부 만드
는 간도(간度)는 바닷 물 만한게 없다. 돈도 들지않고.
학교가 파하면 다른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테니스며 배구를 즐길 때 그
애들은 한눈 팔지않고 교문을 나선다. 길 건너편에 남자중학교에서 남자
애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큰 길까지 나가려 한다.
우리학교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교동 초입일까? 거기서 부월리 앞 바닷
가 까지 걸어서 간다. ‘쌍다리’쯤에 오면 배가 고프다. 한창 자랄 때라서
돌을 먹어도 삭힌다는 말도 있는데, 감자나 보리가 반 이상 섞인 도시락
을 먹은게 언제였나.
청초호반을 빙 돌아 부월리 솔밭을 지나 바닷가에 이르는 거리는 버스
정류장 열번 정도였다. 지금 속초 해수욕장 일대가 부월리 바닷가다. 그
곳은 온통 공동 묘지였다. 우리나라 해안 마을엔 바닷가, 즉 해안 사구 지
역에 공동 묘지가 많다. 임자 없는 땅이라서 일까, 아니면 외진 곳이어서
일까? 공동 묘지는 낮에 가도 무섭다. 그래서 혼자서는 안 간다.
그들은 무서움증 때문에 서둘러 바닷 물을 동이에 담는다. 물결이 잔잔
한 날엔 맑은 물을 쉽게 채우지만, 파도 치는 날이면 옷도 젖고 모래알을
걸러 가며 담느라 힘이 든다. 양동이 아구리엔 두 세 군데 홈 줄이 있어,
이고 걸을 때 잔물결이 일어 넘치는 것을 막아 준다. 아이들은 그 줄 맨
위까지 물을 채운다. 힘들게 온 길이니만치 한 바가지 라도 더 길어 가려
고..
머리에 간수를 이고서 걷는 걸음은 빠를 수가 없다. 오던 길을 되 돌아
마을길을 또 걸어 집으로 간다. 아이들이 이고 온 간수는 이틀이면 동이
났다.
내 아파트 204호에 홀로 사는 87세의 노인은 열 다섯에 이 마을로 시집
와서 이 나이 되도록 살아온 순 토박이시다. 어느 날 나는 그 노인에게 따
끈한 두부 한 모를 드렸다. 미안하다 하면서도 어찌나 반기던지.. 두부를
받아 들여다보는 눈가에 물기가 서린다. 노인이야 말로 두부 한 모를 가
지고 닷새는 자신단다. 노인의 눈 가에 서린 물기를 나는 그저 노안이거
니 했다. 또 한번 두부를 사다 드린 날 밤에 내 방에 마실 와서 하는 이야
기를 들어본다.
두부 만드는 일은 꼬박 이틀 걸린다. 오늘 초저녁에 콩을 씻어 물에 불
린다. 이튿날 새벽 별을 이고 나가, 소 여물 솥에 불 지피고 곧 돌아앉아
콩 맷돌질을 한다. 삼베 자루에 넣고 돌을 눌러 콩물을 받아 큰 솥에 간수
를 치며 끓인다음 다시 보자기를 깔고 건져 누른 다음 적당한 크기로 칼
집을 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저녁 저자거리에 갈 시간이다.
더운 김이 빠지기 전에, 우리들 학교보다 더 먼 중앙시장에 이고 간다.
머리 정수리가 다 벗겨지나 싶다. 무겁고 뜨겁다. 해거름에 다 팔고 내일
쓸 콩도 산 날은 운 좋은 날이다. 더러는 어둑할 때 까지도 두부 함지를
지키다가 굴뚝에 늦은 연기를 올린다. 늦은 저녁 상을 기다리는 식구들은
허기지기 일수다. 남정네는 농사일로,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밥 한 술
기다린다.
그 민망함으로 치자면 두부가‘웬쑤’란다. 하지만 두부 만한 벌이도 없
다. 비지는 그것 대로 돈이된다. 농사라야 겨우 입살이에 불과 한데 두부
말고는 돈을 만져볼 방도가 따로 없다. 아이들 학교 뒷바라지, 어쩌다 가
는 의원 집도 그 두부 덕에 다 비져 나간다.
노인은 두부를 보자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가 또 생각나서 눈물이 비쳐
졌던 것이다.
어느날 두부가 왜 그리 먹고 싶던지. 입 밖으로 내색도 못 하고 장에 갔
다. 그날 따라 두부는 단숨에 모두 팔렸다. 운 좋은 날이라서 더 서러운
새댁이 저녁 밥도 그 두부가 눈 앞에 밟혀서 먹히지 않았다. 그날 밤 굴뚝
뒤에 나가서 실컷 울고 야 잤다며 눈을 문지른다.
‘안 팔려서 가져왔노라 하고 먹지 그랬냐’내가 훈수 들었더니
‘남아 오면 어른들 상에 올리지 내 차례가 오는가’한다.
그러던 세월은 가고,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매일이라도 두부를 먹을 수
있건마는 한 모를 가지고 사나흘이나 먹는단다. 그저 어이 없는 세월을 살
았더란다.
지금 논산 두부 집에선 콩은 기계로 갈고, 소금을 풀어 간도측정기로 간
수를 얻는다. 다 된 두부를 자가용 차로 실어다 그 자리에서 판다.
격세지감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논산 두부를 먹으면서 할머니와 나는 늘상 이렇게 다른 추억에 잠긴다.
조그마한 일에서도 이내 부끄럼 타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죽을 수
도 있었던 사춘기 소녀들, 학교에 양동이를 가지고 와야 했던 그 지순한
동무들이 있었다. 그런 모양으로 나마 학교 다니게 해 주는 부모님이 마
냥 고마웠던 내 동무들이 있었다. 무거운 간물 보다, 부월리 바닷가가 무
서웠던것보다, 그 걸어가는 길이 너무 멀었 던 것 보다 더 감당하기 힘 들
었을 부끄러움을 그들은 어찌 주체했을까?
감사와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복종이 아니라 부모,
동기간에게 향한 사랑의 수고 였을 것이다. 자발적인 순종이였을 것이다.
제 손으로 만든 두부를 제 머리 꼭대기에 이고 가서 팔면서도 시집살이
란 형(刑)을 사느라, 눈물 나도록 먹고 싶음을 참아냈던 아이 밴 각시를
어찌해야 하나?
그 동무들은 다 이 마을을 떠나고, 그때 그 새각시 적 할머니하고 내가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논산 두부를 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