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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5년 [수필-이은자]내가 버린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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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20회 작성일 06-01-3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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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쳐서 깨어지면 물거품만 남기고
가버린 그 사람을 못 잊어 웁니다
파도는 영원한데 그런 사랑을
맺을 수 도 있으련만……(배호)
주문진 소돌포구에서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어찌나 반갑던지. 오래 전에
내가 버린 노래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 방파제 바깥 저만치에 인공
구조물로 서 있는 기둥에 대접 모양의 둥근 그릇이 있다. 그 그릇에 500
원 짜리 동전 하나를 딸랑 던져 넣으면 배호는 좀 느린 템포로‘파도’를
부른다. 한 때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들 중엔 배호의 노래가 여러 곡이 있
었다. 고복수, 남인수, 황금심, 백나나에서 배호에 이르기 까지 나는 어릴
적에 이미 유행가를 많이 알고 있었다. 내 선친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선친은 과히 레코드 수집광이라 하리만치, 우리집에 없는 음반이 없었다.
출장에서 돌아올 적 마다 그것 한 두장을 사왔다. 할머니(모친)와 엄마
의 지청구를 피해서 굴뚝 뒤에 숨겨 두고 며칠씩 나더러 망을 보게 하다
가 적당한 구실이 생기는 날 서재로 슬그머니 들여왔다. 나는 아버지 서
재에서 꽤 많은 곡을 귀에 담았다. 뜻은 모르면서. 아버지는 LP판을 들을
때 음반에 흠집 낼세라 참대 바늘을 사용했다. 그럴때 엄마나 할머니는 밤
낮 그 소리가 그 소린 것을, 사설 한 자락도 없는 노래를 무슨 맛으로 저
리 좋아 듣는가? 하였다. 나는 자라면서 그 곡들이 제각기 이름이 있다는
것과 한 곡씩 그 이름을 새로 발견 할 적마다 재회의 기쁨 같은 것을 느
꼈다. 민요나 유행가는 거의가 SP판이고 노모를 위한 것이었다. 여름철
날 좋은 밤이면 우리 마당엔 멍석을 넓게 깔고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이
곤 했다. 아버지는 축음기 수동식 태압을 감아가며 밤 이슥하도록 들려주
었다. 굴뚝 뒤에 숨겨두었던 새 판을 개봉하는 일도 그런 날 밤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엄마나 할머니가 노래를 싫어서가 아닌 것이 새 판
을 틀면 얼른 알아 듣는 것을 봐서도 그렇고 실제로 할머니의‘신고산 타
령’이나 엄마의‘알뜰한 당신’은 일품의 솜씨가 아니던가? 다만 식솔이
많은 집 대주에게 씀씀이 단속을 하는 것일 따름이다.
숨 가쁘게 넘고 넘어 살아온 세월, 뜻 밖의 장소에서 버린지 오랜, 기억
저편에 밀쳐져 있던 노래를 듣게 되다니, 이 또한 재회의 감격이 아닐는
지.
어느날 여행 길에서 동행으로부터 의미 있는 말을 들었다.
좋아하는 노래 따라 인생도 그렇게 풀린다던데 . 나는 귀가 번쩍 뜨였
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전통 우리민요는 발성이나 창법 자체가 별 다
르기에 부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듣는 것은 회심가, 판소리, 심지어 영산제
까지라도 신발 두 짝 벗어서 깔고 앉아 하루종일 듣는 정도다. 장르를 막
론하고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두루 있다. 그런데 새삼 보니 거의가 허
물어 진 사랑, 이별의 아픔, 허무한 인생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 삶의 여정도 그리 힘 겨웠나? 정녕 그럴진대 이제라도 나는 그것들을
모두 버릴 수 있다. 버린다. 버렸다.
이상하게도 뜻 없이 흥얼거리는 일본 노래 두 곡은 버리지 않고 내 입
에 있었다. 그 노래는 우리나라 6·70대면 누구나 부르는 흔한 노래다. 마
치‘대동강 푸른물에’아니면‘처녀 뱃사공’처럼 일본의 국민가요가 아
닐까 싶었다. 사실 나는 곡조와 발음만 알았지 가사의 내용은 전혀 몰랐
다. 어느 일본어 선생으로부터 그 노랫말을 번역해 받아보고 나는 온 몸
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시나노 요르’
‘하루꼬 로오예’
뜻 없이 부른 세월이 부끄러웠다.
‘시나노 요르 지나의 밤(支那)… 차이나의 밤, 즉 중국의 밤 이다.
그 노랫말은 대충 이러하다. 항구의 보라색 등불, 꿈을 실은 배‘장크’,
호궁의 소리, 그대 기다리는 저녁은 꽃비 나린다….
노랫말은 서정적인 어휘들로 일관되어 있는데, 나는 순간 비위가 확 뒤
집히는 것이다. 일본이 중국에 대해서 어찌했는데 그런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도 홍콩의 아가씨, 인도의 등불 같은 이국(異國)의 정취를 동
경하는 노래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홍콩의 아가씨’를 부르는 것 하고 일
본이‘챠이나의 밤‘을 부르는 것 하고 같은가? 일본이 중국에서의 추억을
노래할 염치가 있는 건가? 그들이 역사 속에 남긴 족적(足跡)의 어지러움
과 그 자국을 덮어 버리려고 혈안이 돼 있는 작금(昨今)의 태도가 한줄로
도열해 내 의식을 깨웠다. 만주사변, 대동아전쟁, 남경대학살, 그들이 그런
방법으로‘지나’를 찬탈하고 승리에 취해서 읊은, 그래서 두고두고 추억하
고 싶은 그런 밤이 아니던가?
‘하루꼬 로오예’는 어떤가?
‘코-죠 노 츠키’‘황성의 달’우리의‘황성 옛터’쯤으로 보면 될까?
그런데 그 가사를 주의 깊게 보면 그렇지가 않다. 봄 높은 누각 꽃의 향
연, 옛날의 영화 지금은 어데, 황성 한 밤중 세워둔 칼 달빛을 받아 빛나
고, 달은 여전한데 울타리에 남은 것은 마른 넝쿨 뿐이네…
무사시대(사무라이), 칼과 피의 시대에 누렸던 영화를 추억하는 노래라
본다. 아무튼 일본이 누렸다는 그 영화와 번영은 이웃을 칼로 베고 피를
손에 묻히고서 갈취한 것이 아니던가? 내 역사관에 입각해서 비위가 상했
던 것이다. 금년(2005)8월에 일본은 원자폭탄 사건을 들고 나와서 세상을
웃긴다. 원폭세대가 다 죽고 난 뒤에, 적어도 100년쯤 뒷 세대가 그들의
선대에 저지른 반 인륜적 역사를 슬그머니 왜곡해 보려고 준동(蠢動)한다
면 다소간 연민이 나마 느낄지는 모른다. 그 현장을 겪은 증인들이 세계
도처에 퍼렇게 눈 뜨고 살아있는 이 벌건 대낮에 세계에다 대고 히로시마,
나가사끼가 억울하다, 그리 아니했을 지라도 운운하다니. 묻고 싶은 말이
있다. 그 때 원폭 같은 일이 아니 였어도 그들은 스스로 종전(終戰)을 감
행했을까? 일본이 전쟁 기간 동안 점령지에서 자행한 만행이 이루 헤일
수 없지만‘731 부대’하나만 보더라도 그 말은 설득력이 없다. 그 건물은
전쟁을 수행하기위해 급히 지은 벙커나 야전병원이 아니다. 목적과 용도
가 뚜렷한 설계로 지었음이 역사는 증명한다. 어느 점에선 히틀러의‘아우
스비취’보다 더 잔인하다. 유태인들은 독가스실에 가족 이웃들과 함께 였
다면‘마루타’는 혼자였다. 기만적이긴 했으나 독가스실 입구에선 모챨트
현악 사중주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런데‘731’에선 어찌 했었나?
의식이 또렷한 건장한 사람을 도살장 같은 수술실에 끌고가서 갖가지
흉기(수술도구)를 보고 질리게 했을 것이다. 산채로 몸의 일 부분에 칼질
을 하기도 하고 극한 사항을 가해서 최악의 고통에 죽이면서 그 과정을
관찰 기록했다. 그 참람함을 어찌 다 말로 옮길 수 있을까?
소를 잡을 때도 눈을 가리고 단숨에 죽이는 법이거늘, 사과나 배를 깎
을 때 먼저 탁 하고 칼집을 내면서 우리는 아플까봐 기절 시킨다 라고 우
스갯 소리를 한다. 간혹 극단주의자들은 그 실험 기록이 인류의 질병퇴치
에 기여한다고 하는가? 그리하지 아니해도 인류는 발전하고 인간의 수명
은 유한하다.
‘히로시마, 나가사끼’같은 극단의 처방이 아니었으면 그들의 잔혹한 생
체실험, 실험실 지하에 배양해 놓은 병균을 지닌 동물들, 8000톤의 맹독성
물질은 어디를 겨냥한 것이였겠나? 그 끝이 어디였겠나? 점령지의 생명이
씨가 마를 때까지 그들의 유희는 멈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 기록
이 그 것을 뒷바침 하고 있다. 731은 중국 전역에 5개의 지소를 더 가지
고 있었고 생체실험에 동원 참여한 의사만도 1000명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6.25 전쟁 처럼 휴전협정 운운하며 시간을 지체했다면 그들은
간교하게도 증거인멸을 완벽하게 했을 것이다. 이미 노출된 사실 까지도
오리발 내 밀었을 것이다.
내 개인적 견해로‘히로시마,나가사끼’는 그들의 만행에 견주어 약하다
고 본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평생 투병중에 있는 원폭환자 개인에게
는 더 없는 동정을 느낀다. 옛부터 한 나라 백성의 운명은 그들의 왕(지
도자)을 어떤 사람 맞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는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깔끔하다. 그런데 집단
의식은 전혀 딴 얼굴인 것을. 나는 일본에 대해 거의 맹목적이다 시피 미
워한다. 나의 적개심을 극복 하고져 여러 사람이 쓴 책을 탐독하기도 한
다. 오백년 묵은 원한이지만 원수갚음 만이 능사는 아니라 믿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러다가도 이번 여름처럼 원폭 피해사실만 부각시키고 원폭까지
불러들인 근원을 희석시키는 행위, 더 나아가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나
대는 꼴을 보면, 나는 곧 그 적개심의 원점으로 돌아 앉아 버린다.
문화인류학자‘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을 설명한 그의 저서에 표제를
‘국화와 칼’이라 명명했다. 얼마나 적절하고 단정적인 표현인가? 현재 누
리고 있는 일본의 부(富)는 패전후 그 참람하고도 리얼한 생체실험 기록
200여 건을 선진국에 팔아서 씨앗돈을 만들고, 자기들도 그 전쟁의 책임
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 동난을 속으로 은근히 좋아하며 군수
공장 돌리고, 연합군 병참기지로 이문 챙겨서 비롯된 것이라 나는 판단한
다. 돈 좀 있다고 국제무대에 지도자적 위치를 넘본다. 그러기에 앞서 일
본은 역사 앞에 정직해야 한다. 후손들의 세상을 염려한다면 그 것이 우
선 돼야 한다. 참 용기있는 지도자가 그 일을 할 것이다.
일본의 두 얼굴을 보건대 나와 내 후손들은 우리 역사 바로 알아 자부
심을 가져도 좋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삶이었어도 오 천년 역사다. 519
년 동안 일기(왕조실록)를 써 내려온 선비정신을 우리는 유산 받았다. 가
슴 펴고 국제무대에 당당히 나서도 좋다.
‘731부대’로 한국인 애국청년들을 이송 시키고, 그런 날 밤에 그 담당관
들이 술자리에서 불렀을‘시나노 요르’, 위안부를 명령대로 숫자 채워서
배송하고 임무완수를 자축하며 불렀을‘시나노 요르’가 아닐까? 그날 이
후로 나는 그 노래 두 곡을 버렸다. 내가 정작 버렸어야 할 노래는 파도,
꿈길, 낙엽지면 그런 애달픈 노래가 아니라 정복자의 추억을 말하는 그런
노래였어야 했다.
아! 노래가 하고싶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가을 꽃자리
푸르름이 지쳐 단풍드는데 (서정주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