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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5년 [소설-강호삼]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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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5,880회 작성일 06-01-3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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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춥지? 이거 날씨가 겨울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거 같잖아.
그러게 말이예요. 아직 이르긴 하지만 곧 봄인데 오늘 따라 이렇게 갑
자기 날씨가 쌀쌀해지다니 뭔 조환 줄 모르겠어요.
일행 중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말을 받았다. 하늘이 회색의 낮
은 구름으로 덮여있다. 모두 오리털 점퍼와 털실 목도리, 두꺼운 양말과
가죽장갑 같은 것으로 바람 한 점 스며들 틈 없는 차림새지만 갑자기 옷
속으로 스며드는 한기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일행들은 방금 난방상태
가 좋은 리무진 버스에서 내렸다. 일행 중에는 40대와 50대인 사람도 몇
있지만 대부분은 6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그 중에는 70대와 80대의 거동
이 불편한 사람도 있다.
기온이 영상 12도라는데요.
휴대용 라디오로 일기예보를 듣고 있던 50대의 다른 사내가 귀에서 이
어폰을 빼며 말했다. 사내는 쓰고 있는 방한모의 귀와 볼을 싸는 덮개를
토끼의 귀같이 위로 올리고 묶지 않아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춤을 추듯이
너울거렸다. 모자의 덮개를 내려 턱밑으로 묶으면 영락없는 6.25 당시의
중공군 모습이다.
워메, 뭔 놈의 날씨가 영상 12도라는데 이렇게 춥당가? 거 영하 12도라
는 소리를 잘 못 들어버린 거 아니랑가?
심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옆의 다른 사내가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이예요. 아직 이르긴 하지만 곧 봄인데......
아까의 여자가 에어로빅 동작으로 제자리에서 팔다리를 가볍게 폈다 구
부렸다하면서 다시 사내들의 말에 끼어 들었다.
일행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노인이 혼자, 언덕 위 철조망 위의 북녘 하
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 철조망은 통일전망대의 흰색 콘크리트
건물 앞을 가로질러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남북을
나눈 동서의 길이가 248킬로미터다. 휴전이 되면서 북쪽과 남쪽 사이에 4
킬로미터의 완충지대를 둔 것이 이른 바 군사분계선이다. 철조망 너머로
아득히 북녘의 산하가 펼쳐져 있다. 이곳 전망대에서 보면 망원경으로 보
지 않아도 지척의 모래 해안선을 따라 북쪽의 해금강(海金剛) 일부가 육
안으로도 보인다. 노인의 주름진 옆얼굴에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짙은 외
로움 같은 것이 배어 있다.
보입니까? 저기 저 큰 봉우리가 바로 금강산 비로봉입니다.
전에, 통일전망대 왔던 적이 있는 일행 중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아득
한 북쪽하늘을 가리켰다.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사내가 가리킨 손가락 끝
을 좇아 움직였다. 희색 나지막한 구름 아래로 금강산의 실루엣이 희미하
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비로봉의 정확한 윤곽을 가늠할 수 없다. 정말 날
씨가 좋은 날에는 통일전망대에서도 비로봉(毘盧峰)이 선명하게 보이지
만 오늘은 아니다.
누른 먼지를 일으키며 철조망 넘어 북쪽으로부터 두 대의 버스가 다가
와 양쪽으로 여닫게 되어 있는 철조망 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버스는 80
년대 남한의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볼품없는 구형이다. 남쪽에서는 이미
생산이 중단되었고 운행되던 버스도 폐차장으로 갔다. 서울에서 일행들이
타고 온 대형 리무진 관광버스와 대조적이다. 버스뿐만이 아니라 길도 마
찬가지다. 철조망을 경계로 남쪽이 아스팔트로 잘 포장이 되어있는 반면
북쪽은 붉은 황토먼지가 그대로 풀풀 날리는 옛날의 신작로와 같은 흙길
이다.
버스가 완전히 멈추어 서는 것을 기다렸다가 철조망 문, 북쪽의 양 문
설주에서 철모를 쓰고 M16 소총으로 단독무장을 한 체 보초를 서고 있던
날렵한 국군헌병 두 사람이 세 길이 넘는 철조망 문을 양쪽에서 열었다.
열려진 철조망 문은 4차선 도로 폭 만큼 넓다.
모두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버스에 올라 자신이 저쪽까지 안내할 현대 00의 직
원이라고 소개했던 젊은 안내원이 핸드마이크로 일행들을 불렀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잘생긴 젊은 청년이다. 군인들처럼 짧게 깍은 머리에,
상의는 앞가슴 쪽이 검정 색이고 등판과 소매는 모두 청색인 오리털 점퍼
를 입었다. 하의 역시 검정바지에 발에는 흰색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
었고 멜빵이 달린 휴대용 확성기는 겨드랑이에, 마이크는 오리털 점퍼 윗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꺼내 들었다. 일행들이 안내원 쪽으로 모여 들었다.
이미 대강 아시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
에 있는 이 철조망을 넘으면 군사분계선 지역입니다. 이곳에서부터 2킬로
미터를 가면 북쪽이 관할하는 군사분계선 북쪽지역이 됩니다. 남쪽군사분
계선의 북쪽까지는 우리 측 국군이 안내하게 되지만 북한 측 군사분계선
지역에서는 북한 인민군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
지만 앞으로 만나게 될 인민군이나 저쪽 안내원을 자극하는 말은 일체 삼
가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번 더 아직도 핸드폰을 맡기지
않으셨거나 배율이 10배 이상인 망원경과 24배 이상의 줌 렌즈가 달린 캠
코드와 160밀리 망원경 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를 가지고 계신 분이 없으신
지 확인해 주십시오. 말씀드린 것처럼 만약 모르고 그냥 가지고 가시게 되
면 저쪽 임시출입관리소에서 모두 압수 당하거나 벌금을 물게 됩니다. 그
리고 남쪽에서 발행된 신문이나 잡지 같은 것도 절대로 휴대해서는 안 됩
니다. 의료약품은 비상 구급약품과 평상시 복용하는 치료약품만 휴대가
가능하고 관광지에서 각종쓰레기나 담배꽁초를 버리는 일과 자연물을 훼
손하거나 채취도 안 되고 흡연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가능합니다. 만약 이
를 위반해서 북쪽의 지도원에게 적발되면 달러로 적게는 100불에서 500불
까지 벌금을 물어야 됩니다. 실제로 지난번에 경비를 하고 있는 북쪽 군
인의 사진을 촬영하다가 카메라를 압수 당하고 벌금을 500달러를 물은 뒤
간신히 풀려난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
지 않도록 조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카메라는 괜찮지요?
밍크 반 오버를 입고 입술화장이 유난히 붉은 여자가 손바닥 반 정도의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높이 쳐들어 보였다. 안내원이 힐끗 여자의 카메라
를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예에 예, 그 카메라는 괜찮습니다. 자아, 이제부터 인원 확인을 하고 버
스에 오르겠습니다. 줄을 서 주십시오.
안내원이 여권대신 이곳에서만 통용되는, 사진이 부착된 목에 거는 출
입증을 한 사람, 한 사람 대조 확인하면서 일행들을 대기하고 있는 버스
에 승차시켰다. 두 대의 버스에 사람들이 차례대로 모두 올랐다.
어! 이상한데...
마지막 사람의 출입증을 확인하고 버스에 오르게 한 안내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점검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버스 한대에 40명이 타도록
되어 있는데 한 사람이 더 있는 것 같았다. 안내원은 버스에 올라서 버스
뒤쪽에서부터 손가락으로 집어가며 다시 인원을 확인했다. 틀림없는 40명
임을 다시 확인한 안내원은 마지막으로 중복 점검된 사람을 호명했다.
김성록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예에!
버스의 중간 창가 좌석에 앉은 노인이 무연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버스를 타기 전에 일행들과 떨어져서 혼자 철
조망 너머로 북녘 하늘을 바라보던 노인이다. 얼굴만 보아서는 50대 후반
이거나 많으면 60대 초반쯤으로 보였으나 목에 걸고 있는 임시출입증에는
1938년 생으로 기재되어있다. 38년 생이라면 노인의 나이는 예순 일곱이
고 광복하기 칠 년 전에 출생했으며 열 살 때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1년 후에 6.25 전쟁이 일어나서 5년 간의 비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세대다.
1.4후퇴 때 단신 월남한 노인은 남한에서 4.19 학생혁명과 5.16군사 쿠
데타와, 그 쿠데타의 연장선상에서 정권을 날강도질 한 더럽고 파렴치한
대한민국의 군인 전두환의 광주학살 같은 정치적 상황도 겪었다. 안내원
이 노인이 앉은 좌석으로 다가갔다.
김성록 선생님 맞으시죠?
노인이 표정 없는 덤덤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목에 건 출입증
을 안내원에게 내밀었다. 주름이 별로 없고 희고 맑은 얼굴이었으나 노인
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져 있고 어둡다. 안내원이 노인의 목에
걸린 출입증을 확인하고 노인에게 넘겨주었다.
여기 2호 버스, 인적사항 대조와 인원 체크 끝났습니다. 오버.
안내원이 무전기를 어딘가로 보고하고 송화키를 놓자 시끄러운 전파 음
사이로 상대의 음성이 들려왔다. 잡음으로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전
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무전기 소리에 숙달된 안내원은 용케 그 소리를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알았습니다. 대기하겠습니다. 오버.
다시 송화기의 버튼을 눌러 대답하고 안내원이 승강구 옆의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실례지만 형씨는 고향이 어디십니까?
운전석에서 네 번 체 뒷좌석 통로 쪽에 앉은 노인이 경상도 액센트가
강한 목소리로 창쪽에 앉은 노인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이곳까
지는 각각 다른 버스를 타고 왔다가 버스를 갈아타면서 두 사람이 합석을
하게 되었다. 노인은 서울에서 출발할 때도 지금과 같이 동석한 옆 사람
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노인은 혼자서만 고향에 가는 것처럼 흥분해 있
었고 서울을 출발한지 3시간이나 지난 지금까지 그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지금 살기는 부산에 삽니다만 실제 안태(安胎)고향은 함경남도 북
청(北靑)입니더. 아 그렇습니까? 저는 원산이 고향입니다.
창문 쪽 노인이 얼굴을 돌렸다. 말씨가 정중하고 세련되었다. 백발이 밝
은 은색이다. 노인은 별 다른 내색 없이 북청이 고향이라는 사내를 일별
한 뒤 대답했다. 지금은 퇴직했지만 노인은 전직 고위 관리를 지냈다.
원산이라 카먼 우리가 지금 가는 장전보다 조금 더 위쪽이 아닌감?
그렇습니다. 바로 위쪽입니다. 6.25 전에는 이곳에서 기차로 30분 걸렸
습니다.
대답 끝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묻어 나왔다.
그라믄 언제 남한에 내려 오셨습니까?
1.4후퇴 때 내려 왔습니다.
참말입니껴? 이 녘도 일사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엘 에스 티 타고
부산에 도착했습니더. 참말로 반갑습니더. 그라믄 아직도 원산에 가족이
살고 있겠지비요?
예에, 며칠이면 다시 미군이 원산을 탈환할줄 알고...
우째, 이 녘이랑 똑 같지비? 우리 부모님도 꼭 같은 생각으로 지만 엘
에스 티에 등 떠밀려 올라타지 않았겠음. 그런데 바로 만날끼라 생각했는
데 세월이 이만큼 흘러 버렸습니더. 참말로 반갑습니다. 같은 38따라지를
만나서 말입니더.
노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창 쪽의 노인도 입가에 미소를 띄우면서 내
민 손을 잡았다.
지는 구정웅이라 캅니더. 부산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합니더. 인자 다 소
용없는 일이지만 그 동안 고향 갈라꼬 돈도 좀 모았지비요.
그래요? 저는 이두영이라고 합니다.
원산이 고향이라는 노인은 자신의 직업을 밝히지 않았다. 1.4후퇴 때 단
신 월남해서 고학으로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중앙부
처의 고급공무원으로 있다가 삼 년 전에 정년으로 퇴직했으나 지금은 무
직이다. 하지만 굳이 직함을 대라면 한두 개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떠맡
은 행정학회의 고문직까지 합하면 족히 열 개가 넘지만 노인이 가지고 있
는 명함에는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만 기재되어 있다. 남쪽에서 고위 관리
를 지낸 노인의 남쪽생활도 순탄치 만은 않았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의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자 총칼로 정권을 빼앗고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군사독재로 치 닿는 정권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한 때
공직을 내던지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박정희가 수족처럼 신임했던 김재규의 손에 피살당하면서 사람들은 드
디어 이 땅에도 오랜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주의의 새벽이 올 것으로 생
각했으나 일개 보안사령관 직에 있던 전두환이라는 자가 온 국민의 열망
을 군화발로 무참히 짓이겨 버렸다.
이제 국회의원이 됐지만 당시 대학 일학년 이었던 아들은 그때부터 하
라는 공부는 않고 또래들과 어울려 맑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같은 이론
서적과 김일성의 주체사상 학습을 하면서 데모로 밤낮을 지새웠다. 도망
을 다니다가 잡혀서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두 번이
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노인도 같이 곤욕을 치렀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던 군사독재정권이 끝나자 아들은 민주화 운동의
공을 내세워 국회의원이 되었고 지금은 자신을 감옥에 보냈던 국가보안법
을 폐지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노인은 아들과 생각이 다르다. 남북
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의 존재와 법체계는 당연하고 당연
하다. 다만 그 법이 과거에 정권 연장을 위해 악용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이제 사회의 각종 감시망이 제대로 가동되면서 보안법의
악용을 허용하지 않을 만치 시민사회가 성숙되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것이 아니라 악용 소지가 없도록 보안해서 최초의 법 제정 의도대로 잘
운용하는 일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노인은 개혁을
위해서는 가차 없이 타기해야 할 전형적인 수구꼴통인 셈이다.
노인이 아들과 결정적으로 의절하게 된 것은 아들의 옥중 뒷바라지를
하면서 고통 받던 노인의 아내가 죽은 뒤다. 50대 초반의 한창 살 나이에
심장마비로 갔다. 아들의 옥중 뒷바라지에 자신을 돌볼 틈이 없었던 것이
다. 노인은 아들이 같은 운동권의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것을 계기로 분가
를 시켰고 지금은 아들과 남이나 다름없이 혼자서 살고 있다.
노인의 이번 금강산 관광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1.4후퇴 때 헤어진
원산(元山)의 연만한 부모들이 아직 살아있으리라는 기대를 접은 지 오래
였지만 죽기 전에 자신이 살았던 고향 땅을 마지막으로 한번 밟아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비록 고향인 원산을 가보지는 못한다 해도 좋았다.
금강산이라면 노인이 북쪽에서 인민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해마다 원족
(遠足)을 갔던 곳이기도 했다.
참말로 반갑습니다.
구정웅이라는 부산의 노인은 다시 한번 원산 노인의 손을 꽉 움켜잡았
다.
바로 그들의 뒷자리에 김성록이라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창 밖
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지금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나 심지
어 그가 스스로 신청해서 이루어진 이 여행마저도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1호차라고 종이로 운전석 앞 유리창에 써 붙인 버스가 움직이자 2호 차
도 그 뒤를 따라 천천히 비포장 황토 길로 들어섰다. 단독무장을 한 남쪽
의 장교와 사병이 탄 지프가 선두에서 향도(嚮導)하고 그 지프 바로 뒤에
역시 단독무장을 한 사병을 태운 스리쿼터가, 그 스리쿼터 뒤에 1호 차와
2호 차 순으로 천천히 뒤따랐다.
한 때, 티브이에 페인트 회사가 자사의 페인트 광고를 선전하기 위해 도
미노 현상을 이용해서 제작한 시에프가 방영된 적이 있었다. 같은 크기의
나무 조각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놓았을 때 위에서 보면 아무 그림도
보이지 않지만 시발점에 있는 나무 조각 하나를 넘어트리면 순식간에 푸
른 숲과 아름다운 집과 백조가 노니는 맑은 호수가 나타나는 그림이었다.
시청자들은 그 그림을 보면서 저마다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을 마음속에
그리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런 목가적인 풍경도 남쪽에서 더 이상 이루
지 못하는 꿈이 아니다.
그런데 일행들은 국군이 향도하는 지프차 뒤를 따르면서 북쪽 땅이 가
까워질수록 TV광고 속의 아름다운 풍경의 도미노 현상과는 정 반대로
빠르게 주위가 황량하게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도미노를 이용한 광고는
짧긴 하지만 나무 조각이 넘어져 그림을 완성시켜 가는 시간이 있었으나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일행들이 본 주위의 풍경은 너무나 눈 깜짝할 시간에
바꿔버려서 어리둥절하다 못해 당혹스러웠다. 일행들은 불과 세 시간 전
에 서울을 떠나 경기도와 강원도의 국도로 이곳에 오면서 잎이 지긴 했으
나 떡갈나무 오리나무 낙엽송과 짙푸르게 우거진 소나무로 울창한 남쪽의
산을 보았는데 철조망을 지나 군사분계선 북쪽이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빨간 민둥산을 만난 것이다. 시계를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도 있겠지만 남쪽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선두에서 버스를 선도하던 국군의 지프차가 속력을 줄이면서 길가 쪽으
로 멈추어 서자 관광객을 태운 버스도 일시 멈춰 섰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마악 군사분계선의 남쪽을 지나 군사분계선 중간지
점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곧 군사분계선 북쪽 지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부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곳에서부터는 절대로 북측의 시설물이나
북측사람의 사람의 사진을 촬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관광 중에도 일체
의 쓰레기와 담배꽁초를 버려서 안 되며 출입국 신고와 세관신고 때 저들
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국군을 태운 지프차가 오던 방향으로 차머리를 돌리면서 길옆으로 비켜
서자 버스 두 대만 지프차 옆을 지나 북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프차와 스리쿼터에 탄 남쪽의 군인들이 손을 흔들었다. 정확히 80명 관
광객을 태운 버스가 느린 속도로 천천히, 50여 년 금단의 북쪽 땅을 들어
서고 있었다.
버스가 북쪽 땅을 들어서자 일행들은 맨 먼저, 버스가 지나가는 양쪽 길
가에서부터 30미터쯤 떨어진 지점에 추위에 퍼렇게 얼굴이 얼어 있는 인
민군 병사들을 보았다. 아직 솜털이 가시지도 않은 것 같이 어려 보이는
인민군 병사는 자신의 몸 길이 만한 소련제 낡은 재래식 장총을 메고 바
람이나 비를 가리는 초소도 없는 논이나 밭 가운데서, 아직도 볼을 에는
찬바람을 그대로 받으면서 이쪽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누런 색깔의 방한
외투를 입고 있었으나 파고드는 추위를 막기에는 보온성이 턱없이 낮아
보였다.
그들은 대충 50미터 간격을 두고 양 길가에서 서 있었는데, 북쪽의 군
입대 징집 연령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키가 너무 작고 체격이 너무 왜소
해서 겨우 남쪽의 중학교 2학년생 같은 앳된 모습이었다. 버스가 다시 천
천히 속력을 낮추면서 멈추어 섰다.
이제 곧 북쪽의 검문이 있습니다. 인민군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 검문을
할 때 그들을 똑 바로 쳐다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똑 바
로 바라보는 것을 자신들을 깔보는 것으로 오해 할 수도 있습니다.
안내원의 말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삼열 종대의 30명쯤으로 보이는 인
민군들이 벌겋게, 나무 한 그루 없는 산자락으로 가려진 산모롱이에서 갑
자기 나타났다. 그들은 남쪽의 TV에서 이미 자주 보아온 인민군 특유의,
장난감 병정 같이 앞으로 발을 차듯이 내뻗고 팔을 힘껏 앞뒤로 흔들면서
누런 먼지를 일으키며 행군하여 와서 두 대의 버스 앞에 멈추어 섰다. 그
들 역시 색깔이 누런 군복을 입고 있었고 추위와 영양 상태가 안 좋은 푸
르죽죽하고 깡마른 얼굴이다. 지휘관인 듯 한 자의 구령에 따라, 인민군
병사들이 언제라도 버스를 향해 사격 할 수 있는 <앉아 쏴!> 자세를 취했
다.
군관으로 보이는 자가 둘, 버스 쪽으로 다가왔다. 일행들은 버스 승강구
계단을 성큼 딛고 올라서는 보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큼직한 군홧발을 먼
저 보았다. 1970년대 남쪽의 국군에게 지급되었던 통일화와 같이 바닥은
합성고무였으나 발을 감싸는 것은 가죽이 아닌 천막 천 같은 것이었다. 가
까이서 보는 그들은 길 양쪽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병사들보다 훨씬 키가
크고 나이가 들어 보였으나 역시 까맣게 타고 깡마른 얼굴이었다. 다른 점
이 있다면 표독스럽게 보이는 두 눈이 유달리 번들거린다는 것과 송곳으
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경직되고 차가운 얼굴에 전혀
표정 같은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버스 안을 살피면서 그들은 한 손
을 구 소련제 투박한 권총이 들어있는 허리의 권총집 위에 놓고 있었다.
그러한 자세는 여차 하는 순간에 권총을 뽑아 들 수 있다는 무언의 시위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일행들은 스스로 자원한 여행이었지만 두려움 반
혐오감과 호기심 반반으로 숨을 죽인 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일행 중
에는 6.25 전쟁을 몸소 겪었거나 전쟁에 직접 참전해서 인민군과 직접 싸
운 사람도 있었지만 인민군을 불과 몇 센티 정도의 코앞에서 보기는 처음
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버스에 올라 온 두 사람의 인민군 군관은 섬직 하도록 매섭고 날카로운
눈으로 일행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노려보면서 천천히 버스 뒷자리로
향했다. 그들이 옆을 지날 때 그들이 입은 누른 군복에서 옛날 시골집 삿
자리 방바닥에서 풍기던 메마른 흙냄새 같은 것이 맡아졌고 동시에 바깥
에서 묻혀 들어 온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이윽고 그들이 버스 뒤쪽 좌
석까지 갔다가 돌아 나와 아무 인사도 없이 버스에서 내렸다. 두 인민군
군관이 버스에 올라 검문을 한 시간은 불과 5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
으나 일행들은 두 세 시간이나 되는 것 같이 길게 느껴졌다. 버스 안 여기
저기서 긴장이 풀린 안도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야아! 그누마들 겁 한번 대게 주네.
누군가 억눌린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일행들이 그 제서야 긴장을 풀
고 피식 웃었다.
그 눈 보았는기요? 살기가 줄줄 흐르고 있는 게, 지는 간이 콩알만 해
져서 오줌을 다 쌀뿐 했어예.
50대의 사내가 일부러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호들갑을 떨며 맞장구를
쳤다. 버스에 올랐던 인민군 군관이 버스를 향해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던
인민군들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 다시 겨울의 마른하늘을 새되게 울리는
외마디 비명 같은 구령이 들렸다.
<앉아 쏴> 자세를 취하고 있던 병사들이 발딱 일어났다. 이어진 다음 구
령에, 집총 자세에서, 앞에 총 자세로 동작을 바꾸고 아까 나타날 때처럼
발을 앞으로 차고 팔을 힘껏 내 두르면서 잠시 제자리걸음으로 대열을 맞
춘 뒤 그들이 나타났던 벌겋게 황토 흙이 그대로 드러난 산모롱이 쪽을
향해 행진해 가더니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버스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검문이 끝났습니다. 한 번 더 주의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는 도중에
절대로 사진촬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안내원이 다시 주의를 주었다. 길 아래, 맑은 개울이 흐르고 그 개울 건
너 또 다른 길이 있었다. 지금 버스가 가고 있는 길은 금강산 관광을 위해
서 새로 개설한 도로이고 개울 건너에 보이는 도로는 본디부터 있었던 구
도로인 것 같았다.
버스가 군사분계선 지역을 지나 금강산 자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
까 보았던 민둥산과는 달리 제법 많은 나무숲과 기암괴석이 보이기 시작
했다. 그런데 길에서 잘 보이는 그럴듯한 기암괴석마다 예외 없이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음각된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 글자 한
자의 크기가 가로세로 1미터 이상으로 사람이 도저히 올라 갈 수 없는 깎
아지른 절벽에도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구호를 빼곡히 음각해 놓았다.
온 산이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구호 일색이었다.
위대한 장군!
위대한 영도자!
위대한 영웅!
1960년대에서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남쪽 사회에서도 같은 표어
와 구호가 있었지만 바위에 새기지는 않았다. 버스가 북쪽으로 진행할수
록 눈에 띠는 바위마다 온통 붉은 글씨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라는 가사
를 새겨 놓은 것도 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국
오늘도 자유조선 꽃과 발우에
력력히 비추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노동당 창건기념 1945.10.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개울 건너, 사람의 내왕 없이 텅 비어 있
는 빈 신작로 길로 어깨에 자루를 메고 고개를 숙인 구부정한 자세로 남
자가 하염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를 짐작키
는 어려웠으나 사십대쯤, 언제 머리를 감았는지도 모르는 봉두난발의 머
리에 먼지가 부옇게 앉았다. 뒤로 늘어진 자루에는 한 되 박도 못돼 보이
는 곡식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 곡식이 어쩌면 가족들이 기다리는 오
늘 저녁의 저녁끼니 꺼린지도 모른다.
안내원은 남자가 가는 저 길에는 금강산의 온정리(溫井里)까지 다른 마
을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남자는 오늘 저녁 밤늦게야 가족들이 기다리
는 집에 도착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뒤쪽으로 자전거가 한 대 뒤 따
라 오더니 이내 남자를 추월해서 지나갔다. 자전거가 남자를 추월해서 사
라지고 길이 구부려지면서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원이 자신의 자리
에 앉은 체로 버스에 비치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입출국 관리소까지 아직 20분쯤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 사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북한에서는 인민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
자전거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집집마다 자전거가 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전거가 있는 사람들은 북한 인민들 중에도 잘 사는 사람이거나 마을의
당 간부급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자가용만큼이나 자전거를
아끼고 애용합니다. 그런데 여러 어르신들, 북한에서는 자전거를 타는데도
면허가 있어야 탈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셨지요. 북쪽에서는 자전거도 자
전거 운전면허가 있어야 자전거를 가질 수 있고 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전거 면허 시험도 칩니까?
예에, 당연히 자전거 면허시험을 친다고 합니다.
일행들은 기가 차서 실소했다.
그렇다면 자전거 교통위반도 있다는 말입니까?
예에, 자전거 교통위반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통위반을 한 것처럼
교통위반 딱지도 떼고 3번 이상 위반을 하면 면허정지를 당한다고 합니다.
자전거에도 교통위반 딱지를 떼고 면허정지를 시킨다니 우리나라보다
더 선진국이네요. 버스 뒤쪽에서 누군가 말을 받았다. 버스 안에 있는 사
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있으면 온정리에 있는 출입국 관리소에 도착합니다. 그 곳에는 당
성(黨性)으로 철저히 무장된 사람들이 근무하기 때문에 절대로 말조심 하
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은 철저히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북
한의 특급 비밀요원들입니다. 전에 어떤 분이 술김에 북한을 비방하는 말
을 했다가 일행과 같이 돌아오지 못하고 3일 동안이나 그 쪽의 보위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정부가 비공식적으로 나서
서 사과를 하고 벌금을 만 달러나 내고 풀려나긴 했습니다만 말 한 마디
까딱 잘못 했다간 언제든지 생각지도 못한 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신
문보도에서 보아서 잘 아시겠지만 금강산에서 휴지 한 장을 무심코 버렸
다가 미화 200달러를 벌금으로 물었던 사람도 있었음을 명심해 주시길 바
랍니다.
버스가 겨우 왕복 2차선 폭의 포장되지 않은 좁은 도로로 온정리를 접
어들고 있었다. 그 곳에 추수를 끝낸 을씨년스러운 경지정리 되지 않은 제
법 넓은 희색 들판이 누워 있었고 들 판 저 멀리 역시 희색 슬레이트 지
붕을 한 마을이 보였다. 그 중 몇 집의 굴뚝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여 오
르고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아이들 몇이 축구를 하는지 아니면 자치기를
하는지 뛰어 다녔다.
일행 중에도 60년대 시골에 살았던 사람은 추수가 끝난 논바닥에서 짚
을 새끼줄로 뭉치거나 마을 잔치 집에서 잡은 돼지 오줌보로 편을 갈라
축구를 한 경험이 있다. 그들은 50여 년이나 훨씬 과거로 훌쩍 되돌아가
마치 그들이 어렸던 시절을 담은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버스가 온정리의 온정각(溫井閣)휴게소에 도착했다. 온정각은 현대00에
서 남쪽의 관광객 유치를 위해 북쪽과 계약을 맺고 넓은 주차장과 식당과
북쪽 상품을 팔 수 있는 건물을 신축해 놓았다. 버스는 그곳에 서지 않고
온정각 휴게소를 지나 휴게소에서 10여분거리인 북쪽의 입출국 관리소로
향했다. 그곳에 가서 입국(入國) 수속을 받아야 했다. 그 옆이 바로 장전
(長箭港)항이었다. 넓은 장전항은 항내에 어선 한 척 없이 텅 비였고 바
지선 위에 지은 5층 높이의 금강산 호텔만이 그 곳에 정박해 있었다. 호
텔에서 50여 미터 거리에 스티로폼 판넬로 지은 가건물 한 동이 북한의
출입국 관리소였다. 버스에 내린 일행들이 일렬로 서서 묵묵히 입국(?)수
속 차례를 기다렸다.
이건 뭡내까?
그건.....?
여자가 미처 말을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우물우물하자 북쪽 관리소의
젊은 여직원이 다시 다구처서 물었다. 이번 일행 중에 가장 젊은 40대의
여자였다.
이게 뭡내까? 얼른 대답하기요!
가방의 내용물을 검색하는 북쪽의 댕기머리를 한 젊은 여자는 화장만
조금 하면 미인에 속하는 갸름한 얼굴이다. 갑자기 적의 가득한 얼굴로 표
정이 험악하게 표변하면서 이쪽에서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여자는 비닐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포장 속에서 나온 것은 성인남자 손가
락 굵기 쯤 되는 면으로 된 5센티미터의 막대기 같은 것이었다. 면봉의 한
가운데를 세로로 찢어서 여자는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마약이라도
은닉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여자관광객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더욱 발갛게 붉혔다. 뒤에 줄을 선, 남자들이 무슨 일인
가 하고 여자의 어깨 너머로 힐긋거렸다. 아무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북쪽의 관리소 여직원은 그 면봉의 용도가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게 어데다 쓰는 물건입네까?
이쪽 관광객 여자가 허리를 숙여 북쪽관리소 직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가만히 말했다. 관리소 직원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놀라는 모습
이었으나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애써 태연한 얼굴을 지으며 혼자소
리처럼 중얼거렸다.
남조선 에미나이들은 이런 걸로 쓰는구만.
다행히 금지 품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입국(?) 수속은 순조로
웠다. 그런데 출입국 관리가 거의 끝날 무렵에 다시 생각지 못했던 돌발
사고가 발생했다. 돌발사고는 인원 점검과 관광객 명단을 확인하는 과정
에서 일어났다. 남쪽에서 넘긴 관광객 명단의 인원은 정확하게 모두 80명
이었다. 그런데 북쪽의 출입국 관리소에서 점검한 인원은 모두 81명이라
는 것이다. 이 같은 착오는 몇 시간 전 남쪽 군사분계선에서도 있었다. 도
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반복된 셈이다.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고 이상
한 일이었다. 게다가 남쪽이 아니고 북쪽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시간이 얼
마나 걸린다 해도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었다. 북한 출입국
관리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하면서 갑자기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북한의 특수 요원이기도 한 출입국 관리소 일꾼들은 남조선 관광객을 죄
수처럼 좁은 공간에 몰아넣었다. 4열 종대로 정확하게 줄을 맞추어 서게
한 뒤 관광객의 인적사항과 사진이 첨부된 서류를 가지고 여권대신의 목
에 건 출입증에 붙은 사진을 한 사람씩 정확하게 대조해 나갔다. 이번에
도 착오임이 드러났다.
어이, 시발! 십년감수했네. 좆같이, 내 돈 주고 관광 와가지고 이게 무슨
노무 꼬라지고?
조사를 받고 밖으로 나온 일행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불평을 털어놓았으
나 출입국 관리소에서 불과 3백여 미터에 거리에 있는 바지선 호텔 숙소
로 이동하는 동안, 사람들은 이내 앞으로 하게 될 금강산 관광에 대한 생
각으로 조금 전 살벌했던 뜻밖의 사태와 두려움을 쉽게 잊었다. 일행들은
바지선 호텔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들고 배정된 객실을 찾아서 여행가방을
풀어 놓기 위해 우우- 엘리베이터 쪽으로 몰려갔다.
함경남도 원산(元山)이 고향이라는 노인이 제일 늦게 바지선 호텔에 도
착했다. 노인은 켐코드의 망원렌즈 배율 문제로 북한의 출입국 관리소에
서 지체되었다. 노인은 안내원이 나누어 준 호텔 객실 배치 표를 보고 4층
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두 사람이 한 객실을 사용하도록 배정되어 있
었다. 객실 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열려는 순간 객실 안에서 두 사람이 대
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한 걸음 물러서서 객실번호를 다시 확인했
으나 그 객실은 자신이 배정 받은 객실이 틀림없었다. 일행 중에 친구와
같이 온 사람도 있어서 잠깐 들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노인
은 일부러 헛기침을 했고 문소리를 내며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객실 안에는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먼저 들어와 있
던 노인은 커튼을 걷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돌아보며 겸연쩍은 미소
를 입가에 떠올렸다. 창밖에 장전항이 있었다. 바지선의 호텔이 정박한 곳
은 장전항의 최남단이고 항구 북단의 북동쪽이 고성군 온정읍이다. 온정
읍은 망원경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그 곳에 키 낮은 단층집들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북쪽 사람
들이 망원경과 배율이 높은 캠 코드의 휴대를 금지한 것은 가난하게 사는
자신들의 모습이나 민감한 군사시설물 같은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
문일 것이다. 창문 바로 맞은편에 눈을 희끗희끗 이고 있는 겨울의 개골
산이 엎드려 있었다.
저는 다른 사람이 또 있는 줄 알았습니다.
방안에 먼저 들어와 있던 노인은 다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까 버
스에서 인원 점검을 할 때 이중으로 중복 점검되었던 김성록이라는 노인
이었다. 원산이 고향인 노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리 인사나 하고 지냅시다. 이틀 밤이나 같이 지낼 룸메이트인데, 저
서울에 사는 이두영이라고 합니다.
노인이 다시 겸연쩍은 미소에 조금 수줍어하는 표정을 더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저 김성록이라고 합니다. 저도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우리 서울에 가서도 가끔 만납시다.
이번에도 노인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성록이라는 노인은 청계천
에서 공구 상(工具商)을 하며 돈도 쓸 만큼 벌었고 저축도 하였다. 강남
의 팔십 평 아파트에서 자신의 공구 상을 물러 받아 경영하는 아들 내외
와 함께 아무 부러움 없이 잘살고 있었다. 남쪽에서 결혼한 아내는 단명
해서 일찍 죽었지만 심성이 착한 아들 내외의 효성이 지극했다. 오늘 아
침도 관광버스가 있는 곳까지 아들내외의 배웅을 받았다. 집을 떠날 때 초
등학교 일학년에 다니는 손녀는 그 앙증스러운 입술로 노인의 뺨에 뽀뽀
를 해주면서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했다. 누구보다 노인을 잘 따르고 노
인이 귀여워하는 손녀다. 노인의 아들은 이번 아버지의 금강산 관광으로
한 평생 고향의 부모님을 그리워했던 아버지의 애틋한 심정이 얼마간이나
마 가셔지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향을 다녀 온 후 더 상심을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아서 다짐하듯 노인에게 물었다.
아버지! 그 곳까지 가서 고향 친지도 못 만나시면 더 상심되시지 않겠
어요?
노인은 아들 앞에서 가타부타 내색하지 않았다. 더 상심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남쪽에서 50여 년이나 살았으니 남쪽도 이제 노인의
고향이나 다름없지만 두고 온 고향은 언제나 잊을 수 없다. 연만한 부모
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고 고향산천은 말 할 수 없이 피폐되었다고
는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꼭 한번 보아야만 여생을 미련 없이 보내고 편
히 눈을 감을 것 같았다.
예정과 달리 출입국 수속에 시간을 허비했으므로 예정된 만물상 코스의
관광이 취소되었다. 대신 현대가 개발한 온천장으로 가서 온천욕을 하고
온정각(溫井閣)에서 다섯 시에 이른 저녁을 먹었다. 뷔페식으로 된 저녁
메뉴에 현대가 북쪽에서 직접 재배했다는 유기농 채소가 유난히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일행들은 유기농 채소로 저녁을 먹는 동안 유기농 채소가
아니라 쌀겨라도 좋으니 굶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같은 이 하늘
밑에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다음 날은 삼일포(三日浦) 관광을 나섰다. 날씨가 좀처럼 활짝 개이질
않았다. 눈이나 비가 오지는 않았으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낮고 음산한 먹
구름이 하늘을 뒤 덮고 있었다. 단순히 구름만 끼어 있다면 만물상 관광
이 가능했겠지만 만물상 일대에 아침부터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는 현지
의 보고로 만물상 관광이 취소되었다.
삼일포 가는 도중 버스가 민가(民家)옆으로 지났으나 집 앞쪽을 높은
콘크리트 불록 담장으로 막아 놓아서 집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빛 바
랜 회색 슬레이트 지붕과 처마와 마당의 빨랫줄에 널린 검거나 회색이고
그나마 천이 미어진 옷들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버스가 네 거리를 통과
할 때는 인민군들이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4. 500미터 저쪽
거리에서 후줄근한 모습의 북한 인민들이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일행들이
탄 버스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삼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삼일포 포구 안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포
구 한 가운데 물 위로 드러난 너럭바위에, 북쪽의 인기만화 주인공인 곰
돌이가 낚시를 하고 있다. 그 뒤쪽에는 방금 물 속에 솟구친 고기와 바위
를 기어 오른 거북이 모습도 있다. 만화 속의 동물 때문에 빼어난 경치의
삼일포가 경박스러운 만화의 배경이 된 느낌이다.
삼일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바위에도 예외 없이 붉은 글자가 음
각되어 있었다. 삼일포 정자 바로 밑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자 하나의
크기는 평균 가로 세로 1미터 이상이다.
위대한 김일성동지 만세!
우리나라 사회주의제도 만세!
<불요불굴의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녀사의 사적지>
<1947년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함께 휴식>
일행들은 그들의 인민들로 하여금 이렇게 큰 글자로 바위에 새기도록
한 김일성과 김정일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더구나 이튿날 예정대로 구룡폭포를 관광하던 일행들은 금강문(金
剛門) 도착하기 직전에 큰 바위에 새겨진 인민들의 김일성 수령에 대한
칭송의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김일성이라는 인물은 저런 찬사들까지 자
기 인민들의 마음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
이 숙연해졌다. 그 칭송문은 김일성 수령의 환갑을 축하해서 새겨진 것이
었다.
김일성 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우리 이제 이 행복을 안겨주신
한 평생을 바치시는 어버이 그 사랑 그 품속
오늘의 이 행복 꽃 폈습니다.
하늘땅의 끝까지 따르릅니다.
해와 달이 다하도록 모시렵니다.
수령님의 그 은혜 길이길이 전하며
일편단심 충성을 다하렵니다.
위대한 수령을 우러러
인민들은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수령님 탄생 60돐
삼일포를 다녀 온 저녁은 온정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북쪽 사람
들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일행들을 태운 버스가 식당에 도
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북쪽의 식당종사원들이 머리를 깊숙이 숙여 맞이
했다. 저녁식단은 방부제와 온갖 화학조미료와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수
입품으로 조리한 음식에 길들여져 있던 남쪽 사람들에게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느끼게 했다.
식사가 끝난 후 호텔로 돌아 올 때도 북쪽 식당 종사자들이 모두 나와
서 절을 하고 손을 흔들어 전송했다. 이제 그들도 한정된 공간에서나마 남
조선의 대표적인 부르조아 기업인 현대00을 통해 자본주의를 학습을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일행들은 모두 숙소로 돌아왔으나 저녁 여섯시면 잠을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바지선
호텔 앞 50여 미터 거리에, 금방 하이에나라도 어슬렁거리며 내려 올 것
같은 낮은 민둥산이 가로 막혀 있다. 높이 40미터 정도의 그 민둥산 산마
루 남쪽과 북쪽에 100여 미터 거리를 두고 기관총좌가 설치되어 있고 누
런 군복에 총을 들고 추위에 부들부들 떨면서 인민군 병사들이 호텔을 내
려다보며 감시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그런대로 숙소의 허용된 공간 안에서 낮 동안의 긴장을 풀며
끼리끼리 모여 로비를 서성거리기도 하고 잡담을 하며 특색 있는 북쪽 상
품을 찾아 호텔의 상점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북쪽의 상품이라야 술 몇 종
류와 조악한 수제품과 그림 몇 점이 전부다. 사람들이 한 곳에 몰려 있었
다. 각종 말린 산나물을 포장해서 파는 점포 앞이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석이(石耳)버섯을 사고 있었다. 석이버섯은 여느 우산 모양의 버섯과는
생김새부터가 다르고 땅이나 나무가 아닌 바위에서 이끼처럼 붙어 자라는
특이한 버섯이다. 버섯의 색상은 겉쪽은 검고 바위에 붙은 쪽은 밝은 회
색으로, 잡채를 만들거나 된장찌개를 끓일 때 목이(木耳)버섯처럼 넣어서
조리하면 쫀득쫀득 씹히는 맛과 독특한 향이 입맛을 돋운다. 남쪽에는 사
람의 발길이 아예 닿지 못하는 아주 후미진 곳이거나 아주 높은 산이 아
니면 이제 석이버섯을 찾을 수 없다.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마구 파 헤쳐
지고 산업공해로 산채마저도 온실 재배한 것이 아니면 찾을 수 가 없게
되어버린 지 오래다.
삼일포를 다녀 온 저녁에 공구 상 경력의 노인이 의외로 먼저 입을 열
었다. 하룻밤을 같이 지내면서 친밀감이 생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두 노
인은 온정각 기념품점에서 사온 남북합작의 <한강>이라는 북한산 담배를
피우면서 낮에 삼일포 가는 버스 안에서 잠깐 넘겨다보았던 북한의 여염
집 모습이며 삼일포를 관광한 감상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고향
이야기가 나왔다. 공구 상의 노인이 먼저 원산 출신의 노인에게 고향을 물
었다. 원산이 고향인 노인이 얼른 대답하지 않고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
후-> 내뿜으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다시 한 모금 담배
연기를 빨고 입 밖으로 내 뿜은 뒤 입안에서 오래 굴리고 있던 것을 억지
로 밭아 내 듯 입을 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뎁니다. 원산입니다.
원산이라면......!
그렇습니다. 여기서 기차로 한 시간 이 못되는 거립니다. 그런데도 가
볼 수가 없다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노형은 고향이 어딥니까? 말소리
들으니 남쪽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공구 상 경력의 노인도 대답대신 담배를 거푸 두 번씩이나 뻑뻑 빨더니
짙은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두 노인이 내뿜는 담배연기로 잠깐 동안 방안
이 자욱해졌다.
제 고향은 바로 여기지요.
............?
고성군 온정읍(溫井邑)이 바로 제 고향입니다.
허!
듣고 있던 원산 출신 노인의 입에서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탄
식이 흘러나왔다. 두 노인은 침묵한 체 한 동안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공
구 상 경력의 노인은 금강산 쪽의 온정리와 이웃한 고성군 온정읍 서리
(西里)가 고향이라고 했다.
그 날 밤 두 노인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어렸을 때 보낸 고향 이야기였다. 원산이 고향이라는 노인은 해방 후 소
련장교의 휴양지였던 원산의 해수욕장 명사십리와 원산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00강에서 고기 잡던 일과 스케이트 타던 이야기를 했고, 공구 상
의 노인은 주로, 한의원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약초를 캐려 금강산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금강산 지리는 훤하겠군요.
예에, 금강산 지리에 대해서는 내 손바닥 안같이 환합니다.
내일 가는 곳이 구룡폭포라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내일 일정이 그렇게 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구룡폭포는 제가 고급 중학교 일학년 때 기차를 타고 원족을 한번 왔지
요. 설마 산이야 옛날 그대로겠지요?
삼일포에서 바위에 새겨 놓은 것 보시지 않았습니까. 모르면 몰라도 금
강산은 더 할 겝니다.
두 노인은 밤이 깊을 때까지 이야기를 하느라 자정이 훨씬 넘어서 잠이
들었고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은 뒤 함께 구룡폭포
관광 길에 올랐다.
구룡폭포 관광길은 버스를 타고 이동할 필요도 없이 온정각에서 도보로
출발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옛날에는 큰절이었다는 신계사지 옆을 지나
폭 70여 미터의 개울을 만났다. 겨울이라 수량이 적었으나 맑고 찬 물이,
넓은 개울 가득 크고 작은 흰 바위들이 널브러져 있는 사이로 흐르고 개
울 폭 만큼 시야가 트인 사이로 멀리 천선대와 만물상 쪽이 바라다 보였
다. 개울을 가로 지르는 다리 맞은편 개울가에, 개울 쪽으로 기둥을 세워
난간을 만들고 3층으로 지은 현대식 흰 건물을 지어 놓았다. 옥상에 <목
란관>이라는 큰 현판이 보였다.
구룡폭포로 가는 길은 개울을 옆에 끼고 신계사지와 목란관. 양지대. 삼
록수를 지나 금강문에 이르고 금강문에서 다시 옥류동과 연주담, 비봉폭
포를 지나서 구룡폭포에 이르게 되는데 구룡폭포 조금 못미처서 오른 쪽
으로 길을 꺾으면 상팔담(上八潭)이 나온다.
출발은 모두 같이 했으나 주위의 절경에 몰두된 사람들이나 산행이 익
숙지 못한 사람들은 뒤로 처지고 걸음이 빠른 사람들은 앞서서 일행들이
등산로에 길게 흩어졌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일행 중 상대적으로 젊은 층
이거나 발걸음이 빠른 사람들은 벌써 구룡폭포와 상팔담까지 구경하고 돌
아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제 겨우 목란관 앞의 다리를 지나는 사람도
있다.
원산이 고향이라는 노인은 그 시간,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금강문을 빠져나와 옥류동(玉流洞)과 연주담(聯珠覃)을 지나고 비봉폭포
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온정읍이 고향이라는 노인과는 신계사지를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온정읍이 고향인 노인은 지금쯤 구
룡폭포와 상팔담 구경을 다하고 하산 길에 있을 것 같았다.
비봉폭포는 계곡 건너편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까마득히 높은 절벽이
계곡 맞은편을 가로 막아 있었고 폭포는 그 절벽 위에서부터였다. 3월은
봄이 시작되는 달이긴 하지만 산속은 아직 겨울이었다. 폭포는 위쪽에서
부터 엄청난 크기로 폭포수가 허옇게 얼어붙어서 장관 중에도 장관이었
다. 사람들이 쇠 난간이 만들어진 조망대에 몰려서서 건너편을 폭포를 바
라보며 감탄을 하거나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때였다. <쩡->하는 날카로운 굉음이 계곡 가득히 울리고 이어서
땅 땅 땅.....!
탕 탕 탕.....!
마치 기관총을 소사하는 것 같은 연속음이 수 초간 계속되다가 그쳤다.
다음 순간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했다. 산
이 무너지는 것 같이 지축이 울리면서 비봉폭포의 절벽에 얼어붙은 거대
한 얼음덩어리가 한꺼번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서 일어난 엄청난 자연의 대 경이를 보고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을 지
경이었다. 절벽에 붙어 있던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자체의 무게와 봄기운
을 이기지 못해 우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비봉폭포의 거대한 얼음이 떨어져 내리던 같은 시간, 상팔담을 지나 아
휴소골의 비로봉으로 접어드는 길과 마의태자 묘로 가는 갈래 길 부근에
서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비로봉 산장이 있고 채하봉. 장
군봉. 장군성.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干)의 비로봉 북쪽 밋
밋한 산자락 쪽이었다.
이곳은 전에, 온정읍이 고향인 노인이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산삼을 비
롯해서 희귀한 약초를 캐던 곳이었다. 날이 저물면 부자가 이곳에서 야영
을 하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옛날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울창한 겨울나무사이에, 남쪽을 겨냥한 수 십 문의 거대한 포신이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다. 이른바 장사정포(長射程包)라고 불리는 북쪽
의 주력무기였다. 유사시에 서울을 일시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는 긴 사
정거리를 가진 거대한 포신을 가진 대포다. 따라서 이곳은 지금 북쪽의 가
장 민감한 군사시설 중의 하나다. 최정예의 인민군 병사들이 50미터 간격
으로 초소를 구축한 삼엄한 경비 속에 그들은 상부로부터 누구를 막론하
고 사전에 연락이 없었거나 암구호를 되지 못하고 접근하는 자는 무조건
바로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상팔담 방향의 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인민군 병사는 아무경계나
거리낌도 없이 곧장 이쪽을 향해 숲을 헤치며 오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더러 산짐승이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틀림없이 산짐승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인민군 병사는 반사적
으로 몸을 숨기고 엎드려서 사격자세를 취하고 사내의 거동을 주시했다.
사내와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인민군 병사는, 사내가 자신이
늘 보아오던 북쪽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우선 옷차림부터 달랐다.
금강산이 남쪽사람들에게 개방되면서 혹시 모를 관광객을 위장한 불순
분자를 철저히 경계하라는 상부의 지령이 이미 있었다. 인민군 병사는 사
내가 좀 더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침을 꼴깍 삼킨 뒤 망설임 없이 정 조준
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뚜르르-
비봉폭포의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 내리던 꼭 같은 시각이었다.
인민군 병사는 사내가 앞으로 맥없이 풀썩 고꾸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숲
속에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렸다. 이어 숲 속, 이쪽저쪽에서 총소리에 잔뜩
긴장한 표정의 인민군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구룡폭포를 관광하고 돌아 온 저녁도 일행들은 역시 현대아산의 온정각
에서 청정야채를 중심으로 한 뷔페식의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는 삼삼오오 몰려 앉아 담배를 피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낮에 관광한 구룡
폭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쨌거나 일행들은 자신들이 북한 땅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서울이나 남쪽에서의 일상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화제는 단연 오늘 구룡폭포를 관광하던 중 비봉폭포의 얼음덩어
리가 떨어지던 광경이었다.
내일은 오전 중에, 북쪽이 자랑하는 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한 후 점심을
먹은 뒤 바로 남행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원산이 고향인 노인은 뭔가 선
물로 사 갈 것이 없을까 하고 온정각 선물가게에서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
다가 조금 늦게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온정리가 고향이라
는 노인은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구룡폭포로 같이 출발할
때 말고는 하루 종일 노인을 보지 못한 셈이다.
양치질을 하고 사워를 한 뒤 원산이 고향인 노인은 일찍 잠을 청했다.
한 밤중에 방안이 서늘하고 한기가 느껴져서 저절로 눈이 뜨여졌다. 문이
라도 열린 것일까 생각하고 일어났는데 온정읍이 고향이라는 노인이 등을
보이며 짐을 싸고 있었다. 미리 내일 서울 귀가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늦게 들어오셨군요.
공구 상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짐 싸는 일을 계속했다. 문이 열
린 줄 알았으나 닫혀 있었다. 원산이 고향인 노인은 다시 잠이 들었고 아
침에 눈을 떴을 때 고향이 온정읍인 노인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예정대로 일행들은 북쪽 교예단의 공연을 보고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올
때처럼 출국수속을 받으려 장소를 출국수속 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웬일인지 입국(?) 수속을 할 때 보다 몇 배 더 입출입국장의 분
위기가 삼엄했다. 완전 무장을 한 인민군들이 출입국 관리소 건물을 포위
한 가운데 출국(?)심사가 진행되었고 일행들은 마치 포로 심문을 받고 있
는 기분이었다. 북쪽 사람들은 적개심을 노골화하면서 출입증 사진과 사
람을 면밀하게 두 번, 세 번 대조하는 등 신원확인이 입국 할 때보다 몇
배나 철저했고 소지품들도 빼 놓지 않고 일일이 하나하나 조사했다. 일행
들 모르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 같았다. 입국할 때 두 시간
이면 충분했던 심사가 네 시간이나 걸렸다. 일행들은 극단적인 경우, 남쪽
으로 돌아 갈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모두 얼굴이
굳은 체 긴장을 풀지 못했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휴전 기간동안 납북
되거나 북쪽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철저한 출국 검사에도 불구하고 북쪽 사람들은 일행들에게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히 입국할 때와는 달리 인원착오도 없었다.
살벌한 출국심사가 모두 끝났으나 일행들은 앉을 의자 하나 없는 좁은 대
기실에서 그대로 선 체 한참 동안 더 기다려야 했다. 검사가 끝났지만 그
들은 어딘가에 보고를 하고 지시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일행들은 남쪽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