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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5년 [소설-윤홍렬]逆風은 불어도 江물은 흐른다(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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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9,534회 작성일 06-01-3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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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독한 일본의 강점에서 풀려난, 그래서 해방이라고 일컫는 조선의
사회현상은, 새로운 질서를 찾아헤매느라 아우성이었다.
우선 제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낸 주역이 미국인줄만 알고 있었
던 조선인들의 눈앞에 난데 없이 소련이 끼어들어 미국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조선반도를 반반씩 나누어 깔고 앉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
을 거듭해 보아도 해괴한 현상이었지만 그렇다고 소련를 물리치고 미국군
대만 들어오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38도선, 정확하게는 북위
(北緯)38도선이라고 하던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38선이라는 것이 불쑥
나타나 조선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는다는 것도 지극히 고약한 현상이었
다. 일본세력을 조선 땅에서 몰아낸 주동세력이 미군이 아니라 소련이라
고 하는 것도 어리둥절 할 노릇이었다. 그런 이상한 현상들이 겹쳐지면서
38선이라는 것이 결국은 남조선 북조선으로 갈라놓는 실질적인 국경으로
굳어져 가는 현실에 울분을 느꼈지만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권능이 조선
사람들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삭제해버릴 수 있는 발언권도 능력도 조선
사람들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통분을 느끼면서도 주저앉아 두 주먹으로
땅바닥이나 퍼엉퍼엉 두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른바 강대국가들이라는 소련과 미국의 꿍꿍이속으로 38선 이남에는
미군이 들어 왔고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 왔다.
방송도 안들리고 신문도 없는 무산땅에서는 어쩌다 기상상태가 좋은
날에는 서울방송이 조금씩 들렸다. 서울방송을 이삭줍기식으로 조금씩 듣
는 것이 조선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국변화의 소식이었다. 좀더 구체적
인 소식은 함경북도 자치위원회에 가서 받아오는 공문서를 통하여 밀렸던
궁금증이 조금씩 풀리곤 하는 것이 시국소식의 숨통이었다.
그 소식통에 의하여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 군사정부가 통치한다는 것
이고 그 군정사령관으로는, 북조선에 진주(進駐)한 소련군 제 25군(軍)사
령관 치스챠코프 대장이 겸한다는 것이고 민정사령관에는 로마넨코프 소
장이라는 것이다. 함경북도 민정관에는 역시 소련군 말렌스키 대좌라는
것은 알고 있다.
제일 반가운 소식은 조만식(曺晩植)씨가 평안남도건국준비 위원회를 결
성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서울 방송에서 들은 소식으로 조만식씨가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설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조선땅에서 조선사
람들이 우리의 앞날을 기획하고 설계한다고 하는 것이 든든하였다. 조만식
씨는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추고 있는 분이라는 것을 여선규도 알고 있다.
3.1운동에도 가담하였던 분이고 일본군벌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조선 청년
들을 끌어 갈 요령으로 조선청년지원병제(朝鮮靑年志願兵制)를 시행하였
을 때 이 제도에 강력히 반대하였다가 오랫동안 영어의 몸이 되었으며 해
방되면서 풀려난 분이다. 훌륭한 인격자고 뛰어난 애국자라는 것을 여선규
는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여선규는, 아니 여선규뿐만이 아니라 전 조선
민족이 우러러 존경하는 분이다. 어쩌다가 들리는 서울방송을 통하여 들은
소식이지만 서울에서는 여운형(呂運亨)안재홍(安在鴻)씨 등이 나서서 건
국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만식선생이나 여운형씨
나 다 훌륭한 민족지도자들이시다. 든든한 분들이다. 제발 그 분들이 하시
는 일이 하루 속히 성공하여 그 괴상망칙한“38도선”이라는 것을 없애버
리고 지금까지처럼 자유롭게 남북의 동포들이 오가면서 각개인의 자유의
사대로 섞여 지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간절하다.
그러는 한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 것은 일본의 건재다. 어째서 이럴
수 있나. 세계평화를 위하여…라는…간흉스런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
켰던 일본은 패전을 하였으면서도 그들의 국토는 고스란히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도 갈라짐 없이 이전의 국토와 국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
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부러우며 한편으로는 신(神)의 배려를 되풀이하
여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에서 앞장서서 활동하는 인물들 중에 여운형(呂運亨)안재홍(安在
鴻)씨등을 비롯하여 몇몇 분이라고 들려오고 평양에서는 조만식(曺晩植)
이 앞장 서서 평남건준(平南建準)을 조직하고 통일 조선을 세우느라 부지
런히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이 그나마 조선의 앞날에 희망을
걸게하는 믿음직스러운 소식이다. 그런데 왜 그 북위 38도선이라는 것이
생겼는지 거듭거듭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대상이었다.
우리의 국토가 별로 큰 것도 아니고 3천만명이라는 국민수효도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닌데 왜 땅덩이는 두 동강이 나야하고 민족은 남북으로 나뉘
어야 하는 것인가.
여선규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모여앉아 킬킬거리며 한담을 나누는 자치
대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금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를
안다.
바로 3일전이다. 여선규가 집을 떠나 있은지 20여일간의 시일이 흘렀으
니 집의 일이 무척 궁금하였다. 일요일 토요일의 구분도 없이 날마다 군
청에 나가서 근무하는 처지이니 좀처럼 틈을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지천만에게서 받은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도 완전히
가시지 않아 하루하루 미루어 오다가 그날따라 날씨도 정말 초가을 날씨
답게 활짝 개었고 시원하였다. 그래서 총무과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샛강
골 집엘 갔었다. 아무리 건강을 회복하였다고는 할망정 가쁜숨을 몰아쉬
다시피하는 고개를 세군데나 넘어야하는 20리길이니 아무래도 조심스럽
다면서, 총무과장이 젊은 서기 두 사람을 딸려 주었다. 배명헌과 길창민이
었다. 아닌게 아니라 고개를 넘는 데에는 그 젊은 서기들의 덕을 많이 봤
다. 부모님들은“어련히 할까봐. 몸도 불편할텐데 무엇하러 왔느냐”며 책
망을 하셨지만 그래도 집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나니 마음이 개운하였
다. 어머니가 지어주시는 점심을 먹고 집을 떠났는데 왔던 김에 나루터를
둘러보기로하고 그리로 갔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샛강건너, 만주에서
7~8명의 일본인들이 남부여대하고 다달었다. 만주에서도 일본인들은 모
조리 일정한 곳에 집단수용하여, 탈영하여 민간틈에 숨은 군인은 포로로
잡아가고 나머지는 별도로 수용소에 가둬놓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수용소에 소련군이 수시로 드나들며 여자들을 연행하여 윤간을 한다고 들
었다. 이 사람들은 집단수용소로 가는 것을 피하여 한적한 길로만 더듬어
가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최종 목적지야 일본이겠지만 일본행이 어려
우면 우선 남조선으로라도 가자는 염원으로 왔으리라. 대부분 만주를 벗
어난 일본인들의 노순이 그런 줄로 알고 있는 여선규의 추측으로 그렇다.
그리고 이들은 리운골(麗雲谷)을 거쳐서 오는 길일 것이다. 샛강골에서 리
운골로 가는 길도 외길이지만 만주의 다른 지방에서 리운골로 오는 길도
외가닥이다. 리운골로 이십여리 북쪽까지는 외길이니 말이다. 일본이 망
해서 물러나니 앞으로 여선규네가 리운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도 어려워지
리라. 그러나 이미 심어놓은 벼는 걷어올 예정이다. 아직은 수확기가 조
금 남았으니까 9월말경으로 예정을 하고 있는데 별 지장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우선 이 일본인들에게 펑씨네 안부를 묻고 싶은데 참았다. 오직 불
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이들에게 직접 관계도 없고 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사항을 끄집어내어 이야기를 펼친다는 것은 이 궁지에 몰린사람들을
괴롭히기만하는 부질없는 짓일 것같아서 말을 삼가고 물건너있는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쪽 물가에서 보따리들을 내려놓고 잠깐 쉬더니 남자
들끼리 조금 수근거린다. 조금 후에 뭔가 합의가 된 모양이다. 그중 제일
젊어보이는, 오십세 전후로 보이는 남자가 일어서며 전투모를 벗고 공손
히 여선규 일행을 건너다보며 절을 한다. 그리고 입을 연다.
“보시다시피 우리들은 일본인들입니다. 무산읍을 경유하여 청진부로 갈
려고 합니다. 우선 이 물을 건너야겠는데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치며 그는 또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여선규는 물론이고 배명
헌이나 길창민 서기들도 다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들이다. 건너편의 일본
사람이 한 말을 다 알아들었다. 두 서기들이 여선규를 쳐다보며 처분을 기
다린다. 여선규 일행이 서있는 뱃터 언덕밑 물에는 여선규네 전용인 너벅
선이 있다. 그 너벅선을 이용하고 싶다는 의도인 것같다. 여선규는 이론의
여지없이 도와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조선땅을 짓밟고 조선민족을 노예
처럼 부려먹으며 학대하던 것은 이미 끝났다. 그리고 이들은 평민이다. 개
인적으로 어떤 행패를 부렸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이 뒤바뀌어 오로지 목숨
만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처지다. 도와주어야 한다. 여선규가 고개를 끄
덕이고나서 응답을 한다.
“물론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상앗대가 없군요. 가만있자……”말
끝을 끌면서 여선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뱃터 주변 어딘가에 있어
야할 상앗대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지천만의 잔꾀로 김남철이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는 예측으로 상앗대를 없앴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만들어야 하겠는 데 시간이 걸린다. 이 뱃터의 강물이 별로 깊지 않다는
것을 여선규는 훤하게 알고 있다. 어른들의 가슴패기를 조금 넘는 정도로
깊은 곳이 있지만 그런 부분이 그다지 넓지도 않다. 강의 넓이가 20미터
남짓한 정도이니 깊은 곳의 넓이란 댓자 불과 2~3미터 내외이다.
이 사람들의 심정은 상당히 초조할 것이다. 그야말로 쫓겨가는 처지이
니 상당히 초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상앗대를 찾기가 어려우니
만들어야겠는데 이 주변에는 10여년전에 온통 벌목을 하였고 그때 심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러나 10여년동안에 자란 크기가 초가집 기둥
감정도는 충분할 정도다. 상앗대감으로는 넘친다. 여선규는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워찌그리오. 위원장동지?”길창민이 다급하게 묻는다.
“삿대가 없재이오. 저 사람들으 잽싸게 건네자분데 워찌겠음. 우리들이
배르 당기야겠읍메”
“그라므, 위원장동지느 오솜소리 있습세.” (註. 조용히. 가만히.)
길창민은 여선규의 행동을 제제시키며 자신의 옷을 벗는다. 그리고 배
명헌에게 종용한다.
“우리 함께 저 배르 밉세”
길창민의 권유가 있기전에 벌써 배명헌도 옷을 벗는다. 그런데 여선규
가“어쩌면…”하고 염려했던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는 데에 자못 얼굴이
후끈거렸다. 두 사람 다 아랫도리의 내복이 없다.
근래 시장에서 옷가게나 포목가게가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 여선규가
입고있는 옷은 부지런한 아내의 덕분이다. 집에서 심은 목화로 실을 자아
서 집에 있던 베틀을 조금 변조하여 짠 무명이다. 수목이라는 것이다. 아
랫내복으로는 여름에 입던 쇠코잠방이를 껴입었다. 그런데 저 두 서기들
은 완전한 알몸이다. 일본인 남녀가 지켜보는 데 알몸을 드러내는 것이 수
치스럽기는 하지만 그 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두 서기들은 급한 곳을 손
으로 가리고 물로 뛰어들었다.
낭림산맥 이골 저골에서 몇방울씩 흐르기 시작한 물이 모여 이 샛강까
지 오고 있는 것이고 조금 더 흐르다가 두만강 줄기로 합류하는 것이다.
말복이 지나고도 20여일이 경과한 지금 이 샛강물은 차다. 두 서기들이 물
에 뛰어 들며 기성을 지른다. (앗 차구롭습메). 뭍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여선규도 옷을 서둘러 벗었다. 그러면서 잠깐 생각했다. 쇠코잠뱅
이는 입은채로 강물에 들어갈까를 궁리하다가 젊은 사람들과 행동을 함께
하기로 하고 벗었다.
“위원장동지, 들어오지 맙세”
두 서기들이 간곡하게 말렸지만 여선규는 물에 들어갔다. 예상했던대로
물은 무척 차다. 건너편 뭍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본인들이 자못 감
동하는 기색이다. 벌거벗은 남자들을 보고도 여자들까지 외면을 안한다.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과 진행되는 상황을 그냥 지켜보는데 민망
스러워하는 표정이다. 그 중의 가장 젊은 남자, 50세 초반으로 보이는 남
자, 처음에 이쪽에 말을 건네던 그 남자가 후닥닥 옷을 벗더니 역시 알몸
으로 물에 달려든다.
“앗, 차다”싱글거리며 기성을 지른다. 일본인들을 쳐다보며 싱글거리다
가 물에 잠겼다 솟았다하며 부지런히 두 팔과 가슴팍을 문지른다. 체온을
냉기에 동화시키는 모양이다.
네 남자가 밀고 당기고 하여 너벅선을 건너편에 대었다. 물에 잠긴 남
자들의 부축을 받은 일본인들이 조심스럽게 배에 올랐다. 그리고 네 남자
가 조심스럽게 밀고 당기고하여 전원이 건너왔다. 남자 4명 남장여성이 3
명이다. 두발을 남자들처럼 짧게 깎았고 남성용바지를 입었지만 불룩한
가슴은 숨겨지지를 못하여 여선규 일행이 대뜸 알아볼 수 있을 정도 였다.
뭍에 오른 일본인들은 몇 번씩 거듭되는 인사를 하며 보따리를 챙겨 떠
나려 한다. 우선 바지부터 꿰며 일본인들의 인사에 대응하던 여선규는 무
심결에 서쪽을 보다가 깜짝 놀란다. 그 자리에 있던 동행들도 여선규의 표
정에 불안을 읽으며 일제히 서쪽을 바라본다. 소련군 3명이 내려오고 있
다. 아식보총을 멘 군인 한사람이 노루 한마리를 어깨에 메고 온다. 따발
총을 멘 군인 하나, 아식보총을 멘 또 다른 군인하나 해서 3명인데 그들
은 뱃터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따발총을 멘사람이 앞
에총자세를 취하며 여선규 일행을 경계하면서 다가온다. 여차직하면 방아
쇠를 당길 자세다.
여선규 일행과 약 10미터쯤의 지점까지 오더니 걸음을 멈춘다. 자기들
끼리 웃으며 지꺼리며 이쪽의 일행에게 연신 경계의 눈초리를 번득인다.
어깨의 죽은 노루를 내려놓고 연신 이쪽을 훑어본다. 따발총을 든 군인이
이쪽을 향하여 뭐라고 지꺼린다. 똑같은 억양의 말을 몇차례 되풀이 한다.
여선규는 그가 러시아어 아는 사람 있느냐고 묻는 것 같다고 짐작했다. 길
창민이 여선규에게 묻는다.
“쏘련 말 아는 사람 있느냐고 묻능기 애이요?”
“그런 것 같습메.”여선규가 엉거주춤한 대답을하자 길창민이 웃으며 나
선다.
“쏘비에뜨 니뽀니마임” (註. 쏘비에트 모르오)
거리에서 들은 풍월로 꿰맞춰(쏘련말 모르오)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통
했는지는 모르겠다며 돌아서서 웃으며 혀를 낼름거린다. 여선규는 그들이
어째서 이 후미진곳에 나타났는지를 짐작한다. 고기를 먹기위해 사냥을
하러 왔으리라고 말이다. 지금 저 군복 상의에 둘둘 말아 싸가지고 있는
것은 목침이 아니라 저들의 주식“헐레바리”라는 빵일 것이다. 웬만한 사
람의 이로는 씹을 수도 없을 정도로 딱딱한 빵이다. 저것을 뜯어먹고 개
울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면 그 것이 한때 끼니를 때운 것이다. 그런데 저
들은 노루도 한마리 잡았고 이렇게 호젓한 데서 한 떼의 민간인들을 만났
다는 것, 게다가 여자들까지 끼인 민간인들을, 이렇듯 깊은 산속에서 만났
다는 것은 기가 막힐 정도로 가슴벅찬 횡재일 것이다. 시계도 뺏고 여자
도 즐기고… 저것들로서는 운수 대통한 날일 것이다. 길창민이 한 엉터리
쏘련말이지만 그래도 저사람들의 기대했던바에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리
라. 최소한 자신들과 말이 안 통하는 먹통들이라는 정도로는 양해가 되
었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싱글거리며 노닥거리는 데 따발총을 든 군인이
저들의 자리에서 조금 비켜서더니 우리 일행들이 있는 머리위로 허공을
향해 따발총을 난사한다. ……따르르 따르르…… 난사를 그친다. 우리들은
공포라기보다도 캄캄하게 태양이 사라진 까마득한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눈을 감고 일제히 앉았다. 어쩌면 곧 총알이 자신들에게로 달려들지
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심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던 우리들은 일
제히 쭈그리고 앉았다.
곧 총소리는 멎었다. 망서리다가 여선규는 슬며시 눈을 떴다. 천천히 고
개를 들었다. 그리고 총을 난사하던 군인을 봤다. 그는 장총을 멘 두 군인
들에게 턱을 끄떡한다. 미리 약속된 신호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따발총군
인은 그자리에 서서 우리들쪽으로 총부리를 겨눈 채 사격자세를 취한다.
따꽁총이라는 별명이 붙은 아식보총을 멘 군인들 두사람이 다가온다. 이
제부터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처참하고 추악한 비극이 펼쳐질
모양이다.
해방이후 약 2십여일동안 날마다의 정도가 아니라 하루에도 몇차례씩
쏘련군의 행패에 관하여 안들은 적이 없을 정도다. 노상강도 부녀자 강
간……도대체 소련이라는 나라가 거지나라라는 것을 온 세상에 선전이라
도 하려는 것처럼 소련군은 대낮에 행길에서도 손목시계만 보면 예외 없
이, 거침없이 총을 들이대고 뺏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여기는 심심산골이
다. 한참 나이의 장정들 두사람을 포함하여 일곱 명의 남자들과 세 명의
여자들까지 열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조리 맨주먹
의 민간인들이다. 총부리 앞에 대항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소련군들의 완전한 독무대다. 따발총소리가 또 따르르르 울렸다. 그리
고 그 따발총수가 소리친다. 모두 그를 본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어서라는 손짓을 한다. 모두 부시시 일어섰다. 일본여자들의 얼굴이 더
욱 창백하다. 그 중의 한 여자는 주문을 외운다. 짐작컨대 불교관계의 주
문같다. 또 따발총수가 뭐라고 소리친다. 손을 들라는 시늉을한다. 일동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옴팡눈에 장총을 멘 군인 하나가 소리친다.
5명씩 2열 종대로 서라는 뜻인가보다. 처참한 공동운명에 빠진 우리들은
조선 사람 일본사람 구분 없이 소련군의 총대가 툭툭치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여 두 줄로 섰다. 다시 옴팡눈이 소리친다. 상의를 모두 벗어서 발 앞
에 놓으라는 몸짓과 말을 지껄인다. 모조리 반소매 얇은 내복들을 입었다.
그리고 시계를 찬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여선규는 본래 시계가 없었지만
설령 가졌다 할지라도 이 난리통에 시계를 가지고 다닐 사람이 어디 있겠
는가. 우선은 소련군의 목표가 빗나갔다. 옴팍눈이 저희끼리만 통하는 내
용인듯 소리를 치며 표정이 험악해진다. 시계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데
대한 넋두리 아니면 자신들의 목적이 빗나가게 한 데 대한 분풀이 욕설일
것이다. 옴팡눈이 남장여인들을 대열에서 밀어낸다. 지적받고 대열에서 밀
려나는 여자들이 와락 남편들에게 달려들어 남편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통곡을 한다. 남편들도 아내의 등이 으스러지도록 껴 안으며 눈물을 주루
룩 흘린다. 따르르르륵. 따발총이 한바탕 허공을 향해 난사 되었다. 옴팡눈
이 장총을 거머쥔채로 아내를 껴안고 있는 남편의 턱을 후려 갈긴다. 그
일본인들 중에서 제일 늙은 부부들이다. 그 남편은 짚단 쓰러지듯 땅바닥
에 쓰러졌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보니까 여선규 일행에게 제일 먼저 말
을 걸었던 사람의 아내 일본여자 중에서 제일 곱고 젊다. 남편의 이름은
기요가와 사부로. 아내는 기요가와 미에꼬라는 것을 알았다. 미에꼬가 황
급히 쓰러진 노인에게 달려갔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에사와상, 에사와상)
을 연호하며 에사와 노인을 부축하여 세우려 하는데 옴팡눈이 미에꼬의
머리채를 감아쥐고 벌떡 세운다. 그리고 따발총수에게 무어라고 지껄이니
까 따발총수가 다가와서 미에꼬의 멱살을 잡고 끈다. 미에꼬는 아무런 저
항도 없이 순순이 끌리다가 남편의 옷자락을 와락 잡는다. 남편은 이제 눈
물도 흘리지 않으며 아내의 등을 두드린다. 따발총수가 미에꼬의 손을 나
꿔채며 거칠게 끈다.
(다음호에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