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32호2002년 [수필-이은자] 장애를 감사하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23회 작성일 05-03-24 15:15

본문

장애를 감사하며

지금 여기가 어디냐?
집도의사는 옆에서 수술을 거드는 그의 제자에게 묻고 있었다.
네. 지금 OO지점이라고 봅니다.
맞아 우리는 지금 지하(地下) 4층에 와 있어. 지금까지 아주 정확하게
제 위치로 잘 왔어. 이제 어떻게 한 층 한 층 닫으며 올라가느냐가 매우 중
요하지.
네 선생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구 부딪치는 소리만 부산했다. 지하 4층, 그건
세브란스 병원 이비인후과 수술실의 위치를 말 하는 게 아니다. 지금 수술
하고 있는 환부의 위치를 제자에게 확인시키며,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년 전에 잃은 성대 복원 수술을 받고 있다. 국소마취로 수
술을 하므로 주변 상황이 너무나 세세히 감지되어 괴롭다. 내가 취하고 있
는 자세만 해도 고문이다. 상체 쪽이 약간 높은 침대에 반듯이 눕고 어깨
밑에는 베개 두 배의 두께로 봉을 괴었다. 머리는 사정없이 뒤로 떨어졌
다. 단두대에 머리를 얹은 자세보다 더 힘들 것이다. 입과 코 부분에 걸림
틀을 얹고, 수술 부위만 파인 커버로 얼굴을 덮었다. 숨쉬기가 힘들었고
메스껍고 어지러웠다. 가슴이 결렸다. 이렇게 두 시간은 견뎌내야 한다니

아득했다. 그전에 죽을 것만 같았다. ‘예수님 나 이러고 있어요. 당신의 십
자가는 몇 곱절 더 힘드셨겠지만 지금 나를 보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일 년 전에 나는 갑상선 절개 수술을 받았다. 그 때는 전신마취로 수술
을 했기 때문에 기다리는 가족들은 가슴 조였겠으나 정작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서 모른다. 그 과정에서 나는 목소리를 잃었다. 악성 종양이 식도와
기도 쪽으로 깊이 침윤 해 들어가 있었다.
수술을 하고서도 재발 위험에서 자유로우려면 성대를 관장하는 신경,
근육 등이 함께 제거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집도 의사는 사전에 설명했고
나는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 진단 받는 동안 이미 내목소리는 변해 갔고
숨이 차기 시작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고맙기는 이비인후과 전
문의와 협력 진료를 하고 있음이었다.
갑상선 수술이 잘 되서 퇴원을 하고서도 보름 간격으로 세 차례 동위원
소투여를 받았다. 그 때마다 나는 격리 수용됐다. 반경 2m안에 접근하는
사람은 방사선에 오염되기 때문이다. 특수복을 입은 의료진 말고는 아무
도 내 근처에 다가와선 안 된다. 아들과 며느리가 아무리 내게 살뜰해도
막아야 한다. 앞으로 아기를 가져야하는 젊은이들이라서 막아야한다. 먼
발치에다 내게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을 놓아두고 물러가야 했다. 나는 사
람을 좋아 한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좋은 일 한답시고 남
의 일에 끼어든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젠 나 스스로 사람을 피해야 한다.
적어도 그게 양심이다. 대부분 갑상선 수술한 사람이 목소리가 돌아오는
기간이 느리게는 3개월쯤으로 본다고 한다. 나도 석 달을 기다리는 건 어
렵지 않았다. 하지만 마비된 오른쪽 성대는 깨어날 줄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도와 식도 사이에 있는 센서가 고장 났는지 사래가 자주 들렸
다. 자다가 침이 기도에 들어갔는지 질식할 것 같아 깊은 잠을 못 자는 것
이다. 이비인후과 진찰실에서 내시경 모니터를 보았다. 두 장의 성대막이
있어서 음식을 넘길 때, 소리를 낼 때, 숨 쉴 때에 맞추어 여닫게 돼 있다.
내 오른쪽 막은 마비된 채 버티고 있고 왼쪽 막 혼자서 일을 하자니 창자
를 쥐어짜는 힘을 주어야 겨우 조용한 실내에 옆 사람이 알아듣는 소리가

된다. 나는 몇 마디만 하고서도 지친다. 말 하는 모양도 일그러지는 게 품
위가 없다. 사람의 목소리는 그의 얼굴 생김새가 서로 다르듯이 독특한 음
색이 있다. 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나는
그 얼굴을 잃은 것이다. 실크스카프보다 더 얇을 것 같은 소리 막으로 인
간은 말도 만들고 노래도 만든다. 그 당기는 힘은 바이얼린 줄의 강도와도
같을 것이다.
성악가들은 찰라 적으로 그 강도를 조율하여 청아하고 기가막힌 노래
를 만든다.
최고의 부드러움도 최고의 강함도 변신이 가능케 빚으신 하나님의 솜
씨를 보았다.
벗들은 나를 힘들게 한다 싶어서 전화마저 삼가고 있었다. 모든 일에서
점차 소외됨을 인정해야 함에도 자고새면 매어달리는 기대, 희망을 어찌
하면 좋은가. 내 속의 또 다른 내가 말한다.
너의 하나님께서 이제 네 기도의 말과 찬양의 노래를 원치 않으신다.
너를 낮추고 또 낮추어 엎드려 살라 하신다. 지난날 네가 뱉은 많은 말, 네
가 부른 온갖 노래는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말로서 상처를 준 사람들이 왜 없었겠는가. 슬픔보다 더 깊은
자괴감이 부끄러움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성대를 잃은 것은 결국 언어를
잃은 것이고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불편해 진다는 것이다. 버스 속에서 소
매치기를 당하고 신변에 위험이 닥쳤을 때 소리쳐 도움을 구할 수 없던 날
도, 행선지를 엉뚱한데서 내려주는 택시의 경우도, 성가대의 찬양이 북바
치는 설움이 되는 날도
아! 하나님.
나는 나의 하나님이 내게 향한 또 다른 계획이 있을 것을 믿으며, 사람
들로부터 외로움에 익숙해 갔다. 말은 최대한 간추려서 하고 노래는 휘파
람으로 아니면 하모니카로 하는 연습을 했다.
갑상선 수술결과 일 년이 지나고도 재발조짐이 없다는 데이터를 가지
고 두 분 의사는 성대 보완 수술을 권했다. 벙어리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

잡힌다 싶을 때였고 내 나이도 그렇고 가족들에게 미안도 하고 나는 갈등
했다.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말을 좀 편하게 할 수 있고 볼륨이 크게
될 수 있고 사래 들리는 것 막고…….
내 며느리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체 나는 이렇게 수술을 받고 있다.
집도 의사는 당신의 제자에게 목적지 위치를 확인 받고서 크게 숨을 몰
아쉬었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을 깨고 콧노래를 불렀다.
나는 얼핏 당황했다. 이 상황에서 노래가?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나였다. 그야말로 이 상황에서 영화 쉰들러 리
스트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되어 연상되는 것이다. 독 개스 실에 유태인들을
발가벗겨 들여보내면서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바이얼린 사중주를 듣
게 한 잔인함, 그것도 동족인 유태인 음악가들 손으로 연주하게 하다니.
경쾌하고 휘몰아치는 듯한 장송곡이었지.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
장 추하게 사용하는 법도 함께 알고 있다니. 내가 잠시 초조함에서 다른
상념에 놓임 받을 때 수술은 다음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환자분 이제 좀 힘들겠지만 잘 협력해야 됩니다.’마비된 성대 뿌리를
조금 밀어 붙여놓는 것이 오늘 수술의 목적이다. 내 목에 강한 압박을 주
며 여러 모양의 발성을 주문한다. 피아노 조율하듯 땡겼다 놓았다 하는 것
같았다.
‘어때요 이 소리 만족하세요?
울림이 좋군요 이만하면 될 것 같아요?
조금만 더 고생 하세요 잘 되고 있으니까요.’
선생님은 아까 끊었다 그 콧노래를 또 부른다. 아주 저음으로 느리게.
노래를 멈추고 숨을 몰아쉬면 수술은 다음 단계로 넘어 간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선생님은 가장 긴장된 시간. 정말 중요한 시술을 결행해야 하는
직전에 초조함 앞에 선 자신을 그렇게 달래고 어루만지며 세워나가고 있
는 것이다. 노래는 이런 순간에도 부를 수 있구나.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
장 아름답게 쓰는 길이 여기 있구나.

나는 또 삼 개월을 기다린다.
그리고 감사한다. 겨우 말만 할 수 있다손 쳐도 너무 감사한다. 이런 장
애가 이 나이에 와 준 것도 감사한다. 젊은 나이에 그 많은 역할들을 감당
하게 하셨던 일들을 회상하며 침묵 속에서 찾아지는 또 다른 삶의 방법을
가지고 잃은 것 보다 몇 천배의 더 남은 기능을 감사한다. 장애를 가진 이
웃을 보는 또 다른 눈을 가지게 된다는 것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