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36호2006년 [수필-이은자] 황새동친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355회 작성일 07-02-26 17:23

본문

무심히 지나쳐 버리던 지명(地名)도 그곳에 살가운 사람이 살게 되면 그렇지가 않다. 그 고장 소식이라면 사소한 것까지라도
유념하게 된다.
고성에 산불이 재우쳐 일던 때, 나는 서울에 살고 달려가 돕지는 못하면서도 한 친구를 애타게 염려했었다.
속초여중 동창생 J는 고성에 시집가서 흙에 기대어 살고 있다. 그는 또래 보다 훤칠하게 큰 키에 체력도 월등했다.
50년대 후반 수복지구였던 속초에 신설된 우리 학교는 고등학교가 이사 가고 남겨진 헌 집에 불과했다. 남자 손길이라곤 선생님들
말고는 소사 한 사람뿐인데, 교탁이며 의자, 책상 어느 하나라도 성한 것은 없는 형편이었다. 여자 아이들이건만 한창때라 장난이
심하여 교탁을 쓰러뜨리기 일수요, 의자 망가뜨리기 비일비재였다.
날이면 날마다 소사를 부를 수 만은 없었다. 그런 때 J는 연장을 가져다 제대로 멀쩡하게 맞추어 놓았다.

학교 마당 오른편에 우물이 있었는데 물맛이 좋기로 소문나서 마을 사람들까지 길어 가곤 했다. 일 년이면 두어 차례 그 우물을 쳐야
하는데 그때도 J는 팔 걷어붙이고 들어섰다. 우리들은 모두가 조무래기 같아서 도움이 못되었다.
소사와 둘이서 그 엄청난 일을 다 해냈다.
겉수를 웬만큼 퍼 올리고 밑바닥이 들어날 쯤 되면 바지 가랭이를 정강이까지 걷어올리고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바케츠를 로우프에 매달아
내리면 온갖 잡동사니를 담아서 소리를 지른다. 나무로 뚜껑을 해 덮은 우물인데 어느새 그렇게 많은 허접 쓰레기가 들어갔는지 그런 물을
어찌 먹었는지 진저리를 쳤다.
졸업할 때까지 J는 우리들 140명의 언니고 해결사였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벌어지는 작은 분쟁이 끊일 날 없었지만 J는 때론 지엄한
오라버니처럼 크고 투박한 손을 대서갈라놓았고 화해를 시켰다. 명찰마저도 지금처럼 빳빳한 명찰이 아니라서 금새 후질근해지고 글씨가 풀어졌다.
J는 색종이에 필적 좋은 솜씨로 명찰을 만들어 주곤 했다. 그런 J는 집안 사정 때문이라 하고 자주 결석했었다.
졸업하고 헤어진 뒤 2년쯤 되던 겨울에 나는 J의 전갈을 받고 그가 사는 동네로 갔다. J의 집이 청대리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였다.
청대리에서도 재를 하나 넘어 J는 엄마 동생들과 화전(化田)을 일구어 살고 있었다. 황새동에서 J는 확실한 농군이요 실질적인 가장(家長)이었다.
J네는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산, 논밭 전지가 있었다.
J는 할아버지 서당에서 천자문을 익힌 여식이였다. 중학교 졸업하면 사범학교에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사변통에 어른들이 세상 뜨고 그 누구의
모략으로 가산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앞날의 모든 설계는 물거품이 되고 J는 소녀 가장으로 가솔을 이끌고 황새골로 이주해서 살고 있는 중이었다. J는 지난날들을 처음 내게 털어놓았다.
그의 글씨체며 한문자 지식이며 집안 사정으로 자주 결석하던 것들이 다 이해가 되었다.

J가 나를 부른 사연은 시집가게 됐는데 신랑이 천주교인 까닭에 교리문답에 통과해야 혼배성사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게 그 교리문답 공부를 도우라는 청이다.그의 집에서 하룻밤 자면서 이미 많이 공부해 놓은 문답집을 가지고 나는 질의 상대가 돼 주면 되는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장짐을 챙겨 들고, 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갈림길에서 헤어질 때 J의 눈매는 학교 가는 아우를 대견하게 보며 배웅하는 언니 같았다.

그 겨울이 다 가고 사순절 기간에 J에게서 또 다시 전갈이 왔다. 부활절 지나서 곧 결혼식 한다고.
나는 그의 결혼식 전날 해거름에 황새골에 닿았다. 그는 눈물이 글썽해 가지고 내 손을 덥석 쥐었다. 산골 기후는 손이 시렸다.
가는 도중 뚝방 아래 개천에서 흐르는 물소리며 버들개지가 사월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 날 밤 J는 지난번 내가 왔을 때와는 다르게 무척 침울하고 핼쓱했다.
내가 접어간 선물에 대해서 진정으로 고마워했다.
“너도 남 아이 가정교사 노릇 한다며 옥스퍼드도 아닌 옥양목 올에 십자수을 놓느라 잠은 언제 잤겠냐.”
그 시절 양복 덮개엔 원앙 한 쌍을 수놓는 게 유행이었다.
밤은 고즈넉이 깊어가고 철없는 나는 곤히 자고 J는 온 밤을 나부끼는 것 같았다.
이튿날 J가 시집가는 날, 새벽 같이 들이닥친 상객 두 사람. 윗방에선 신부를 꾸미느라 부산했다. 연지곤지 찍은 얼굴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얼룩지면
또 고치고, 고쳐놓으면 또 울어서 얼룩 지우고...
늘 의연하고 씩씩했던 J가 우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다. 덩치는 컸어도 아이는 아이였다. 겨울이면 학교 뒷산 비탈에 눈 썰매타기로 교복 엉덩이가 속옷까지
젖어들어 수업시간에 엉거주춤 앉았던 친구다.
여름철엔 청개구리 새끼를 잡아다가 평소에 새침뜨기 아이들 필통 속에, 아니면 빈 도시락속에 몰래 넣어두던 개구쟁이였다.
오늘 황새동을 떠나면 고생하는 엄마와 아우들이 어찌 살 것인가. 가슴이 메이는 것이리라. 그의 울음을 아무도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돌아서서 저마다
소매 끝으로 눈가를 부벼대고만 있었다.바닷가 마을보다 늦게 당도하는 아침 햇살을 마주한 가마꾼이 수런거렸다.

J는 가마를 타고 얼마만큼 나오더니 이미 대절해 놓은 택시에 옮겨 탔다.
그렇게 헤어진 뒤론 강산이 세 네 번 바뀌도록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고향에 남아있는 다른 친구들 편에 그의 소식을 들으니, 고성군 학야리 에서 넓은 농토를 부치고 여족하게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고맙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J의 마을에 큰 산불이 났었다.
온 마을이, 산야가 잿더미로 변했다.
4년 전 나는 J의 초대를 받아 고성군 체육관 개관식에 갔었다. J는 산불이 났던 동리의 통장 일을 보고 있었다. 여성 지도자로서 군내에 흩어져 있는 약한 자
그늘진 자들을 돕는 일에도 선두에 서 있었다. 황새골을 일구었던 J는 학야리 벌에서 더욱 활기차게 살고 있다. 한 평생 흙을 만지며 자연의 순리 따라 그 품에
기대에 살고 있다. 그 옛날 우리는 저마다 앞다투어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다. 고향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라고. 모두가 떠나가는 고향을 지키고 건져올린 친구
J를 나는 이렇게 자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