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36호2006년 [수필-이은자] 고모생각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94회 작성일 07-02-26 17:24

본문

아파트 울타리 끝자락에 헌옷 수거함이 우두커니 서 있다. 그 주변에는 언제나 옷가지가 담긴 봉지가 어지러이 널려있다.
헌 옷, 못 입는 옷, 남는 옷을 모으는 곳이니 그런 풍경은 당연하다. 올 봄, 어느 새벽에 나는 또 고모가 생각나 그 옆에서 한참을 서성댔다.
섬섬옥수란 말을 이런데다 써도 되지 않을까? 새하얀 목화솜이 알몸으로 그 곳에서 이슬비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집안에 끌어들이고 싶은 충동과 아서라 하는 현실인식 사이에서 갈등하며 오가기를 여러 차례 했다.
부피로 보아 요 이불 한 채임이 틀림없는데 그 흔한 비닐 자루에나 담아서 내어놓을 일이지….
솜둥치는 연일 하염없이 비를 맞고 있어 마음 쓰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 자리에 그렇게……
누구였을까? 저렇게 새 솜을? 왜 버렸을까? 어느 새댁이? 세상살이 싫어서 마구 내던져 버린 걸까? 저것 보다 더 좋은 이부자리로 바꾼 것일까?
나는 온갖 추측을 다 해 보았다.

그 에미는 딸 시집보내며 저 이부자리를 장만하느라 꽤나 힘들었을지 모른다. 에미의 힘든 사정은 여하간에 딸자식이 시집살이 잘 해내고 고이
살아주기만을 빌었을 것이다. 당신 당대엔 덮어보지도 못한 고급 이불솜을 주어 보내면서 흐믓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저렇게 길에서
비를 맞고 있는 걸까? 기왕지사 버릴 바엔 정하게 싸매어 내놓았더라면 누구라도 가져가 요긴하게 덮으련만.
삼 사일 그렇게 비를 맞고 흙바람에 방치되더니 처음 자태는 간 곳 없고 쓰레기가 되어 청소차에 실려갔다.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고모가 생각난다.
내겐 먼 친척집 고모다. 고모의 아버지는 1.4 후퇴 때 군 징발선 88호 선장이었다. 과년한 여식을 난리통에 북에다 두고 올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선장 권한으로 고모를 선장실에 숨겨서 피난 온 것이다. 휴전이 논의될 즈음 우리 아버지는 15사단 군속(문관)으로 화천에 가 있었고, 고모는 속초에
떨어져 있었다. 작전 중에 고모네 아버지는 사망하였다. 고모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 피난살이 타향살이에 떠밀려 시집을 갔었다.
그리고 신랑을 따라 부산으로 떠나고 말았다. 내가 고모를 찾아가 다시 만난 것은 30년이 지난 후였다. 주소 한 장 들고 찾아간 부산, 물어서 걸어서
찾은 고모집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수정동 산꼭대기 달동네였다.

내가 열 살 되던 해에 시집간 고모라 해도 어릴 적 고향에서는 자주 드나들던 고모의 집이었고, 나를 귀여워해 주시던 터라 친밀한 사이였었다.
하지만 경상도 억양으로 나를 반기는 고모, 그리고 전쟁당시와 별반 다를바 없는 초라한 집은 무척 낯설게 다가왔다. 전쟁 전 고모는 참으로 고상하고
우아했다. 고모네 집은 마을에서 우뚝 솟은 대문에 기와집이었다. 고등학생이던 고모의 세라복이며 뒷채 고모방의 그 비밀스러움과 후원의 꽃밭……
내 기억 속에 고모는 아주 부러운 존재였었다. 그간에 어른들에게서 고모의 평탄치 못한 삶을 얻어듣기는 했어도 이다지일 줄은 몰랐다. 하룻밤 고모 옆에
자면서 고모의 아픈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고아나 진배없는 고모는 잠시 거처하던 집 할머니와 주위 어른들에게 등 떠밀려 시집이라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신랑자리는 그 당시로선 잘 나간다는 사나이였다. 보급선 LST의 윈찌(winch) 기술자였다. 화물 컨테이너를 기중기로 들어 배에 싣고 내리는 일이다. 요새
젊은이들처럼 상대방을 세세히 알아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처지다.
잔치를 앞둔 어느 날 고모는 상대방의 큰 결점을 알게 됐다. 앞날의 불행이 훤히 내다보이는 것이었다. 며칠 밤낮을 제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달래보고 했지만
결론은 한결같았다. 파혼을 결심했다.예단으로 받은 옷감을 되돌려주려고 급히 우리 엄마에게 왔다. 그 때 우리 엄마는 고모의 예단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엄마는 늦을세라 한복 한 벌감 받은 것을 마름질하고 벌써 저고리 한 장을 가위질까지 해 놓은 뒤였다. 잘라 놓은 저고리감 한 장을 어쩌지
못하고 고모는 울면서 그 사람에게 시집가고야 말았다. 그 때 형편으로 고모는 그 저고리 한 장을 변제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리통이라 너 나 할 것 없이
궁핍한 터에 누구에게도 속사정을 말할 수 없었단다.

고모의 예견은 현실로 들어났고, 술과 도박과 여자와 더불어 고모부는 만신창이로 살다 돌아가셨다. 약혼기간 고모가 훔쳐보았던 그 악습의 씨앗이 고모처럼 정숙한
여자 앞에 노출되면서 고모부는 열등감과 악습 사이를 평생 오갔던 것이리라.
미국말로 수행되는 LST 원찌 기술자가 정작 우리 글을 읽고 쓰고 못하는 문맹(文盲)이라면 그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은가? 종전되자 그는 부산 부두에서 퇴출당했다.
세 자녀를 기르려니 고모도 이것 저것 돈벌이에 손 뗄 시간이 없이 살았다. 전쟁 같은 소용돌이 와중에서는 밥을 굶지 않으면 잘 사는 것이지만, 평범한 세상살이에는
정도 이성도 곁들여야 사는 맛 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모는 늘 고독했노라 말했다. 저고리 한 장 때문에 인생 모두를 되돌릴 수 없었던 고모가 생각나는 것은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멀쩡한 물건이 버려져 나딩구는 것을 볼 적마다 나는 죄스럽기 그지없다.

지난날의 궁핍함을 우리는 벌써 잊었다. 그 의리라든가 염체를 지금 우리는 단지 바보짓이라 웃어 넘기려 한다. 어느새 우리는 이다지도 헤프게 살고 말았는가.
사람들은 웰빙, 환경 하면서 구호만 난발한다. 인간의 끝간데 없는 소유욕은 자원을 겁없이 소모하며 쉽사리 함부로 버리고 산다. 옷 수선집과 구두 수선집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벌였던 절제 운동이 궁핍을 극복하려는 길이 었다면 지금 우리는 그런 운동을 함으로써 환경을 지켜내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새로 물건 하나 장만할 때 보다는 쓰던 물건 버릴 때에 더 많이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생생한 물건이 버려진 것을 볼 적마다 나는 그 고모가 생각나서 마음이 쓸쓸하다. 단순히 격세지감이란 말로는 메워지는 않는 쓸쓸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