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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6년 [소설-윤홍렬] 逆風은 불어도 江물은 흐른다. 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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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75회 작성일 07-02-2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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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선규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두주먹을 불끈 쥔채 일본여인 미에꼬를 질질끌고 가는 쏘련
군을 쏘아본다. 그러나 어찌해야겠다는 방안을 궁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인 격분의 충동을 받아서 부르르 떨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양식(良識)이 양식 그
차체로써 받아들여지는 환경이라면 타협이라든가 양해를 구한다든가의 인간적인 교섭의 여
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절대권력을 가진자가 절대 불안에 오들거린다는 말처럼 이 깊은
산속에서 완전무장을 한 놈들이건만 오히려 맨주먹인 민간인들을 더 무서워 한다. 걸핏하면
따발총을 뜨르륵륵 뜨르륵륵 쏴대기만 하며 자신들의 야만적인 행동만을 강행하려는 준비작
업을 허둥거리며 다지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감히 누구도, 어떻게도, 이 험악한, 그리고 야만적인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도저히 나설 수가 없다. 도리가 없다. 그저 “신이어, 도우소서”를 염
원할 뿐이다. 그러나 그 신에게 발원하는 것도 마음속만으로 염원 하는 것 뿐이다. 이자리
에 있는 민간인들, 조선사람 일본사람 합하여 아홉명이 있다. 저쪽 러시아군들은 세명이다.
비율로 봐서는 이쪽의 민간인들이 삼배나 된다. 그러나 전승국군(戰勝國軍)이라는 정신적
위압감을 풍기는 인물들인데다가 모조리 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행동은 방약 무
인지경이지만 조선사람도 일본인들도 그저 보기만 하고 인간적인 격분도 감히 입밖에 내지
는 못하고 사무치는 격분을 가슴속에서 삭이는 도리밖에 없다. 누구 하나 입을 뻥긋하는 사
람은 없다. 처참한 상황에 휘말린 사람이 일본여인이지만 여선규를 비롯한 조선사람들 모두
늑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다시피 하는 일본여인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하기는 마찬
가지였다. 이 자리에 있는 일본인들이야 물론 “미에꼬”의 무사하기를 빌겠지만 조선 사람들
도 완전히 쏘련군인들을 저주 했다.

  총칼만이 절대 권능을 지니고 있는 지금의 현실 앞에서는 신(神)도 어찌할 바의 묘안이 없
는 것인가. 나쁜 무리들을 다음날에 징계 하기로 우선은 기억만을 하여 두는 것인가. 이렇
듯 처참한 만행이 저질러지는 현장인데 아무러한 구제책이 제시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
간행동 모든 분야에 신이 보살피지 아니하는 측면은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 여선규의 신앙
이다. 아니 인간생활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삼라만상의 존재법칙에 신이 간여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믿는 것이 여선규의 우주관이다.

  일본제국이 아세아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해괴 망칙한 명분을 내세워 우리 조선을
비롯하여 아세아 전역을 잔인하게 짓밟은 죄악을 저질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전쟁은 끝
났다. 일본인들의 귀향민들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큰길로 가지를 못하고 백두산 호랑이
가 우글거린다는 장백산맥(長白山脈)기슭까지로 숨어들어야할 정도로 비참해진 상태다.

  개 돼지 같은 동물과 비유될 수 있는 대접을 받아도 반항이고 저항이고를 엄두도 낼 수 없
는 상황에서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동물처럼 질질 끌려 가는 미에꼬의 모습에서, 곤두
박질 쳐진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의 오늘의 위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지금은 전시도 아니다. 전쟁은 완전히 끝난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 있는 일본인들은
군인들도 아니다. 완전한 맨주먹의 민간인들이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총을 팡팡 쏘면서 여
인을 끌고가는 옴팡눈이 저주스럽기만 하다. 그 우악스런 소련군에게 멱살을 움켜잡혀 질질
끌려가면서도 어떤 찰나에 몸을 비틀고 남편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여보. 당신 이성(理性)을 지켜요. 내가 간절히 바라는 거예요. 절대로 흥분하지 말아요”

자신의 생명을 걸고 남편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일본여인의 용기를 봤다. 그러자 옴팡눈이
미에꼬의 입을 힘차게 후려 친다. 그 순간 미에꼬의 남편 기요가와가 달려 갈 듯한 자세로
뭄을 움직이며 중얼거린다.

“이런 개 새께”

여선규가 다급하게 그의 허리를 잡으며, 그러나 조용히 충고 했다.

“무모한짓을 하면 당신의 생명이 위험해요. 당신의 부인이 당부했잖아요. 이성을 지키라고.
흥분하지 말아요”

옆에 있던 에사와 노인도 기요가와의 허리띠를 움켜 쥐며 조용히 속삭인다.

“이 양반 말이 맞아요. 그리고 당신 부인의 당부를 지켜요. 총칼앞에서 맨주먹으로 흥분 한
댓자 그 결과는 비참할 뿐야. 이성을 지켜요”

  기요가와는(어허허허……)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이어 땅에 엎드린
다. 울음소리가 조금 높았다. 미에꼬를 붙잡고 있는 옴팡눈이 이쪽을 살피더니 땅바닥에 쭈
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일본인이 마음에 걸리는지 싱글거리며 따발총수에게 뭐라고 지껄였
다. 그러자 따발총수가 대뜸 이쪽의 머리위를 겨냥하고(따르르르) 따발총을 난사한다. 그 따
발총수가 난사를 멈추면서 옆에 있는 또한사람의 군인에게 뭐라고 지껄인다. 그러면서 따발
총을 앞의 총자세로 금방 쏘아부치기라도 할 것처럼 기요가와를 노려보며 성큼성큼 걸어온
다. 그러자 또하나의 장총수가 역시 앞의 총자세로 서둘러 따발총수를 따라 여선규 일행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다가선다.

  여선규는 또 한차례 한 숨을 쉬었다. 겹치기로 또 한차례 처참한 사태가 벌어질 것임이 예
감되면서 나온 한숨이었다. 이곳에는 여자가 두 명이 더 있는데 두명을 노리고 오는 것이
뻔한 것이다. 그 무장군인들은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다. 일본사람들도 직감하고 있
는 것 같다. 두 여자들이 모두 각자의 남편의 옷 속으로라도 숨으려는 듯이 으스러지게 남
편을 껴안으며 다가서는 쏘련군들을 공포의 시선으로 노려본다.

“하야가와상 각오 하십시다. 절대로 흥분하지 말아요. 나도 각오했어요.”

속삭이듯 말을하고는 긴한숨을 쉰다. 이어 자신의 아내에게 속삭인다.

“스미에 상. 당신도 각오해요. 인생 만사가 전생 또는 이승을 살아오면서 저지른 업(業)에
의해서 빚어지는 거야. 즉 업보(業報)의 윤회지. 우리 일본군들도 전쟁터에서 점령지의 부녀
자들 강탈 많이 했어. 남편이 보거나 말거나, 부모가 보거나 말거나, 마을 사람 들이 보거나
말거나, 그리고 헛간이거나 풀밭이거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개 돼지처럼 야욕을 채웠
어. 비오는 날에 전투가 없기라도 한 날에는 가택 수색을 하지. 숨어 있는 패잔병들을 찾기
위한 작전이라고 명목을 붙이고 나가지만 묵인된 여자 사냥이지. 그렇게 해서 여자를 발견
하면,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으니까, 어쨌든 여자만 있으면 성공이니까. 불필요한 나머지 가
족들은 모조리 밖으로 내 모는데 만약에 비가 오든가 눈이 내리든가 하는 날에는 야외에서
짝짓기가 어려우니까 가족들을 비가 쏟아지든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바깥으로 내몰고 우리
군인들은 방안에서 여자를 범하곤 했었지. 야욕을 채우는 방법도 아주 야만적이었지. 남편
이나 부모 동기, 마을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완전한 알몸으로 벗겨 놓고 우리 군인들도
알몸으로 벗고 여자를 범했던 거야. 때로는, 특히 비오는 날 같은 때가 더욱 그랬는데 며느
리와 시어머니, 또는 어머니와 딸을 한자리에 나란히 뉘어 놓고 합동 강간을 한 적도 있었
지. 지금 우리가 당하는 참변은 말하자면 업보야. 수원수구(誰怨誰咎)하랴 라는 말이 있지.
누구를 탓할 것도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어. 다 우리가 저지른 업의 과보(果報)야. 자업자득
(自業自得)이지. 내 나이가 지금 칠십 이센데, 이 나이를 살아오면서 겪은 사실야. 좋은 일
은 좋은 일대로 나쁜일은 나쁜일대로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원인이 없이는 아무러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아요. 절실하게 깨달은 게 있어.”

  말을 잠깐 멈추고 에가와 노인은 여선규와 하야가아를 보고나서 말을 잇는다. 이유없이 발
생하는 상황은 없다고 덧붙인다. 이제는 소리없이 흐느끼기만 하는 기요가와를 흘깃 훑어보
고는 말을 계속한다. 공포에 질려 안색이 창백해진 여인들은 차마 볼 수 없는 듯, 껴안고
있는 자신의 아내도, 옆의 하야가와의 아내에게도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저 쏘련군들을 저주할 것이 아니라 어떡하든지 목숨을 부지하고 고향에 가는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거야. 그럭해서 두고두고 반성하면서 후세들을 가르쳐야해.”

에가와 노인이 말을 마치는 순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쏘련말의 고함이 날아왔다.

“………?”

  민간인들 일동은 겁에 질려 잔뜩 긴장을 하고, 장총과 따발총을 앞의 총자세로 금방이라도
발사할 자세로 다가오는 쏘련군들을 공포에 질린 시선으로 본다. 따발총을 든 군인이 앞장
을 섰다. 그들은 각기 부부간에 껴안고 있는 부부들 앞에 한사람씩 선다. 그리고 총끝을 좌
우로 휘두르면서 부부간이 떨어지라는 뜻인듯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고함을 지르며
총대를 남편들의 가슴에 들이민다. 남편의 위기를 알아차린듯 여자들이 남편에게서 물어 난
다. 쏘련 군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흐뭇함을 느꼈는지 싱글거리며 서
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여전히 경계태세는 늦추지 않으면서 여인들의 소매를 잡고 머리
를 끄덕이며 저쪽으로 가자는 신호를 한다.



        13

  여선규는 서류의 결제를 하는 사이사이에 어제 샛강말 “배터”에서 있었던 일본인들의 불행
한 참변 현장이 자꾸만 떠오른다. 에사와 노인이 늘어놓던 일본군의 악랄하였던 회고담인
지, 자신의 경험담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여선규가 듣기로는 자신의 경험담이라고 짐작이
되었던 이야기……. 그런데 그 노인이 늘어 놓던 일본군의 만행이 정확하게 자업자득, 인과
업보의 현상으로 그 배터에서 재현되었던 것이다. 에가와 노인의 경험담이 그 자리에서 벌
어질 참담한 비극을 예고라도 하였던 것처럼 꼭 같은 형태의 장면이 연출 되었던 것이다.

  “따발총수”가 총부리를 휘두르면서 내용을 알 수 없는 고함을 버럭버럭 질러대는 공포속에
서 아내를 슬며시 놓아 주던 남편들. 그리고 비틀거리며 쏘련군에게 끌려가며 남편을 뒤돌
아보던 일본인 아내들의 처절한 모습, 먼저 끌려간 미에꼬가 있는 곳에 다달으자 그 군인들
은 “오늘의 노루 사냥 여자사냥등으로 통쾌한 행운을 자축이라도 하는 듯이” 쏘련군인들은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의 희열을 만끽하는 것 같았다.

  부부가 껴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휘드르며 뭐라고 언성을 높여 말을 늘어놓고 이어
그 총부리를 남편의 가슴에 대고 계속해서 알수없는 말을 늘어 놓차 부인들이 기겁을 하며
남편을 밀어내고 물러서며 자신들의 얼굴을 두 손으로 싸쥐고 서서 통곡을 하던 장면들
……. 그러자 따꽁총을 든 군인이 하야가와의 어깨 너머를 겨냥하고 한방을 “탕”하고 쏘던
장면…. 그리고 또 무어라 지꺼거리니까. 모든 것을 체념하였음인지 아니면 에가와 노인의
말처럼 “자업자득”의 철리(哲理)를 수용하는 것인지 각기의 아내를 달래다시피하는 표정으
로 아내의 등을 가볍게 밀며 뒷걸음질을 치던 남편들의 참혹한 표정들…… 통곡과 흐느낌으
로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아내들이 오들오들 떨며 남편이 미는 대로, 그리고 쏘련군이 손목
을 잡고 끄는 대로 겅충겅충 따라가면서 남편에게서 멀어지던 여인들. 그리고 …그리고 에
가와 노인이 말했던대로 장면들…개돼지처럼 야욕을 채웠다…던 바로 그런 장면이 우리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약 2십미터쯤이나 될까 말까한 한 거리를 두고 그 군인들은 여인들을
알몸을  만들었다. 애사와 노인의 부인이 두 손을 싻싹비비며 무슨 내용인가를 애원하는 모
양인데 용납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 부인도 뉩혀졌고…… 일본인 남편들 물론이고 무산군청
직원들 즉 여선규 일행들도 모두 돌아 앉았었지. 그리고 귀도 틀어 막았었지. 차마 인간으
로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장면이 버젓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장면.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
쳐지는 야만적인 행동이었다.  

  이제는… 제발 “당신들의 고향으로 무사히들 가시오. 고향으로 가기가 어렵다면 남조선으로
라도 무사히 가시오. 들리는 말로는 남조선에서는 일본인들을 안전하게 일본으로 보내 준다
던데… 인과 업보든 자업자득이든 어제 치렀던 광란의 시련으로, 당신들의 업보는 모두 소
멸되었을 것이니 제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 이제부터는 다시 악업을 짓지 말고 착하게
살도록 하시오.
  
  여선규는 진심으로 그 일본인들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빌었
다. 하기야 청진항에서도 일본인들을 탈출시키는 밀선업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청진항을 통
하든 부산항을 통하든 “당신들의 무사 귀국을 기원합니다.” 여선규는 어제의 그 일본인들이
제발 무사히 그들의 나라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위원장 동지 안녕하십니까.”

  길병석이 여선규에게 다가서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여선규도 문득 제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고 들어온 길병석을 맞았다. 청진에 있는 함경남도 도청에 가서 사흘동안 “세미나르”를
받고오는 길이다. 여선규는 “세미나르”라는 말이 쏘련말인가보다라고 어림짐작은 하지만 정
확하게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세미나르”에 참석할 직원을 한 사람 보내라는 통지문이
왔을 때 무산군청 직원중 누구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무슨 강연이
있나보다라는 정도로 이해를 했다. 그런데 그 통지문 끝에 꼬리말이 붙은 것이 이상한 분위
기를 풍기는 귀절이었다. 해방전서부터 군청에 근무한 경력이 없는 “애국청년을 가리어 보
낼 것”이라는 부분이 여선규의 마음을 조금 흐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니까 그
지시내용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해방후에, 해방후란댓자 불과 2십일 간 남짓
한 사이지만 2십여명의 신규 채용된 직원들 가운데서 선발된 사람이 길병석 서기였다. 말하
자면 경성에 가서 3년제 중등학원을 다녔다고는 들었지만 확인된 것은 없고 해방되기 직전
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벌목회사에 몇 달 다닌 것이 사회 생활의 전부라니 비교적 일본인 적
인 물이 안들은 사람일 것이다라는 판정을 받았다. 군청내의 몇몇 과장들이 협의하여 그렇
게 결정을 하였다. 청진에 가서 3일 간의 “세미나르”에 참석하고 이제 오는 길인 것이다.  

“날래 옵세. 욕봤재이요?”  

“아이요. 마이 배웠음매”

“그랬음둥? 마이 배웠닥 하는 기능 장그마테(늘)반가븐 이바구 아이 겠음? 그래 마이 배
웠닥 하이 지금 이자리에서 간단히는 설명이 아이 되겠지비. 다시 기회르 만들어 전 직원들
에게 옮기도록하고 아마 여러 면에도 마이 다니며 면민(面民)들에게도 설명으 마이 해야
될끼오. 아이 그렇슴 둥?”        

“그렇씀메. 우서능 이제 위원장 동지가 면민이라능 말으 했재이요”

“그렇소. 그기 잘몽된 말이오?”

여선규는 미심적은 표정이지만 그러나 신기한 기대감으로 웃으며 길병석 서기를 바라 본다.

“어저는 국민이라든가 면민이라든가 하는 말으는 아이쓴닥 합데. ”인민“이락한답데”

말을 마치며 길병석도 싱그레 웃는다. 자신도 인민이라는 칭호가 좀 귀에 거슬린다는 의미
인 것 같다.  

“으응. 인민이라…인민…인민…?”

  여선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던 호칭이니 생소할 수 밖에 없다. 몇번을 되풀이하여 뇌어
보았지만 얼른 트득이 되지 않는다. 세상은… 조선이 독립된다는 것 뿐 아니고 남북이 잘려
진다는 것 그리고 말씨도 생활도 모조리 바뀌는 것인가…하여 청진에 다녀온 길병석의 배워
온 내용이 한층 더 궁금하였다. 당장 자신도 듣고 전 직원들도 알아야할 내용이 길병석의
머릿속에 잔뜩 간직돼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길병석에게는 이따가 일과가 끝나는대로 전직
원들을 상대로 청진에서 배운 것을 공개하라고 일렀다.

“위원장 동지, 이렁거스는 공개락 아이하고, 전달강습이락 한답데”

말을 마치며 길병석은 계속해서 싱글 거린다. 여선규도 싱글거리며 응수한다.

“옳소. 그런달쉬 맞소. 전달강습, 전달강습.  좋소 이따가 일과가 끝나문 길서기가 수고 좀
합세. ”

  길서기를 내보내고 총무과장을 불렀다. 오늘 일과를 마치고 강당에서 전 직원들을 모이게
하였다. 길병석의 전달강습을 받도록 준비하라고 일렀다. 총무과장이 마악 발길을 돌려 나
가려는데 길창만이 황급히 들어 왔다.

“그 악질 형사 지천만이 왔씀매. 위원장동지르 만나잡다고 하는데 워찌겠소”

  여선규는 깜짝놀랐다. 참아 무어라 입을 열지못하고 길창만의 얼굴만을 빤이 바라본다.(살
아 있었구나. 죽었다던 소문이 헛소문이었고나. 그를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숨어 다니다가 어느 산길에서 원한 맺힌 사람에게 맞아죽었다…라는 소문이 파다하
였는 데 사실이 아니었고나. 그런데 백주에…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이 군청엘 들
어 오다니…대담한 행동이다. 왜 왔을까)너무나 뜻밖이다. 여선규 자신을 그렇듯 모질게
두들겨 패고 처남 김남철의 숨은곳을 대라고 그렇게 모질게 패던 것이 불과 엊그젠데 어떻
게 여기엘… 더더욱 그 모진매를 맞은 장본인 여선규를 찾아올 수 있단말인가. 도저히 자신
에게는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처지라고 생각되는데, 이 군청엘 나타나다니… 그리고 여선규
자신을 만나겠다니…진정 놀라운 일이다. 가정도 할 수 없는 뜻밖의 현상이다.  

“어찌겠슴둥?”    

  정신 나간사람처럼 멍하니 자신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는 여선규의 하회가 궁금하여 길창
만이 재촉했다. 길창만의 독촉에 퍼뜩 제정신이 들은 여선규는 조용히 입을 연다.

“혼자 왔습데?”

“오기는 혼자 왔는데 일본 사람드르 잡았닥합데”  

여선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시래?”

“일본사람드르 여러명을 잡아다가 치안대에 넘겼닥합데”

  길창만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한다. 여선규는 대뜸 집히는 것이 있었다. 본래 무산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그다지 많치 않다. 해방되고 며칠동안 치안을 일본경찰이 계속 담당했었다. 그
때 몇 명 있던 일본인들은 빠져나갔다. 그 사람들이 고무산에서 모조리 쏘련군에게 잡혀 청
진의 수용소로 잡혀갔다는 말을 들었다. 다만 어제의 뱃터에서 만났던 일본인들처럼 만주에
서 몰려오는 조선사람들 틈에 끼어, 말하자면 조선 사람으로 가장을 하고 넘어 오는 일본인
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인들이 만주땅에서 대부분 쏘련군의 수용소로
끌려 갔다는 것이고 그래서 조선인들 귀향대열에 끼어 오는 일본인이 별로 없다고 들었다.
어제 샛강골에서 만났던 일본인들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그런데 지천만이 잡았다는 일본사
람들은 어제의 그 사람들, 뱃터에서 만났던 사람들임이 틀림 없다는 판단이었다. 쏘련군들
에게서 그렇듯 처참한 시련을 겪은 사람들인데, 이제는 모든 업이 완전히 벗겨졌고, 그래서
어떡하든지 그들의 고향에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랐는 데,치안대에 넘겨 졌다면 이제 고향에
가기는 상당히 어려워진것이 아닌가. 여선규는 새삼 지천만이 저주스러워졌다.  

“그런디 무시래 일로 나르 만나자 한답데?”              

여선규는 사뭇 격분한 표정이었다.

“일본인드르 잡은 공로르 인정해 달락하는 뜻인것 같습데”

길창만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다.        
여선규는 무심결에 탄식이 나왔다.
“공로르?…허 참…”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