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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6년 [시-신민걸]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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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58회 작성일 07-02-2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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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좀 사는 친척집에서 머슴 살던 아버지는 결혼 후 곧장
황지에 오셨다, 아들을 둘 낳고 기르는 동안, 어깨 위 지게를 벗
는 대신에 삽을 들었고, 묵직한 곡괭이를 들었고, 새로 낸 갱이
무너지지 않게 떠받칠 통나무를 끌고 낮게 엎드린 채로 어두운
땅 속을 기어다녔다, 까만 도시락에 식은 밥과 마른반찬을 우적
우적 씹으면서 함께 먼지도 많이 마셨다, 마스크에 갈아들일 뽀
얀 면 필터는 늘 단칸방 서랍 한 칸 가득 들어차 있었고, 빈 도시
락을 딸랑거리며 집에 오신 아버지는 그나마 눈동자가 하얘서 좋
았다

  매일 드나들던 막장까지 가기 싫어 잠깐 사진사를 하셨다, 아
픈 몸에 얼마 되지 않는 마지막 돈 탈탈 털어 어릴 적 가출로 몇
번 다녀온 서울까지 가서 중고 칼라카메라를 샀고, 금수강산 유
람하는 화창한 날 먼지처럼 반짝이는 많고 많은 사람들을 따라
관광버스를 타셨다,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던 시절이라 사진관을
일찍 차린 동료들과 멀어진 채 아버지는 얼마 가지 못해서 다시
함태광업소로 들어가셨다

  허리를 다쳐 광업소 경비 일을 하기 전까지는 내내 지하로 갑
방, 병방, 을방 하며 내려가셨다, 아들 둘 곯아떨어진 어둔 새벽
이나 늦은 밤, 혹은 학교에서 놀다 돌아온 나른한 오후에 신사택
699호를 나서고 들어오시는 아버지는 늘 곤하셨다, 가끔 석탄을
캐다 나온 화석을 들고 집에 오셔서는 먼지처럼 희끗희끗 웃기도
하셨다, 가끔 힘이 나시면 도랑에서 주워온 멋진 돌을 받칠 좌대
를 깎으셨다, 내 오백 원짜리 조각도세트 옆으로 잘려나간 나무
조각들이 신문지 위에 가득 쌓였다, 사포로 문질러 나온 먼지와
함께

  매달 타오는 32절 학력장들과 매년 받아오는 16절 우등상장
과 개근상장과, 게다가 가끔 태백시 어린이 백일장에 나가 동시
부문 장원 트로피도 타오는 아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 내 입이 너네 둘 공부 가르치고 있구나, 8절
지보다 큰 상장은 보고 좋아하셨지만, 시 쓰는 건 달가워하지 않
으셨다, 커가면서 육사 같은 데에 가서 모 장군처럼 떵떵거리길
바라셨지만, 아들 둘은 자꾸만 바라는 바와 반대로 나약해졌다,
상장들은 액자 속이나 책꽂이에서 색이 바랬고, 끝테가 뭉그러져
먼지가 되었다

  기초 영문법과 낯선 단어, 숙어를 암기하느라 바쁘던 시절, 학
교 E.T.(English Teacher를 부르던 우리 초보식 약자 은어)
께서 가르쳐주신 문제가 있다, 영어 단어 중에 가장 긴 단어는 무
엇일까? 정답은 smiles, s와 s 사이가 1마일이나 되니 이보다
더 긴 단어는 없다고, 이건 바로 넌센스 문제라고, 마일이 어느
정도로 먼 지 감도 오지 않는 우리들은 잘 웃지도 못했다, 해서
오기가 생긴 김에 서점에서 새로 산 최신 프라임 영한사전을 오
래도록 뒤져 정말 제일 긴 단어를 찾아냈다
Pneumonoultramicroscopicsilicovolcanoconiosis,
바로 아버지의 병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