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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2년 [소설-윤홍렬] 逆風은 불어도 江물은 흐른다 (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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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926회 작성일 05-03-2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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逆風은 불어도 江물은 흐른다 (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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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에 찔린 공에서 바람 빠지듯, 소리도 없고 자취도 없이 여 선규의 집
을 빠져나온 김 남철은, 마치 살얼음판을 밟듯 긴장과 공포에 휘감기면서 잡
목숲을 조심스레 헤치며움직이는 데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너벅선 있는 나루
터로 향하고 있었다. 거무스롬한 너벅선이 보이는 위치에 다달으자 김남철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 너벅선이 떠 있는 강줄기, 허연 물줄기가 보이자 문득 경
계심이 몰아친다. 어쩌면…여선규네집엘 덮친 경찰들의 일부가 그 나루터 어
디엔가 숨어서 혹시 그 배를 이용하여 만주땅으로 도망치든지 하는 사람이 있
을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경계심이었다. 우선 앉았다. 그리
고 재빠르게 생각을 가다듬는다. 너벅선을 타고 강을 건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손발이 묶여진 상태에서 경찰
들의 앞에 세워지는 것과 같은 위험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배를 타서
는 안된다). 그럼 어떻게 하나. 집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범바위골 진
씨네 집으로 갈까. 이 일대에 화전민의 집이 대여섯 채 있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각기 그 집과 집들 사이의 거리가 오리도 넘고 어떤 곳은 십리도 넘을
정도로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다는 말은 들은적이 있을 뿐 딱 한번 가본집은
범바위골 진 씨네 집뿐이다. 아름들이 신갈나무숲 그리고 하늘이 안보일 정도
로 우거진 전나무숲을 빠져나가 너덜겅을 한참밟고 지나기도 하고 너레바위

가 온 산을 뒤덮다시피한 비탈을 한참 걷다보면 신기할 정도로 앞이 탁 트였
으먼서도 아늑한 평지가 있다. 그 산 덩어리 자체는 북향을 하고 있는 데도 범
바위라는 큰 바위를 짊어지고 앉은 범바위골은 남향이다. 그 한 쪽 귀통이에
굴피로 지붕을 이은 진 씨네 집이 있는 것을 안다. 벌써 여러해전에 매부 여선
규가 웅담을 가지러 간다기에 마침 비번날이고하여 따라 가본적이 있다. 그래
서 그 집의 위치를 알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 진씨와 여선규가 무산읍 장거리
에서 다모토리를 나누는 기회에 우연히 만나 김남철이 두어번 어울린 적도 있
다. 이래저래 진 씨외는 안면이 익은 처지고 하니까 그 집에만 가면 진 씨도 ,
그 가족들도 정성 것 김남철을 보살펴 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
는 것이 쉽지가 않을 것 같다. 그리로 통하는 길이 외가닥의 오솔길 뿐이다.
도중에 경찰을 만나든지 할말이면 옴짝달싹을 못하고 잡힐 판이다. 경찰이 아
나고 일반 화전민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김남철의 행방이 드러난다. 어딘가 후
미진곳,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집이어야 겠는 데, 그럴만한 곳이 떠 오
르지 않는다.
무산읍에서 태어나 무산장거리에서 성장한 김남철이 자주 다녀 본 벽지는
오직 이 샛강골 뿐이다. 좀더 후미진 골짜기, 일본경찰이 도저히 찾아 올 수
없는 골짜기 그리고 믿고 찾아갈 수 있을만한 그런곳을 머릿속에서 더듬는 데
도 역시 떠 오르는 곳은 봉바위골의 진 씨네 집 뿐이다. 그렇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매부 여선규를 따라서 한번 가 본적이 있었고 무산읍 다모토리집에서
여선규와 어울려 두어 차레 소주를 나눈적이 있었다는 인연이 김남철의 머리
를 자꾸 어루만지고 있는 모양이다. 답답하고 조급한 궁리 끝에 떠오르는 곳
이 만주의 리운골(麗雲鄕) 이었다. 그래…거기라면 지리를 잘 알기 때문에 아
무리 한밤중이라 해도 별로 어려움 없이 갈 수있으라는 자신감도 자신감이지
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수수밭으로 뒤덮인 평야지대다. 가다가 이상한 기척이
라도 느낄라치면 아무데서나 수수밭으로 슬적 들어서면 피신하기가 쉬울 것
이라는 짐작이다. 아까 총소리가 나고는 뚝 그쳤던 부엉이 울음소리가 은은하
게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다. 매부네집의 소동이 끝난 것일까. 밤에는 부엉이
가 울고 낮에는 솔새가 이나무에서 저나무로 푸르륵거리며 재잘거릴 때가 좋

은 때임을 실감한다. 한참씩 뜸을 들였다가 느지막하게 다시 들리곤 하는 부
엉이 울음소리가 믿음직스럽고 반갑다. 어서 가자. 리운골은 평야지대이면서
도 비교적 호젓한 곳이다. 모를 심는다든가 벼를 벤다든가 할 때에 마침 비번
날이고 하면, 하기야 우연히 비번날인 경우보다는 김 남철 자신이 매부댁에
자신의 비번날을 미리 알려 주면 그 날에 맞추어서 리운골 작업날을 정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매년 봄 가을철이면 모심기와 가을 걷이 작업을 하러
몇 차례씩 가곤 했었다. 그 곳 농토, 여선규네 논을 제외한 주변일대는 모조리
밭이다. 지금은 수확철이 가까워진 고량(수수)이 고개를 숙인채 그 넓은 평원
을 가득채우고 있으리라. 그 곳에 있는 단 한 채의 농가, 그리고 주인 펑 씨(
彭씨)와 그의 가족들도 잘 안다. 김남철은 제풀에 만족감을 느끼고 고개를 끄
덕인다. (리운골로 가자). 만주사람들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조선사람들과 마찬가이기 때문에 일본을 미워하는 감정이 우리와 동일하다는
것을 수 없이 겪어서 잘 안다. (그래, 만주로 가자. 공동의 적 일본놈들에게 쫓
기는 나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보살펴 주리라. 펑 씨네를 찾아가자. 리운
골로 가야겠다)
김남철은 주위의 상황에 신경을 쓰며 조용히 일서서다가 문득 짚히는 것이
있어 도로 주저 앉았다. 리운골로 가자면 그 앞에 가로놓인 나루터에 묶여 있
는 너벅선을 타야 하는 데 그 너벅선을 탈 수 있느냐가 문제 였다. 그 너벅선
에, 또는 그 주변에 숨어 있는 경찰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는 경계심이 일렁
거리는 것이다. (그렇다면…어떻게 하여야 할까. 아무래도 피신하기 좋은 곳
은 만주일 것 같은 데. ) 김남철은 다시 생각을 굴렸다. 잠시동안의 궁리 끝에
만주로는 가야겠다고 결정을 지어버렸다. 그리고 호젓한 리운골 보다는 사람
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얼핏 머리에 떠오르
는 곳이 자무스(佳木斯)였다. 자칫하면 소매치기를 피하여 강도를 만나러 가
는 꼴이 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였는 데 지난날 그 귀하디 귀
한 빼갈을 힘들여 구해줬던 고바야가와 히데꼬 (小早川秀子) 에게, 자신의 처
지를 털어 놓고 보호를 부탁하고 시픈 것이다. 히데꼬라면 보호는 못해준다
할지라도 위협적인 괄시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긴다, 망

서릴 시간도 없으려니와 달리 무슨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은 그렇게
방침을 정해놓고 가면서 더 궁리를 해보기로 하였다. 얼음덮인 비탈길을 더듬
어 오르듯 세밀한 경계심과 조심성을 베풀면서 그 자리를 떴다. 매부네 가족
들 소식이 몹시 궁금하다. 아까 총소리가 났던 결과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러
나 지금은 그 총소리에 관련된 앞 뒤 문제를 밝힐 수 있는 방법도 시간도 없
다. 그저 초조하고 궁금할 뿐이다.
이제는 빨리발리 두만강을 건너야겠는 데…그러나, 아무리 급하다고 해서
몇 천리가 넘는 자무스까지를 단숨에 달려서 갈 수는 없다. 아무래도 기차편
을 이용 해야겠다. 그러니 우선은 무산읍엘 가야하는 것 아닌가. 호랑이를 잡
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는 데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서도 일단
은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할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랑이가 외출한 사이를 교묘
하게 피하려면 비상한 수단과 경계심이 엉겨야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심
스럽게 걷는다. 아무래도 무산읍과 샛강골로 통하는 오솔길은 불안하다. 두만
강 가를 타고 나가는 길을 택했다. 어렸을 적에 삘기를 뽑아먹고 싱아도 꺾어
먹느라고 몇 차례 거닐었던 길이기도 하다. 낮에 걸어도 험한 길인 데, 사실
은 길이 아니라 강과 뭍이 서로 맞붙어 있는 경계인 데, 때로는 높고 험한 바
위도 가로놓여 있고 갈대와 억새가 뒤엉겨 앞을 가로 막기도 한다. 이 길로 접
어들면서부터 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땀도 고갈됐는지 흐
르는 양이 많이 줄었다. 갈증이 나면 두만강물을 손으로 떠 올려 마시곤 했기
대문에 갈증으로 인한 고통은 없다.
천리길도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한다더니 바위를 오르고 내리고 굽이진 곳
을 빙 돌고 하면서 걸은 것이 그래도 제법 상당한 거리를 걸은 것 같다. 평화
시대처럼 왼만한 집에 닭이 몇 마리씩 있는 시절이라면 무산읍에서 첫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림직도한 위치고 시각일 것 같은 데 닭울음소리는 고사하고 가
로등불 하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철저한 등화관제가 실천되고 있으니 가로등
불이 있을리 없다. 손목시계는 있지만 바늘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보일까
하여 별빛의 도움을 받으려고 몇 번 팔목을 높이들고 눈을 찌그리며 시계바늘
을 찾으려 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래도 반딧불이가 가끔 가다가 무더기로 날아

다니는 것을 만날적엔 저윽이 반가웠고, 풀밭에서 단잠을 자던 개구리들이 김
남철의 발걸음소리에 놀라 물로 텀벙 텀벙 뛰어드는 소리를 들을적에는 길동
무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하였다. 때로는 무자치가 풀숲에
서 단꿈을 꾸다가 김남철의 발자국소리에 놀란 듯 어느틈엔가 물로 달려 들었
는지 우로 좌로 몸을 휘저으며 물위를 미끄러지듯 달려 강심쪽으로 도망치는
데 희끄므레한 물위에 파문을 남기는 것도 처음보는 광경이었지만 불안한 마
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이 위안도 되었다.
풀숲을 헤치며, 더듬으며 걷는 데 물을 많이 마셔 그런지 땀은 비오듯 흘러
내린다. 두손을 번갈아 얼굴과 목덜미의 땀을 쓱쓱 문대어 털며 걷는데 매부
네 집에서 마셨던 술기운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당한 시장기도
느끼면서도, 넘어지기도하고 넘어진김에 쉬기도 하고 죽지 않은 한 걸어야겠
기에 이를 악물디시피 하고 걷고 또 걸었다.
이제는 먼동이 틀때가 되는 것 같다. 무산읍 주변의 산 등성이들의 테두리
가 희미하게 보인다. 김남철은 다시 격심한 불안을 느끼며 초조해지기 시작한
다. 빨리 가서 창렬동역에서 광석을 싣고 가는 청진행 화물열차를 타야 한다.
전체 10칸을 달고 운행되는 하물열치인데 기관실 바로 뒤에 객차를 한칸 달고
다닌다. 그 열차가 무산역에 삼십초 동안 정차하는 데 05시 17분발이다. 김남
철은 그 열차를 타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시각을 모른다는 것은 귀먹어리가 군중집회에 끼어
들은 것처럼 갑갑하고 답답한 노릇이다. 손목에 시계는 차고 있지만 그 시계
바늘들의 위치를 읽을 수 있는 광선이 없으니 시계는 있으나 마나다. 몇 시
나 되었을까. 무척 갑갑하다. 그리고 매부네 가족들은 지금 어떤 처지에 있을
까. 김남철은 발부리에 채이는 도두룩한 돌을 만나 앉았다. 그리고 이마와 두
볼에 흐르는 땀을 문질러 뿌렸다. 그러면서 하늘을 봤다. 여전히 유리가루를
뿌려놓은 것 처럼 별무리들만 쫙 깔리어 초롱거린다. 마침 백두산 쪽에서 잽
싸게 달려온 유성이 백색 눈섭을 길게 그리며 동쪽으로 날아가다 힘없이 사위
어버린다.
아까부터 담배생각이 간절하였지만 혹시나 담배불이 새지나 안을까하여

참아 왔는 데 더 이상 참기가 어렵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쌈지와 마는
종이를 꺼냈다. 종이라야 헌잡지를 얻어 한 대 말아 피우기에 알맞도록 오려
서 담배쌈지 여벌칸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양권연
한 대를 말았다. 그리고 부시도 꺼내 들고서 망서렸다. 손목 시계바늘의 위치
를 알아보기 어려운 밤이니 비록 불꽃은 없는 부싯불일망정 어쩌면 멀리서도
보일지 모르겠어서 주변을 한 차례 둘러 봤다. 주변을 둘러 보았다고하여 꺼
리는 대상이 보일리는 없지만 어디엔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경찰의 눈초리
가 켕겨서였다. 그러나 부싯불의 광도가 반디불이의 광도만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반디불이의 광도를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싶다. 두리번 거려 보는
데 반딧불이도 잠을 자러 간 것인지 안보인다. 그는 우선 무산읍쪽은 피하려
고 만주를 향하여 고쳐앉았다. 그리고 허리를 굽으려 사타구니에서 부싯불을
살리고 한쪽손으로 무산읍쪽을 가리며 양권연에 불을 붙였다. 담배맛이 이렇
게 달아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구수하고 입안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아진다.
이런 걸 꿀맛이라고 하는 것일까. 모든 근심도 불안도 모조리 사라지는 것 같
다. 담배를 다시 한번 길게 빨아 길게 내뿜었다. 또 다시 한번 불빛이 새지 않
도록 두손으로 담배를 감싸 쥔 상태에서 길게 빨아 길게 내뿜으며 담배맛을
한 껏 즐겼다. 그렇게 한 대를 피우고 나니 머리가 개운해 진 것이 분명한 데
반대로 몸은 좀 무거워진 것 같다.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나른하고 무거운 몸
을 억지로 추스려 일어섰다. 그리고 뒤뚱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날이 밝기전에 무산역 북쪽 끝 개나리 울이 있는 데에 몸을 숨겨야 한다.
아무래도 청진행 첫차가 올려면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일
찌감치 가서 마땅한 곳을 골라 눈을 조금 붙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기차의
기적소리와 달려 오는 굉음에 잠이 깨는 것은 쉬울 것이다. 가족들이 그립다.
그리고 매부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갈대숲이 우거진 물가 또는 논두렁 길을 더듬거리며 피로가 휘감겨 오는
몸을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부엉이도 너무 울어 피곤해진 것일까 그
것의 울움소리가 한산해 진 것 같다. 아무리 어두어도 고향의 산천이다. 무산
읍 앞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위치에 다달았다. 김남철은 무산

읍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었다. 길일 것라고 집작되는 풀숲을 헤치며 걷는 데“
꽥꽥”소리를 지르며 제법 덩치가 큰 새 한 마리가 만주 쪽으로 날아간다. 뒤
미쳐 또 한 마리가 같은 소리를 지르며 같은 방향으로 날아 간다. 김남철은
저으기 놀랐으면서도 데깡오리라는 것은 알았다. 더듬거리면서 조금 걷다가
보니 또 갈증이 심해진다. 그는 갈대숲을 헤치고 강물을 두손으로 떠 올려 갈
증을 풀었다. 조금 생기가 도는 것 같다. 어두운 시야일망정 그래도 논두렁은
보였다. 든든해 보이는 논두렁을 골라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하면서 걸었다. 그
렇게 한참을 걷다 무심결에 보니 큼직한 동산 같은 컴컴한 덩어리가 김남철의
시야를 가로막고 서있다. 무산읍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제부터는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든다. 두만강 물 줄기에 그물을 쳐놓고 고기를 잡
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본업은 농업이지만 짬짬이 틈 나는 대로 고기를 잡
아다가 생활비에 보태 쓰는 뜨내기 어부들이다. 그들은 날이 밝기전에 강에
나와 그물을 뒤져서 밤사이에 걸린 고기들을 걷어다가 무산시민들의 아침 반
찬거리로 판다. 그 뜨내기 어부가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 몇 사람 안되는 어
부들은 김남철이 다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고기를 걷으러 나오다가 김남철
과 마주친다고 하여 김남철을 밀고할 사람들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될 수
있는대로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이 샐 수 있는 가능성은 최대한으
로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골수에 새겨지다시피한 인간의 생활 습관은 처지가 조금 바뀌었다고하여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 김남철은 자신이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김
남철의 손을 잡고 인도 하는 것같다. 침침한 것은 사실이지만 걷는 데는 아무
런 불편이 없다. 저절로 무산역을 향하여 걸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러한 의
도도 없이 김남철은 걸음을 멈추었다. 별빛에 드러나는 희미한 길, 갈림길이
다. 정면으로 뻗힌 길은 무산역 쪽으로 가는 길이지만 우측으로 뻗힌 길은 김
남철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약 이 백미터 쯤 가면 자신의 집이
다. 들르고 싶다. 간절히 들르고 싶다. 자신의 안부가 궁금하여 몸부림을 치다
시피 하다 지쳐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곤히 자고 있을 아내가 불현 듯 불쌍하
고 그립다. 아들도 보고싶다. 우선은 길옆으로 비켜서며 친구인 배상호네 집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이 친구도 2년전에 징용으로 끌려나가 그 일 년후에
죽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남양군도라고 했다. 무산읍 전체에서 지원병과 징병
그리고 징용으로 끌려 나갔다가 죽은 사람이 십여명 이라고 들었다. 김남철은
무심결에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지난날 친구가 있었을 때 여려번 드나들
어 본 적이 있는 쪽대문 안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은 없다.
김남철은 자신을 놓쳤다는 실패감을 보상하기 위하여서라도 경찰들은 이
를 악물고 날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김남철네 집을 무방비상태로 놔
두었을 리가 없다. 필시 김남철의 집 또는 그 집 주변에 숨어 김남철이 나타나
기를 기다리는 경찰들이 있을 것만 같다. 한참동안 별의별 궁리, 용단과 멍서
림, 그리고 아차하는 순간의 실패감 그리고 그 뒤에 몰아닥칠 처절한 불행…
한참동안 그렇게 이런 생각 저런 의견으로 망설이던 김남철, 결국은 긴 한숨
을 쉬며 무산역을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허다못해 귀뚜라
미 우는 소리에도 신경을 쓰며 인기척이 없을까에 신경을 기울이는 처지이니
아무래도 집엘 들른다는 것은 위험한 모험인 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도록 그야말로 고양이 걸음으로 조심조심하면서 걸었다. 한참동안의 시간
이 시간이 지나서야 무산역 북쪽 지점에 이르렀다. 주변을 다시 살피고나서
허리를 수그리고 재빠르게 개나리 울로 기어 들었다. 그리고 개나리 나무 한
무더기와 한무더기 사이로 끼어들었다. 한 줄로 서 있는 개나리들은 옆나무들
과 가지가 엇 물려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어두울 때엔 은신하기 좋은 공간이 군
데 군데 있다. 이 무산역 구내에 개나리 울이 있다는 것이 아주 다행스럽게 여
겨진다. 그러나 무산의 팔월 중순은 기온이 많이 내려간다. 더욱이 밤엔 선선
한 정도가 아니라 냉냉하다. 아까 걸을 때에는 온몸에 땀이 흘렀었는 데 이제
움직이지를 않고 가만이 앉았으니 금방 등허리의 땀이 식으면서 척척해진다.
민간인들 생활에 관계 되는 물자는 모조리 동이 난 시절이니 김남철이 깔
고 앉을만한 종이 조가리 하나 구할 수는 없다. 그냥 땅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그러면서 심한 갈증과 피로를 느낀다. 우물이 있는 곳이야 잘 알지만 그것이
역 청사 바로 앞에 있는 데다가 깊은 두레박 우물이다. 그 두레박 줄이 쇠고리
줄인데다가 도르래에 감겨 오르 내리게 된 구조다. 두레박을 올리든가 내리든

가 할 때에 도르래에서 또는 두레박 줄에서 금속 마찰음이 날카롭게 삐그덕거
린다. 이래 저래 접근하기가 어려운 우물이다.
어쩌면 전철수 ( 輾轍手)인 배상근이 숙직을 할른지도 모른다. 이 무산역
에는 전철수가 둘밖에 없다. 주야 교대로 근무하기 때문에 그들은 숙직을 자
주한다는 것을 김남철은 알고 있다. 배상근은 김남철의 기갈을 해결하는 데에
틀림없이 도와줄 친구다. (찾아가 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은 경찰
에게 쫓기는 몸인데 만일에 배상근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친
구도 극단적인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참자. 내힘으로 해결하자라고
의지를 굳혔다. 그런데 갈증뿐만이 아니고 시장기도 느낀다. 갈증을 풀 겸 시
장기도 달랠 겸 아무래도 물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 찰라 그 우물의 두레박줄이 삼줄로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두레박질을 하는 데는 소리가 안 난다고 깨닫는 순간 빙그레 웃음이 번졌다.
오래인 동안의 전쟁에 시달려 온 일본이 필요한 전쟁물자의 격심한 결핍현
상에 부닥쳤다. 특히 유류와 금속류의 절대부족현상에 시달리게 되자 민간 사
회에 흩어져 있는 고철을 깡그리 걷어 가는 것은 물론 건축물을 버티고 있는
조그마한 쇠붙이까지도 뽑아가다시피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각
급학교와 예배당의 종은 물론이고 농촌마다에 간직하고 있던 농악기들까지도
샅샅이 훑어갔다. 그런 상황인데 두레박 주변에 붙은 쇠붙이라고하여 온전하
게 있을리 없다. 무산역의 두레박우물의 도르래 그리고 두레박줄도 모조리 공
출 되었다. 그리고 나무갈고리와 삼바로 바뀌었다. 두레박질을 하드라도 소리
가 별로 안난다는 사실을 깨닫자 김남철은 무심결에 무릎을 탁 치며 슬며시
일어났다. 간단하게 기갈을 해결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기쁨이었다. 그러
나 경찰의 추적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이 무산역 구내라고 하여 완전한 자
유행동이 보장 되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조심하는 걸음 걸이로 우물가에 갔
다. 우선은 주변의 동정를 살폈다. 그리고나서 조심스럽게 두레박줄을 잡았
다. 역시 필리핀에서 가져왔다는 마닐라 로프다. 두레박은 우물속에 내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올리기만하면 된다. 조심스럽게 두레박줄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두레박이 많이 깨졌나보다. 올라오면서 다시 쏟아지는 물소리가 암소

가 싸는 오줌소리처럼 요란하다. 한밤중의 정적을 깨고 요란하게 번지는 물쏟
아지는 소리에 김남철은 움찔하면서 올리는 것을 멈췄다. 그러나 길어올리는
동작을 멈췄다고 깨진두레박에서 새는 물도 동작을 멈추는 것은 아니니 물쏟
아지는 소리는 여전하다. 그러나 물은 먹어야겠다. 차라리 두레박을 빨리 올
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서둘러 두레박을 끌어 올렸다. 두래박이 높이 올라올
수록 물쏟아지는 소리는 더욱 요란해진다. 김남철은 가뜩이나 불안한데 물쏟
아지는 소리는 짜증스럽지만 할 수 없다. 기왕에 벌여놓은 일인데…. 황급히
두레박을 올렸다. 그래도 올라오면서 새고 남은 물이 김남철의 기갈을 축이고
도 남을 정도였다. 황소 뜨물마시 듯 벌컥벌컥 맛있고 달게 마신 것은 사실이
지만 여전히 새는 물은 김남철의 앞가슴을 흠뻑 적시었다. 싫컷 마시었다. 그
야말로 배가 불룩하도록 마셨다. 남은 물을 오른소바닥에 받아 얼굴을 문지르
다가 자지러질 듯이 놀랬다.
“………?”
도망을 가야겠는 데 뛸 수가 없다.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 상대방도 움직
이지 않는다. 순간‘경찰은 아닌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물의 아가리
둘레는 양회토관이다. 높이는 배꼽노리 정도인 데 직경은 일미터 반 쯤 될것
이다. 뛴다한들 상대방과 거리가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닌 데다가 상대방을 완
전히 따돌릴 정도로 재빠르게 뛴다는 자신도 없다. 꽉막힌 것 같은 가슴을 펴
며 한숨을 쉬었다. 두레박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런 동작을 지긋이보고 있
던 상대방이 나직히 묻는다.
“뉘깁메?”
“………?”음성이 귀에 익은 것 같다.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큰나무 가
지에 얹인 것 같은 구원감을 느낀 김남철은 그에게 다가서며 나직히 응답했
다.
“니 시게 야마 아이니 ?”
“맞다. 가네야마 아임 ?”배상근도 와락 달려들며 김남철의 손울 억세게 잡
는다.
그들은 두 손을 잡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어느쪽에서 먼저랄 것도 없

이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거칠게 껴 안았다. 그리고 가슴이 으스러질 듯이 힘
을 모두어 상대를 껴안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을 못하였다. 무산역에 근무하
는 배상근과, 청진과 만주 자무스 사이를 왕래하는 김남철은 삼사일에 한 찰
례씩은 만날 수 있었다. 무산 초등학교를 함께다닌 동창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한마을에서 태어났고 이웃간에서 함께 자라난, 그야말로 죽마고우다.
한참동안 말도 못하고 김남철을 껴안고 있던 배상근이 김남철을 껴안은 채 속
삭이듯 말을 한다.
“궈래 올주르 알고 기두렸읍매”배상근이 초조하게 기다렸던 심정을 밝히
면서 이제라도 이렇게 무사히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고
숙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소식 알았슴둥 ?”
“알았지비. 어제 밤에 느그 안깐느가 우리집에 왔닥합데. 느그 매부 겡찰서
에 잡혀 왔닥합데. 지천만의 개갈라한테 모지르 맞았닥합데. 궈래는 매부집에
서 잽싸게 뛰막질쳤닥하든데 워찌된기둥?”
김남철은 배상근의 몸에서 팔을 풀고 어디 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
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머리도 좀 띵하고 가벼운 피로도 느끼면서 앉고 싶
어졌다.
배상근은 자신의 숙직실로 들어가자고 하였지만 김남철이 자신의 개나리
울로 가자고하여 그들은 그리로 자리를 옮겼다. 화차안에서 기관수 오까야마
의 목을 조른 이야기 그리고 그오까야마가 고발을 하여 경찰의 추적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엊저녁에 매부네 집에서 저녁식사겸 술타령이 벌어졌는 데 경
찰의 습격을 받아 황급히 부엌 아궁이에 숨었다가 경찰들이 매부네 가족들을
패면서 밖으로 나간사이에 김남철은 아궁이에서 빠져 나와 두만강을끼고 걷
고 넘어지고 하면서 여기 개나리울 속에 몸을 숨긴 것이 조금전이라고 밝혔
다.
“그러믄 저냑밥도 제대로 몽 먹었구만”배상근이 물었다. 김남철이 수긍하
자 배상근이 조용히 일어서며 집에 다녀 오겠다고 했다. 먹을 걸 좀 가져 오겠
다는 것이다. 김남철은 우선 지금이 몇 시나 되었느냐고 물었다. 배상근도 시

계는 가지고 있지만 어두운데서 안보이기는 김남철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충 새벽 한시 쯤 됐을 것임메”
배상근을 만난 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매부네 소식을
들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엊저녁의 샛강골에서의 총소리로 다친사람이 없는
것 같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지천만이 여선규씨를 몹시 때렸다는 것은 저
주스럽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떻게도 도리가 없다. 지천만을 응징하는 방도가
있으면 좋겠는 데…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누군가가 몸을 부드
럽게 두드리며 (남철아 남철아 )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칠 듯 놀라며 눈을 뜬
김남철은 컴컴한 윤곽이지만 배상근이 앞에 앉았음을 알았다. 그 옆에는 배상
근의 아내가 앉았음도 알수 있었다.
“무시레 아주마이도 왔음둥?”김남철은 배상근 부부의 우정에 감동을 하면
서 진심으로 고맙고 미안함을 느끼며 인사를 했다.
“엊저낙에 성갑으 오마이가 와서 섬갑애비 간고슬 모른닥하면서 얼매나 울
벗는지 모르오. 나두 마이 울벗습메. 그러나 우리드리 울분거스능 지베스 울
분거시니 별로 페롭지능 아이했읍매. 그렇만 아주바이능 밤새 고세이 됫새 만
았을 것 애이요. 쯧쯧. 시상이 뽈리뽈리 바끼삐려야 하능긴데 쯧쯧”
말을 마치며 그녀는 콧물을 모아 삼켰다. 그리고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으
고 먹을 것을 꺼내며 남편의 손을 통해 김남철 앞에 밀어 놓는다. 삶은 감자와
옥수수 찐 것들이었다. 조그마한 주전자에는 된장국도 담아 왔다. 맛있게 그
리고 긴요하게 먹었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해도 여러사람이 몰려 있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의견으로
배상근 부부는 돌아갔다. 옥수수도 감자도 조금씩 남았지만 모조리 배상근네
가 가져 가게 했다. 만일에 김남철이 적발되어 취조를 받게될 경우 배상근네
우정이 드러나면 큰일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용변을 보는 것도 살살 기다시
피하여 반대편 철로를 멀찍이 건너가서 마치는 식으로 조그마한 증거라도 남
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밤공기는 여전히 선선한 정도가 아니라 아까보다도
조금 더 냉냉해진 것 같다. 피로도 있었는데다가 식곤증이 겹쳤는지 김남철은
또 잠이 들었다. 무심결에 등이 곱으러지며 두손이 자연스레 사타구니사이로

들어가는 새우잠이었다.
(남철아, 남철아) 조용하게 몸을 흔드는 기척에 화닥닥 놀란 김남철은 눈을
떴다 . 날이 뿌옇게 밝아지고 있었다. 배상근이 조금있으면 차가 올 것이라며
준비하라고 일러 주고는 여비에 보태 쓰라며 백원쯤의 지폐를 던져 주고는 총
총히 사라진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