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36호2006년 [테마시-지영희] 겨울밤, 눈 덮인 도문동 들녘에 서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37회 작성일 07-02-27 13:47

본문

겨울밤, 눈 덮인 도문동 들녘은 나를 바람이게 한다
안으로부터 환히 내비치는 생성의 눈부심 위에 선
나무의 깊은 절망을 꼼꼼히 짚으며
그림자를 밟고 선 나는 바람이고 싶은 게다
아니다
안간힘으로 버티는 뼈마디 구석구석
따뜻한 혀로 핥고 싶은 나는
어쩜 나무가 되고 싶은 지도 모른다
검은 설악산으로 품어들어 흔적 없이 있다가
눈 내리는 밤이면 도문동 들녘으로 내려와
오감을 펼치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간지럼 태우며
때마침 지나는 이의 슬픔을 덜어주는
그런 나무가 되고 싶은 지도 모른다
안다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세상을 다할 때까지
내게 달린 잎들을 다 떨어낼 수 없다는 것을
때 맞춰 붉게 물들인 잎들을
고양이 걸음으로 오는 바람에도 눈처럼 날릴 수 있다면
있다면
겨울밤, 눈 덮인 도문동 들녘에선
누구든지 바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