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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07년 [수필-이은자] 옛 동산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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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28회 작성일 08-02-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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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초를 떠나 산지 45년여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옛 시인의 노
랫말처럼‘산천은 의구’란 말은 모두 허사임을 절감합니다. 사람 사는 일
이 다 그러하듯 속초의 산야는 발전하느라 옛 모습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실개천은 고사하고 동산 하나가 송두리째 간 곳 없으니 더듬어 찾아도 옛
날은 가고 없습니다. 신들매를 고쳐매고 찬찬이 옛길을 찾아 나섭니다. 어
데부터 가면 좋을까요?
오늘은 우선 부둣가, 갯배물목, 중앙시장터, e편한 아파트, 시청뜰과 우체국까지
걸어서 가 볼까 합니다.
내가 속초를 처음 만난 곳이 속초 부둣가였습니다. 6.25사변 중 국군이
2차 북진을 감행하던 그 때 였습니다. 우리 가족처럼 북에서 피난 내려와
남한 땅 곳곳에 흩뿌려져 살던 사람들은 북진하는 국군 꽁무니를 바짝 따
라붙어 속초로 속초로 몰려오던 때 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부산을 거쳐 다
대포에서 되돌아 왔지만, 다른 누구들은 L.S.T에 실려 거제도까지, 강원도
사람들은 삼천 정라진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했습니다.
아홉 살 나는 부둣가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묵호항에서 큰 발동선을 타
고 속초항에 내렸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잘 아는 아저씨가 선장이기 때문
에 쉽게 그런 배에 탈 수 있었습니다. 속초항에는 우리가 타고 내린 그런
배가 엄청 많았고, 쉴새 없이 짐을 내리고 다시 떠나곤 했습니다. 작은 고
기잡이 배들은 모두 등대 밑 마쪽에만 몰려 있습니다. 큰 발동선은 모두
가 징발선이랍니다. 국군이 전쟁에 소용되는 온갖 물건을 후방에서 전방
인 이곳까지 실어나르는 보급선입니다. 탄약, 기름, 레이션 같은 물건들 중
에서 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쌀 뿐입니다. 배 갑판에는 쌀알이 즐
비하게 흩어져 있습니다. 가마니가 헐어서 새어나온 것이 아니고, 뱃사람
들이 대나무로 칼처럼 만든 것을 가지고 먼 바다를 지나오는 동안 가마니
에서 조금씩 조금씩 쌀을 빼내어 숨겨 놓았다가 자기 식구 양식으로 하거
나 시장에 몰래 팔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 국군 아저씨들은 매일 이기
고 있답니다. 머지않아 백두산에 태극기를 휘날릴거랍니다. 건너편 모래섬
은‘개건너’라고만 부릅니다. 두꺼비 집처럼 생긴 오두막이 띄엄띄엄 업드
려 있습니다. 피난민들의 집이랍니다. 밖으로 동해바다 안에는 항아리 모
양의 청초호가 있고 그 물목이 병목같아서 언니 오빠들은 옷을 머리꼭대
기에 동여이고 헤엄쳐 건너갔다 오곤 합니다. 해당화가 만발하는 해수욕
장이 있어서지요. 그리고 물목 얕은 곳에선 바지락을 몇 깡통씩 캐곤 합니다.
나도 크면 곡 저렇게 해 볼 것입니다.
부둣가에서 큰 길로 나왔습니다. 길은 금방 커다란 연못에 닿게 됩니다.
연못 북쪽으로 높다란 기차다리가 놓여있고 남쪽 둘레에 집들이 있습니
다. 해질녁엔 붕어 낚시가 잘 됩니다. 전쟁전엔 기차가 다녔지만 지금은
철길만 괜히 있습니다. 연못 가까이 한 집 마당엔 언제나 미국 군인들이
놀러옵니다. 그 중엔 흑인 군인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예쁜 언니들과 짝을
지어 노는 방법이 하나같이‘얼라리 꼴라리’입니다. 남자하고 여자가 남보는
앞에서 창피한 줄 모르고 서로 꼭 껴안고 입 맞추고 몸 부벼대며 놉니다.
춤 추는건 아닙니다. 방에 들어가서 더 놀고 가려고 방 차례를 기다
리는 거랍니다. 갈 적에 돈을 많이 주고 간답니다. 그 집은 전에 여관집이
여서 방이 꽤 많은데도 모자란답니다. 아이들이 그 곳에 구경가는 것을 어른들은
질색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자꾸만 거기 갑니다. 껌도 얻고, 입으로
불면 뽀오얗고 길죽한 고무풍선을 줍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연못을 돌고 논둑길을 따라 철다리 밑을 지나 미시령가는 길에 올라섰습니다.
나는 이제 속초초등학교 3학년에 다닙니다. 영랑호 쪽으로 푹꺼진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비탈진 곳에다 내 동무 관옥이네는
조를 심었습니다. 가을이 가까웠습니다. 조 알이 꼭꼭 들어차서 꺽어질
지경입니다. 그런데 관옥이 아버지는 걱정입니다. 참새 떼 때문이지요. 관
옥이는 오빠 둘에 막내 딸인데, 우리따라 예배당에 못 갑니다. 예배당에선
노래와 유희와 연극을 합니다. 과자도 자주 먹을 수 있습니다. 관옥이는
조 밭에 새를 몰아야 합니다.우리들이 관옥이 아버지에게 단단히 약속을
걸고 나섰습니다. 새를 다 몰면 관옥이 예배당에 가도 좋다고... ... .
우리동무들은 신이 났습니다. 학교가 파하면 조 밭머리에 몰려갑니다. 꽹가리,
깡통 따위를 두드리고 큰 보자기를 휘두르며‘훠이 훠이’새를 쫓습니다.
설악산 너머로 해가 지고 땅거미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비오는 날만 빼
고 조를 베는 날까지 우리는 꼭꼭 약속을 지켜갑니다. 관옥이네는 삶은 감
자로 간식을 챙겨줍니다. 마침내 추수감사절에 관옥이도 우리와 함께 예
배당에서 연극과 합창을 하게 됐습니다.
아, 오늘은 e 편한 세상 아파트 터까지에서 멈추었습니다. 내일 더 걸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