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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07년 [소설-강호삼] 다리 밑에 있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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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4,778회 작성일 08-02-1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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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에서 약 삼십 미터 높이로 아래쪽에서 보면 다리가 허공에 가로지
르고 있는 것 같다. 다리는 처음에 산 위로 군수물자 실어 나르기 위해 군
사용으로 건설되었지만 지금은 스카이웨이라 불러지면서 관광도로가 되었다.
  시가지 지상에서 25도 정도의 고가도로 형태로 높아지다가 서쪽의 45도의
가파른 산비탈에 이르러서는 서쪽과 동쪽에 높은 교각들을 세우고 철
제 상판을 얹은 다리다. 산비탈 집에 사는 사람들은 교각과 교각사이로 북
동쪽의 시가지를 볼 수 있다. 더 멀리는 수락산도 보이고 도봉산도 보인다.
  겨울에는 교각 사이로 북쪽으로부터 살을 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교각사이를 지나면서 무섭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울부 짖었다.
여름철 비가 내릴라치면 빗물이 폭포수처럼 콸콸거리며 다리 밑으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하루에도 수 천대나 오가는 차량들이 내는 소음도 보통이 아니지만 다리가
놓인 이후로 크고 작은 일들이 매일이다시피 이 다리에서 일어났다.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사람과 술 취한 사람이 모는 차가 다리 난간을 부수고
하늘을 날라 방안에서 자고 있던 일가족이 비명횡사한 일도 있었다.
  5.16 쿠데타와 12.12사태 때는 완전무장한 군인들을 가득 실은 군용트럭과
수 십대의 탱크들이 캐터필러 소리의 굉음을 울리며 다리를 지나 산쪽으로
올라갔다.
  산비탈과 다리 밑에 집들은 45도의 가파른 지형 때문에 재개발도 되지 않는다.
다리 밑에 사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리 자체가 무너져 내려 압살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놋쇠 향로에 꽂힌 여러 가닥의 향에서 향이 가느다랗게 피어오른다. 빨갛게
향이 타 들어가면서 향내가 상청을 감돈다. 문상 온 사람들이 고인에게
절을 올리기 전에 향갑에서 향을 집어 촛불에 불을 붙여 향로의 모래에 꽂는다.
  한꺼번에 들이닥친 문상객들은 고인의 영정을 향해 재배한다. 흑백사진인 고인의
영정은 불과 26시간 전에 운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배우는 중 고등학교
역사책에서 보는 인물 같은 느낌이다. 몇 올 남지 않는 백발과 밭고랑 같은 주름살과
치아가 없이 함몰한 합죽한 입술이 오광대 놀이의 미얄할미 모습이다.
문상객이 옆으로 돌아서서 다시 상제들과 맞절을 한다. 상제들은 굴건 제복 대신
모두 까만 양복을 입었다. 팔소매에 흰 천을 두 줄로 박은 완장을 꼈다.
제례는 상청을 차리고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문상을 받는 절차는
유교식에 가깝다. 하지만 문상객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따라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고 또 한가한 시간에는 교인들이 몰려와 큰소리로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른다. 고인과 아들과 딸 며느리의 종교가 다 각각이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젊은 비구니 둘이 목탁을 두드리고 청아한 목소리로 두 시간 이나
염불을 했다. 고인이 정신을 놓기 전까지 다니던 절의 비구니들이다.
왕생극락하라는 염불이 끝나자 상주의 여동생이 비구니들에게 돈이 담긴
흰 봉투를 내밀었다. 돈 봉투를 장삼의 소매 속에 챙긴 비구니가 합장하고
상청을 떠났다. 화장으로 모시는 장례가 끝나면 49제를 그 절에서 올린 뒤
다시 유골은 모시고 부산으로 내려가 고인이 젊었을 때부터 다녔던
사찰의 소나무 숲에 뿌리기로 예정되어 있다.
모친의 춘추가 어떻게 되셨지?
아흔 여덟이었어.
그래...? 이 선생은 섭섭하게 들릴지 몰라도 호상 아닌가?
상주의 얼굴이 곤혹스럽다. 아흔 여덟이나 사셨으니 호상이고 장수하신 셈이다.
돌아보면 너무나 아득한 세월이다.
고인은 1909년,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갈리던 시기에 태어났다.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전주 이씨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 시집살이는
나라의 운명만큼이나 험난했다. 독립군인 남편을 따라 일제의 관헌에게
쫓기면서 만주의 간도 땅을 전전했다. 광복을 맞아 귀환했으나 다시 남편은
해방 후 좌우익으로 갈라진 나라에서 정치에 휩쓸렸다. 어린 자식들과
함께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은 고스란히 고인의 몫이었다. 그리고 다시 40여년의
혹독한 군사 독재정권을 견뎌내면서 덧없는 세월을 순식간에 흘러 보내다
언제부턴가 정신을 놓아버렸다.
가만 있자 아흔 여덟이시면 1909년 기유(己酉)생이신데 아마 그 해 시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또오 히루부미를 죽였지.
그랬다. 고인이 태어났던 그 해 시월 이십육일 오전 아홉시, 러시아 령
하얼빈에서 러시아와 청, 일본 세 나라 관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이
또오 히루부미가 기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몇 걸음 발걸음을 옮겨 마중
나온 러시아의 고관 코􀶟세프(Kokotseff)와 악수를 하려던 순간, 몇 겹으
로 둘러싸인 경호대열을 뚫고 갑자기 머리를 짧게 깎아 올린 상고머리에
양복을 입은 삼십대 초반의 청년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청년은 정확하게
이또오 히루부미를 겨냥해 육혈포 세발을 쏘았고 이또오 히루부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청년이 바로 안중근이었다.
안중근은 다시 하얼빈 영사와 만주철도회사의 이사 등 세 명에게 중상
을 입히고 러시아 군인들에게 잡히기 전에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했다.
안중근은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오 히루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
고 있다가 마침내 목적을 이뤘다.
말을 꺼낸 사람은 상주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옛날의 직장 동료 중
사회과목을 가리켰던 사람으로 지금은 바둑친구다. 학교 때는 별로 친하
지 않았으나 퇴직 후 관혼상제 때 만나게 되면서 바둑을 같이 두고 어울
리는 사이가 되었다. 퇴직 후, 이런 자리가 아니면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문상을 왔다. 상주는 경황중이라 일일이 따로 부고를 내지도 못
했는데 용케 소식을 듣고 문상을 온 것이 고마울 뿐이다. 동창이나 퇴직
자들끼리 사발통문이 돈 것이다.
상주는 문상객들이 뜸한 틈을 타서 아들에게 상청을 지키게 하고 옛 직
장동료들과 어울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짧은 비명을 올리고 도로
주저앉았다.
아이구!
아부지 괜찮으세요?
아들이 다가와 부축했다. 요즘 들어 잊어버릴 만 하면 뜬금없이 찾아오
는 통증이다. 나이 들면서 옛날의 상처가 다시 통증을 유발하는 모양이다.
47년도 전에 입은 총상의 후유증이다.
경찰의 발포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경무대 앞 데모대의 선봉에 당시 대
학생이었던 상주가 있었다. 스크럼을 짠 학생들의 데모대 선봉이 경무대
의 정문이 보이는 곳까지 진출했을 때였다. 갑자기 콩 볶듯 한 총성이 울
리면서 학생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상주는 바로 옆에서 복부에 총을 맞
고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뒹구는 학생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앞
으로 고꾸라졌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따끔하게 허벅지에 박히는 것을
느끼면서 다리에 힘이 빠져버렸다.
이제 됐다.
느닷없이 찾아와 무릎을 꿇게 했던 날카로운 통증은 다행히 이내 사라졌다.
상주는 아들의 부축을 물리치고 약간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옛날 학교 동료
들이 있는 술자리로 갔다.
“아가, 여기 안주하고 술을 좀 더 가져와라.”
상주가 까만 치마저고리 상복차림의 삼십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에게 말
했다. 상주의 며느리다. 상주는 아들 딸 남매를 두었다. 아들은 노무현이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자 열렬한 노사모가 되었다. 아들과 딸은 노무현 후보
야 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서민의 지도자라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 아들
과 딸의 주장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우려도 없지 않았다. 오랜 군사독
재가 남긴 후유증이긴 하지만 너무 표를 의식한 선동과 일변도로 치우친
반미와 좌파적 시각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아들은 며느리를 만났다. 며느리 역시 열렬
한 노사모였다. 밥 한 끼 굶지 않고 육이오가 뭔지도 모르는 아들은 마치
신종 열병에 걸린 것 같았다. 중학교 때부터 컴퓨터 게임으로 익힌 현란
한 인터넷 실력을 발휘해서 선거운동에 한몫 단단히 했다.
선거가 끝나자 반미 운동을 하던 아들은 역설적이게도 미군상대 용역회
사의 트럭운전기사가 되었다. 같이 노사모 운동을 하던 며느리와 결혼을
해서 분가를 했고 평범한 가장이 되어 얼마 전에 아들을 낳았다.
딸아이는 엄마가 죽은 것이 무능한 아버지 탓이라고 했다. 딸의 말이 전
혀 틀 린 것이 아니다. 아내는 쥐꼬리만한 선생의 월급으로 남매를 학교
에 보내고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다가 쉰도 못된 나이에 덜컥 유방암 말기
선고를 받은 것이다. 딸아이는 아내가 죽은 후 바로 집을 나가 친구와 함
께 원룸에서 살고 있다.
이제 아내가 없는 집에 그는 아흔 여덟의 치매에 걸린 노모와 함께 산
비탈의 판잣집이나 다름없는 대지 스물 일곱 평에 건평 17평의 단독주택
의 다리 밑에서 30년 째 살고 있다.
언제까지나 그의 곁에 있을 것 같은 아내가 중환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
하자 그는 학교에 휴직원을 내고 아내의 병간호에 매달렸으나 시기를 놓쳐
버렸다.
아내는 꼬챙이처럼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으로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정년이 두 해나 남았지만 명예퇴직을 해서 아내의 병원비와
부채를 갚았다. 아내의 49제가 지났을 무렵 압구정동에 사는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빠! 오늘 우리 집에 좀 오세요.”
“무슨 일 있니?”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고 저녁이나 같이 했으면 하구요. 옴마도 오빠를
보고 싶어 하구요.”
“그래, 그럼 저녁에 보자.”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아내의 장례로 노모를 못 본지 한참이나 되었다
는 것을 알았다. 누이의 음성으로 미뤄보아 노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 모양이어서 안심이 되었다. 뒤늦게 짚이는 게 있었다. 아내가 입원하
기 전까지는 노모를 자신이 모시고 살았다. 상속받은 재산 한 푼 없었지
만 자신은 장남이고 딸은 출가외인이기에 부모를 모시는 것은 당연히 장
남인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내가 입원하면서 어쩔 수 없이
누이에게 노모를 모시게 했다. 생각하면 잘 사는 딸자식이 노모를 모실 수
도 있는 일이다.
동생의 집에 올 때마다 그는 이질감을 느낀다. 동생의 집은 철통같이 보
안이 잘 된 무슨 빌이라는 이름이 붙은 120평짜리 아파트다. 하나 밖에 없
는 출입문에 금테 모자를 쓰고 잘 다려진 감청색 제복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구두를 신은 수위가 24시간 지키고 있다.
외부 사람을 대하는 수위의 얼굴은 언제나 정중하고 예의 바른 것이지
만 차갑게 번득이는 눈초리가 여간 거북스럽지 않다. 수위의 눈에는 이 아
파트의 거주자가 아니면 모두 도둑놈이나 잡상인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인터폰을 눌러 내방객의 신원을 확인하고 수위가 주인의 확인을 받은 후에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것도 불쾌하고 번거롭다.
늦은 저녁시간인데도 아직 매제는 퇴근하지 않았다. 중소기업 은행장과
회식이 있어서 늦는다고 했다. 매제의 집은 풍요가 넘쳐흐른다. 잘되는 집
은 자식들도 잘 되는 모양이다. 아들 없이 세 자매를 둔 누이의 딸들 중
첫째는 스텐포드에, 둘째는 프린스턴에서 박사를 해서 각각 국내의 명문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고, 셋째만 국내에서 대학을 나와 인터넷 계통의
회사를 다니고 있다.
대통령과 경제부총리와 국세청장이라는 자가,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육
이오 때 인민재판 하듯이 국민들의 편을 가르고 섬뜩하리만치 증오가 서
린 독설을 내뱉는 강남사람의 대상이 매제라면 이의가 없다.
누이의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서자 어디선가 오래 맡지 못했던 노모의
냄새가 났다. 한동안 잊어버렸던 냄새다. 값비싼 대형 공기청정기가 돌아
가고 있었지만 노모가 풍기는 청계천의 시궁창 같은 역한 냄새는 결코 걸
러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누이가 가장 부끄러워하고 질색을 하는 것이 이 냄새다. 누이도 이제 평
범한 서민이 아니다. 상류층만 드나드는 각가지 종류의 클럽에 가입하고
골프도 즐긴다. 가족마다 비엠 더불유니, 벤츠 같은 외제차를 한대씩 가지
고 있다. 집안의 모든 것이 유명 브랜드 제품이다. 그는 누이의 과하리만
치 한 이런 사치를 이해할 수 있다. 6.70년대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할 정
도로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다.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누이는 역시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매
제와 중매결혼을 했다. 공고를 나와 트랜지스터. 전기저항 다이오드 같은
것을 만들던 전자부품 공장의 공원이었던 매제는 노모가 건네준 돈을 밑
천으로 독립해서 오늘의 기업을 일으켰다. 마침 불어 온 전자산업의 호황
이 매제를 오늘의 거부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매제가 거부가 되었다고 해서, 강남 사람이라고 해서 대통령이나
총리나 국세청장에게, 더더구나 직업처럼 데모만하면서 뒷돈으로 귀족
처럼 잘 먹고 잘 사는 노동 귀족들의 증오의 대상이 될만한 짓을 한 적이
없다. 성실하게 일하고 노력해서 분식회계 한번 하지 않고 국가의 납세의
무 다하면서 종업원에게 적정 임금주고 공장을 키워왔다.
노모의 몸에서 1960년대 청계천에서의 악취 같은 것이 풍겼다. 당시의
청계천은 온갖 쓰레기와 죽은 짐승의 시체와 똥 덩어리가 떠다니는 검정
염색물 같은 시커먼 물이 괴여있는 시궁창이었다. 하루 종일 그 시궁창 물
속에서 거품이 뽀글거리며 가스가 올라오고 역겨운 악취가 풍겼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그 시궁창 물 위에 나무 막대기를 꽂고 얼기설기
마분지와 구제품 분유깡통을 펴서 판잣집을 지었다. 그곳에 쪽방이 생기
더니 막벌이 노동자들을 상대로 몸 파는 여자들도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가 국회의원 선거비용으로 집마저 날려버리자 다니던 대학의 등
록금은커녕 당장 잘 곳과 먹을 것이 절실했다. 동대문의 창신동 산 위의
자취방을 쫓겨나와 청계천 쪽방 한 칸을 빌려 수상생활을 했다. 인력시장
이었던 남대문 닭 시장은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그는 꺼멓게 물들인 상하의 군복 차림에
워커 끈을 당겨 메고 남대문 닭 시장골목을 향했다. 새벽마다 공사판에서
일당 인부들을 모집하려 십장들이 왔다. 5시 전후 각 공사장에서 온 십장
들은 일당이 150원임을 고지한 뒤 희망자들을 줄 세웠다. 데려갈 인부들
을 손바닥과 팔뚝의 근육을 만져보고 뽑은 뒤 번호표를 주었다. 그 선발
과정에서 그는 번번이 제외되었다. 7시가 되면 더 이상 공사판에서 사람이
오지 않았다.
그 때쯤 낙담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영화판의 엑스트라 동원이었다. 한양대학교에서 신영균이와 김지
미가 주연하는 석가모니라는 영화의 인도군대로 엑스트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당 백 원, 조합비로 떼는 10원을 제하면 9십 원이지만 그나마
공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길가의 밥집에서 밥
한 그릇이 삼십 원이었다.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져 한양대학교 노천 야외
강의실에서 투구와 창을 들고 고함을 지르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 했다.
일주일에 하루 일하기가 어려웠다. 거리에는 온통 지게꾼과 껌팔이와
실업자들이 득실거렸다. 종로 3가와 청량리, 서울 역과 용산 역, 미아리 고개에
여자들이 집단으로 모여들어 몸을 팔아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일이 없는 날에는 청계천 수상가옥의 한 평도 안 되는 방에 하루 종일
누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다니며 배만 더 고플 뿐이었다. 쪽방에
누워 있으면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역한 냄새가 청계천 바닥에서
올라왔다.
학생들이 맨 먼저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대부분 일제관리
들로 출범한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그 태생적 한계를 뛰어 넘지 못했다.
불법이란 불법을 모두 동원한 정 부통령의 부정선거는 마침내 국민들의
저항을 받기에 이르렀다.
노모가 있는 곳은 어디서나 오줌의 지린내와 똥 냄새가 난다. 어른 용
기저귀를 바로바로 채워주지만 그 때뿐이다. 한동안 맡지 않았던 역겨운
냄새가 후각을 후벼 판다. 노모는 잠깐 의식이 돌아올 때면 대소변을 가
리려 하지만 거동이 따라주지 못한다. 앉은걸음으로 윗목의 변기를 찾다
가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만다.
“누구신교? 니 상구나, 상영이 맞제?”
“아입니더. 어무이, 지는 세영입니더.”
불안하고 겁먹은 시선이 갑자기 반색하는 환한 얼굴로 바뀐다. 노모 앞
에서 그는 노모가 잘 알아듣도록 일부러 사투리를 쓴다. 노모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인 그에게서 육이오 때 의용군으로 잡혀간 큰아들과 지리산 공
비 토벌 때 전사한 둘째 아들의 환영을 보는 모양이다.
잠시 노모의 표정이 텅 비더니 다시 불안하고 겁먹은 얼굴이 되면서
구석 쪽 벽에 바짝 대고 몸을 웅크린다. 잠시 후 살며시 머리를 들었다가
아직도 문을 열고 서 있는 그를 보자 자라모양 다시 얼굴을 무릎 속에 숨
긴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누이의 집에 있으면서도 그 사이 노모는 더 여윈
것 같다. 쪼글쪼글한 주름살과 모조리 빠진 이빨 때문에 함몰된 뺨과 뒤
틀린 얼굴에, 뒤엉킨 희색 머리카락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다. 그도 모르게
그의 눈이 젖는다. 젊은 날의 노모는 후덕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지금
의 누이 모습을 보면 젊은 시절 노모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누이도 이제
예순을 넘어 선 나이다. 필요이상 살이 찌고 나이 들면서 두툼해 보이는
입술이 약간 심술궂어 보이긴 하지만 노모의 젊은 날 모습을 그대로 빼
닮았다.
선친은 일제시대는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김구
의 한독당 당원이 되었다가 다시 민주당 당원으로 자유당에 맞서 정치판
으로만 떠돌았다. 선친이 그나마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노
모의 헌신과 후덕함 때문이었다. 일가는 해방이 되자 가진 것 하나 없이
만주에서 귀환하여 부산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의 생가가 밀양이었다.
해방되던 해 그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여전히 친일파
가 득세하고 있었다. 오히려 애국자로 둔갑하여 진짜 애국자들을 박해했
다.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면서 위로 두 형이 한 사람은 의용군으로, 또 한
사람은 지리산에서 공비토벌을 하다가 전사했다. 만년 야당인 선친은 일
제관동군 출신의 서슬 푸른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을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다니다가 어느 날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가족들은 사람들이 야만적으로 고문당하고 죽어 나가는 곳마다, 행려병
자 시체 안치소마다 찾아 다녔으나 끝내 선친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김
대중 선생도 하마터면 그 꼴을 당할 번했다. 일제관동군이 독립군을 소탕
하기 위해 조선인 출신 장교와 병사만으로 창설했던 간도 특설대가 해방
된 조국에서도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수건달이나
다름없었던 선친이긴 했지만 가족의 구심점이었다. 갑작스러운 선친의 실
종은 가정의 위기를 가져왔다.
그 통에 그는 사람으로 겪을 수 있는 고생은 다 겪었다. 구두닦이로, 신
문배달과 아이스 케키 행상을 하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나와 입주가정교사
로 대학을 다니고 누이가 공장에 다니면서 고등학교를 나올 수 있었던 것
은 전적으로 노모의 회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노모의 의식은 시시때때로 외출을 한다. 외출을 하면 어디로 헤매고 다
니시는지 본능만 남는다. 아귀아귀 먹는 것과 타인을 경계하는 것 외는 조
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사람까지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먹었거나 먹고
싶어도 먹지 못했던 음식들을 모두 찾는다. 언제나 빡빡한 훈장 월급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모가 찾는 음식은 냉장고가 그득할 정도로 준비하게 했다.
아이스크림과 시루떡, 백설기, 햄, 소시지, 딸기, 자두, 사과, 배, 수박까지
찾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관성이 낮은 것은 그때그때, 집 아래 슈
퍼에서 사가지고 오기도 한다.
언제까지 드시고 싶은 걸 다 드시게 할 셈이요?
노모의 기저귀를 갈고 이틀이 멀다하고 몸을 씻겨야하는 아내가 참다못
해 한마디 했지만 도리가 없다. 욕설이라곤 모르던 노모의 육두문자도 문
자지만 자식도리로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모에게 드시고 싶은 걸
못 드시게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다. 드시는 양을 줄여 보기도 했지만 모
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노모를 주방과 붙은 방에 두고 그는 누이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 상차
림이 푸짐하다. 누이는 자랄 때 먹고 싶어도 먹지 못했던 콤플렉스 때문
인지 주로 육류 위주의 음식을 즐기는 편이다.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과
일을 먹는 자리에서 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
“옴마, 오빠 집으로 모시고 가세요. 옴마 때문에 우리 생활이 말이 아니
예요. 오빠는 이제 마땅한 벌이도 없잖아요. 옴마 모시고 살면 제가 용돈
넉넉하게 드릴게요.”
그는 할말이 없다. 이제 올케도 없는데 여자인 네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
이 좋지 않겠느냐고 통사정 하고 싶었으나 말이 되어 나오질 않는다. 누
이는 돈 있고 명문대학의 교수로 박사가 둘씩이나 있는 집안의 체면을 문
제 삼고 있는 것이다.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아내가 없는 집안이고 보니 난감한 일이 한 둘 아니겠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무겁게 그가 입을 열었다.
“알았다. 내가 모시고 가마.”
조심스럽게 그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누이의 얼굴이 금방 활짝 펴졌다.
누이는 핸드폰으로 기사를 불렀다. 미리 준비 해 두었던 모양 대형 냉동
고에서 갈비와 조기, 밑반찬 통들을 꺼내 차에 싣게 했다.
그가 노모의 방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사이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노모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다. 나름대로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표정이다.
“니가 우짠 일이고. 니, 어데 갔다 왔더나?”
이제야 노모의 의식이 외출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그를 똑 바로 알아보
았다. 그러나 암으로 며느리가 죽은 것은 모른다.
“어머니 모시가려 안 왔능교.”
“여기가 어데고?”
“윤지네 집입니더.”
“맞다. 여기가 윤지네 집이제. 내사 마 인자, 니 집으로 갈란다. 윤지 그
가스나가 에미를 밥도 안주고 굶겨 죽일려고 안 하나. 내 배고프다. 밥좀 도.”
노모의 눈빛이 애원으로 가득하다. 노모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고 먹을 걸 달라고 조른다. 하루에도 기저귀 대 여섯 장을 갈아야 하는 형
편이니 누이가 뒷감당을 하지 못해 드실 걸 적게 드렸을 수도 있다.
“밥, 집에 가서 드리겠심더.”
노모의 무릎 밑으로 손을 넣고, 또 한 손으로 등을 받치면서 안아 올렸
다. 그때 그는 다시 허벅지에 짧고 날카로운 동통을 느낀다. 하마터면 노모를
안은 손을 놓고 앞으로 고꾸라질 번했다. 요즘 들어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을지로 쪽으로 돌아서 가야겠습니다.”
기사가 백미러로 힐끗 뒤를 보면서 말했다. 차량들이 서다가다를 반복하다가
아예 서버리고 말았다.
“좋도록 하세요.”
노모는 주름살투성이인 입을 약간 벌린 채 뒷좌석에 어린아이처럼 잠이
들었다. 노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먹는 것과 자는 것뿐이다. 웅크리고 잠든
모습이, 몇 년 전 어느 세도가문의 이장 때 화재가 되었던 미라 같은 모습이다.
신문에 사진이 소개된 그 미라는 몇 백 년이 지났는데도 생전의 머리칼이 그대로
있었다.
기사가 차선을 바꿔 보도 쪽으로 차를 바짝 붙였다. 사이드 미러가 다른
차에 부딪힐 것 같다. 시청 쪽으로 가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을지로 입
구에서 우회전을 할 심산인 것 같다. 아침 뉴스에 시청 쪽에 에프 티 에이
반대 데모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저녁 티브이 뉴스에 데모로 귀족생활을
하는 얼굴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 인물은 어느 데모 때나 등장하는 단
골손님 같은 존재다.
길을 우회해서 오긴 했지만 비교적 빨리 스카이웨이 입구까지 왔다. 기
사가 다리 북쪽 갓길에 차를 세웠다. 집까지는 거의 50도 각도의 가파른
비탈길이어서 횔 췌어로 노모를 모시기가 어렵다. 그는 잠든 노모를 다시
아이 안듯이 안았다. 옷 보따리와 기저귀 뭉치, 반찬거리 들은 기사가 날랐다.
노모가 집으로 돌아 온 후 집안에는 다시 역한 냄새가 떠돌았다. 아무
리 락스로 닦고 소독을 해도 소용이 없다. 방마다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도 공기와 같이 넘실되는 역한 냄새는 막을 수가 없다.
날짜를 잡아서 노모를 목욕시키기로 한다. 마냥 똥밭에 방치할 수 없다.
냄새도 냄새지만 욕창을 막아야 한다. 생전에 아내가 했던 것처럼 먼저
욕조에 물을 받고 비누와 타월을 준비한 뒤 노모의 옷을 벗긴다. 옷을 모두
벗은 노모의 몸뚱이는 영락없이 털을 모두 뽑혀버린 노계(􂗥鷄)의 모양이
다. 5남매를 모두 먹여 키웠을 젊은 날의 그렇게 풍만했던 젖가슴은 앙상
히 드러난 갈비뼈 위에 까만 젖꼭지로만 달랑 붙어있을 뿐이다. 얼굴이나
사지 모두가 양수 속에 있다가 나온 갓난아이의 얼굴처럼 주름져 있고 살
가죽이 이리저리 밀렸다.
그는 노모를 안아 조심스럽게 욕조 물에 몸을 담근다. 노모의 기분이 여
느 때보다 좋아 보인다. 시원한지 지그시 눈마저 감는다. 목욕을 싫어하지
않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그는 샴푸를 손바닥에 받아 거품을 내어 머리를 감기고 다음으로 물비
누로 얼굴과 목과 가슴과 등을 씻긴다. 그 다음이 문제다. 그의 손길이 선
뜻 아래로 내려가지 못한다. 악취의 근원은 생식과 배설기관이 있는 아래
쪽이다. 그 부위를 씻지 않고는 목욕하는 의미가 없다.
“니가 고생이 많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니한테 못할 짓을 시킨다.”
“무슨 소린교. 실때없는 소리 말고 다리나 좀 벌려 보이소.”
일부러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인다. 외출나간 노모의 의식이 돌아와 있
다. 노모의 불두덩에 치모가 한 올도 없다. 그는 노모의 불두덩과 시커멓
게 착색된 질 주위와 항문주위에 비누질을 한다. 노모의 질속에 똥 찌꺼
기가 가득 들어가 있다. 기저귀를 찬 채 앉아서 뭉그적거리기 때문이다.
질을 비집고 손가락으로 똥 찌꺼기를 끄집어내고 다시 비누칠을 하고 물
로 씻으면서 그는 일부러 천연덕스럽게 노모에게 농담을 건넨다. 면구스
러움과 겸연쩍음을 들기 위해서다.
“이제 보니 엄마 보지는 백보지네. 아버지가 하낫도 재미없었겠다.”
“야! 이누마야. 나도 처음부터 백보지는 아니었던기라. 얼마나 털이 많
았다고.”
너무나 파격이다. 세상에 모자간의 대화치고는 이런 대화가 없을 것이
다. 세상에는 상식을 뛰어 넘는 일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목욕을 마친 노
모는 아기처럼 잠이 들었다. 목욕을 해서 개운 했던 모양이다.
석 점을 두고도 이겼는데 내리 세 판을 졌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배가
고프면 노모가 먹도록 노모가 거처하는 방 윗목에 밥상을 차려놓고 그는
종로로 나왔다.
노모를 돌보는 일 이외 그의 요즘 일과는 종로 2가로 가서 옛날 학교
직장동료들을 만나 바둑을 두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다. 이 천 원하는 기
원의 입장료를 내면 하루 종일 바둑을 둘 수 있다.
바둑 한판이 끝날 때마다 진 사람이 2 천 원씩을 모아, 큰 도로 이면 골
목에 자리 잡은 순대 국 집이나 생선구이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기원
으로 돌아와 바둑을 둔다. 영화구경을 하고 싶을 때는 진 사람이 4 천원
을 내서 돈을 모은다.
무언가 꼭 잡히는 것이 없는데도 불안했다. 노모는 치매도 치매지만 거
동을 할 수 없어 하루 종일 방안에만 있다. 노모가 밖으로 나갈 일은 없
다. 엉덩이를 뭉그적거려 1.2미터를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다.
네 번째 대국이 중반에 들어섰다. 아직 판세는 누가 유리한지 가늠할 수
없다. 그가 손에 쥐었던 바둑돌을 나무통에 넣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동료가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집에 좀 가봐야 겠네.”
“이 선생! 이번에는 내가 이길 차롄데…”
동료 선생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손에 쥔 바둑돌을 바둑알 통
에 떨어트려 넣는다. 오래 같이 만나 바둑을 두는 사이기에 누구보다 그
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급한 마음에 평소에 타지 않던 택시를 잡았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길이 막혔다. 시청인가 광화문 어디에서 데모를 하는데 누군가 분신자살
을 기도했다고 한다. 그 쪽에서 밀린 차들이 우회하느라 종로 3가와 4가,
동대문까지도 차가 정체되고 있다. 차라리 지하철을 타는 편이 나았을 것
이다. 지하철을 내려 다시 마을버스 갈아타고 산 아래까지 간 뒤 허겁지
겁 40개나 되는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 시간이 걸린다.
스카이웨이 진입로에 있는 다리 북단에서 택시를 내렸다. 다리 아래 비
탈길을 굴러 떨어지듯이 단숨에 내려가 삐걱거리는 녹슨 철제대문을 연
다. 숨이 턱에 찬다. 그도 이제 칠순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다.
“어무이더!”
큰 소리로 노모를 부른다. 노모가 앉은 채로 방문을 민다.
“와아? 젖 달라카나?”
“아무 일 없었능교?”
“일은 무신 일. 내가 죽었을까봐 그라나?”
“어무이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능기요.”
그 때마다 투정을 부리는 노모의 목소리가 반갑다. <우리 어무이는 나
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소리쳐 노모를 불러도 기척이 없다. 어쩐지 집안이 무서우리만치 괴괴
하다. 방문을 벌컥 열어 제치자 노모가 비스듬히 옆으로 넘어져 있다. 노
모의 코에 얼굴을 갖다댔다. 숨을 쉬지 않는다. 노모는 그도 없는 시각에
혼자서 자는 듯이 숨을 거둔 것이다. 노모의 나이 98세. 대한민국 건국 62년.
서기 2007년 2월 18일의 일이었다. 그 시각에 다시 다리 위로 대형 트럭이
지나는지 굉음이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