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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07년 [소설-윤홍렬] 逆風은 불어도 江물은 흐른다.X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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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350회 작성일 08-02-1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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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조선땅에 큰 회오리 바람이 부는 것은 사실이다. 그 악독하고 잔인하였
던 일본세력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풀끝의 이슬처럼이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본천황의 방송 한마디로 이 조선땅에서 모조리 보따리
를 싸고 남부 여대하여 쫓겨갔다. 그런데…… 우리들은, 온 조선사람들은
지난날 생각하기로는 미국이 우리 조선의 독립은 물론이고 모든 민생문제
를 완벽하게 자리 잡아주는 주동세력 노릇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런데 38도선이라는 청천벽력같은 것이 나타나 조선땅이 남북으로 갈라졌
고 천만 뜻밖에도 38도선 이북에는 쏘련군이 들어 왔다는 것이 어쩌면 우
리 38도선 위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불행의 시작일런지도 모른다
는 불길한 예감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여선규는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턱을 고인 오른쪽 팔꿈치를 왼손으로
받쳐들고 앉아 책상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방의 중간 행정기관이기는 하지만“무산군”이라는 곳이 지정학적으
로, 조선반도에서 구석진 곳이기도 하지만 인구가 2만명도 못되는 데다가
경제적으로도 빈약한 지역이다. 창렬동 철광산이 아니었더라면 임산물(􃥡
産物) 관리사무소정도가 있을까 말까한 그런 고장이다. 농토의 지질까지
도 척박하다. 내세울 것이 있다면 군(郡)관활구역은 전 조선땅에서 가장
넓다는 것, 그리고 백두산을 끼고 있다는것과 산림이 원시림 그대로나 마
찬가지로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합방한 이후 낭림산맥의 울울창창한 임야를 많
이 깍아 먹었다. 노일전쟁(􂗩日戰爭) 2년간에 소비한 막대한 군자금(軍資
金)의 빚을 백두산주변에서 베어내는 임산물로 벌충하였다고 전해진다. 2
년간의 전쟁빚을 백두산 주변의 나무를 깎아서 충당하였다는 것인데도 그
일대의 수림은 여전히 울창하다. 지금도 변함없이 산림(山林)의 보고다.
그러나 이러한 산림자원이 오늘의 생활에 부닥친 민족적 국가적 방안을
탐색하는 데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된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무척 궁
금하다.
  세상의 변천 추이와 바뀌어진 상황을 상부에서 알려주어야 하는 데 그
알려주는 속도가 더디다. 알려주는 속도가 더딘것이 아니라“새로운 소식
이 오는 속도가”필연적으로 더디다. 그 더디게 오는 소식을 그래도 좀 속
히 알 수 있는 방법이‘라듸오’방송 청취인데‘경성방송’이 어떤때는 곧
잘 들리다가도 어떤 때는 직직거리기만하고 의미 파악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소용들이 속에서 그나마도 숨통이 트이는 것이 부령쪽서 오는
소식이 좀 빠르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소식은 청진에서 오는 소식이다.
3일전에 길병석 서기가 연설하였던“세미나르”전달강습을 통하여 여선
규도 새로운 지식을 많이 깨쳤다.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말이 해방
이후 파다하게 퍼진 말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들어보기는“전달강습”이 처음이었다. 우리 북조선에는 공산
주의 정부가 들어선다는 것. 그래서 노동자 농민이 주체가 되는 정부가 선
다는 것. 그렇게 하여 결국은 우리 공산당 정부가 주동이 되어 지금까지
우리 조상이 누려보지 못하였던 이상적인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것. 이 모
든 것이“위대한 조국 소련의 지도로써만 가능한 것이며 이런 꿈은 스타
린 대원수가 영도하는 위대한 소련의 보호와 영도를 잘 받들어야만 하루
속히 성취될 수 있다”고 거듭거듭 강조하던 모습이 되풀이 되어 떠오른다.
하기야 여선규도 이제부터는 공산주의 국가가 서나 보다라고 은연중에 짐
작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던 것이“위대한 조국 소련”
이라든가“스타린 대 원수”라든가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세상이 바뀌
는구나……를 실감하였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공산주의국가란 어떤
국가인지는 알지를 못하고 있다. 그저 막연하게…… 빈부의 구분이 없다
는 것. 그래서 있는 자의 재산은 ”없는자, 못가진자에게 나눠줘야 한다“
는 정도로 알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으로 실감나게 하는 것
은 무산읍 거리의 여러군데, 요소요소에 벽보가 많이 붙었다. 문구는 대개
비슷한데…노동자 농민들이어 단결하라.…무산대중은 뭉쳐라…악덕유산
자를 무찌르는데 용감하라…는 투의 글들이다.
  여선규는 무거워지는 머리를 가다듬으려는 듯 앉은 채로 머리를 좌로
우로 빙빙 돌렸다. 그래도 머릿속이 개운하지가 않다. 요 며칠사이 내리
불쾌한일 고통스러운 일들을 몇 차례 겪었다. 특히 괴로운 것은 며칠전 샛
강골에서 만났던 일본인들 문제. 특히 벌건 대낮에 남편들과“우리들이 보
는 앞에서”완전한 알몸으로 벗겨진 상태로 집단 강간을 당하던 일본인
여성들의 참혹한 장면들. 도리질을 쳐도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이 떠오르
며 소름이􀅡오싹오싹 끼쳐진다. 그리고 그 일본인들을 잡아 치안대에 넘
겼다고, 그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군정위원회에 나타났을때의
초최한 몰골의 지천만의 행색,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볼때 도저히 용서받
지 못할 황경에서 그래도 어떡하던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지천만이
위원장실에 들어오자마자“아이고 위원장 동지 안녕하심둥?”하면서 큰절
을 하던 모습, 어색하게 웃으며 허리를 굽신거리던 비굴한 모습… 주먹을
불끈쥐고 부르르 떨며 자신을 노려보는 여선규에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공
연히 헤헤하면서 얼레발을 치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자치위원회(군
청)직원 중에 지천만에게 (아버지의 원수)라고 달려들어온 직원 한 사람
이 멱살을 움켜쥐자 금방 얼굴이 샛노래지며 (억울합니다. 그건 일본사람
이 시켜서 한 짓입니다)라고 변명을 하면서도 두손을 싹싹비비며 용서를
애원하던 모습. 그 청년의 억센 주먹질과 발길질에 쓰러져 버둥거리는 것
을 여선규가 유순하게 청년을 설득하여 치안대로 끌고 갈때, 위원장을 연
호하며 도와 달라고 애걸하던 모습… 길병석의“세미나”전달 강습이후
급속하게 몰아닥치는 쏘련 바람. 대체적으로는‘마우제’라며 러시아인을
깔보는 풍조도 곁들여 있기는 하다. 우선 그들의 특히 군인들의 노상 강
도행위가 멸시의 대상이었고, 조금만 틈이 있으면 부녀자의 강탈행위와
그들의 주식인 흘레바리(식빵)를 나무토막처럼 들고 다니다가 때가 되면
아무데서나 대검(帶劍)으로 베어 우물거리며 먹는 모습등에서 그들의 비
문명성을 무시하는 풍조가 일렁거렸다. 한편으로는 설익은 러시아어 남용.
외국어를 간단히 배울 수는 없겠지만 가장 쉬운 것이 점잖지 못한 말부터
남용 되기 시작하였다. 그 것이 앞으로 로어가 제대로 보급되면 차츰 순
화되어 가기는 하겠지만 우선 여선규 신경은 불쾌하게 자극했다.
총무과장 동현문이 들어 왔다. 빈손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아 공무는 아
닌 것 같다.
  “안기요”
  여선규는 동 현문에게 위원장 자리 옆의 응접용 의자를 가리켰다.
  “네”
  동현문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여선규에게 예를 표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위원장 동지. 지천만 소식 들었슴둥?”
  여선규는 대뜸 눈이 커졌다. ‘잘못 됐나보다’라는 직감을 하는 것이다
  “아이. 무시래 소식이 있음둥?”
  “치안대장이 직결처분으로 인민재판에 부쳐개지고 치안대 마당에서 여
러사람들이 돌로 쳐 죽엿닥해자이오”
  결국은 그렇게 갔고나. 불쌍하다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너무 간단하게
죽였다는 아쉬움은 있다. 소 돼지를 잡으려도 정해진 규정에 의하여 절차
를 밟아야하는 데, 아무리 악질 친일파라 할지라도 좀더 신중하게 다루어
절차를 밟아 죽여도 죽여야 했다는 생각이다. 여선규는 몸을 의자의 등받
이에 기대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지금쯤 지천만의 영혼이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을까. 여선규는
어느덧 지천만에게서 당했던 폭력… 숨이 탁탁 막힐 정도로 맞었던… 죽
음의 문턱을 넘나들을 정도로 괴로웠던 육체적 고통의 기억은 슬며시 엷
어져 간다. 지천만이 죽었다는 것은 이승의 인연이 마무리 되었다는 것인
가. 고개를 슬며시 들고 옆자리의 총무과장에게 물었다.
  “시신처리는 으찌했닥합데?”
  “화장을 할까 워찌할까르 망서리는데 그 간나새끼으 안깐하가 아들 아
이가 와서 거적떼기에 둘둘 말은 거슬 질질 끌고 갔닥합데 ”
  여선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둘이고 아들은 하나가 있는 것으로 알
고 있다. 지천만의 아내와 아들이 왔었다면 그 아들은 수웅일 것이다. (나
의 둘째아들 재석이와 무산 보통학교 동기 졸업생이니까… 열일곱살이겠
고나. 그리고 지천만은 나의 아내와 무산학교 동기생, 그러니까…… 47살
일 것이다.… 처가는 부령이다. 그의 결혼때의 약간의 파문이 있었음을 기
억한다. 신부의 부친이 목상(木商)이었다. 임산물 취급에 부정이 있었는
데 그 문제를 수사하는 담당이 지천만이었고 그 과정에서 예쁜 규수가 있
음을 알았고 일본인 순사부장의 도움을 얻어 힘들게 결혼이 되었음을 안
다. 반 강제로 이루어낸 결혼이지만 1남 2녀를 낳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죽었다. 일본인 경찰보다 더 악독하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악랄하
게 폭력을 휘두르며 충성을 바치더니… 결국은 힘없이…변명 한마디 못하
고 맞기만하던 동포들에게, 이번에는 네가 변명 한마디 못하고 동족들에
게 모진 매를 맞고 죽었고나.) 여선규는 지천만의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
린다. 모진 매를 맞고 죽었다는 지천만보다는 그 가족들… 유족들에게는
연민의 정이 슬며시 피어 오른다. 몰매를 맞고 죽은 남편과 아버지의 시
신을 끌고 가는 심정, 누구하나 조문하는 사람이 있을리 없고 그래서 장
례에 협조하는 사람이 있을리 없는 고독한 장례… 그 가족들이 얼마나 불
안해 할까. 또 다른 보복행위가 몰려닥치지나 않을까를 몹시 두려워 할 것
이다. (지천만… 너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두들겨 팼지만… 다 끝났다.
제발 네가 지금 가 있는 그 세상에서 만은 절대로 보편적인 양식을 저버
리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그렇게 해서 다음 세상… 저승에는 천당과 지
옥이 있다고 하는 데 과연 너는 지금 어떤 세상으로 가고 있을까가 궁금
하고나. 이승에서의 너의 행적으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천당 가기는 어렵
겠는데 혹 지옥엘 간다 할 지라도 지옥에도 지옥 나름으로 도덕적 규율이
있을 것이다. 제발 염라대왕께 칭찬받을 일만하여서 하루 속히 지옥에서
벗어나도록 하여라. 너 자신의 이득을 위해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인간의 양심을 저버리는 야만적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이
제는 알았겠는데 잊지 말아라. 어느 세계에서도 규율과 의리를 저버려 너
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하면 그 세상에서도 몰매를 맞고 쫓겨 나리라. 어
느 세계에서고 착한 부문은 선한 세계의 공유사항이지만 악한 부문은 악
당들만의 전유사항이다. 명심하여라. 바르게 살아라. 떳떳하게 살아라. 누
구도 배신하는 일이 없이 정정 당당하게 살아라.…… 명복을 빈다.…여 선
규는 슬며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한숨을 쉰다. 그러면서 또 다른 상
념에 휘말린다. 왜 그 지긋지긋한 지천만의 명복을 빈단말인가. 그리고 왜
자신의 가족과를 연결하여 지천만의 가족들을 회상하는 것일까. 불순함이
전염되는 듯한, 일종의 사위스럼이 느껴졌다. 무심결에 도리질이 쳐졌다.
마치 무슨 중대한 문제나 처리하고 난 것처럼… 중요한 고비를 넘기고 난
것처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상하게 허둥그려지는 자신의 심리상태를
안정시키기 위한 동작인지 무심결에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어 두 손을 맞
잡고 기를 모으며 천천이 좌로 우로 돌렸다.
  총무과장이 유심히 여선규의 동정을 살피다가 입을 열려고 한다. 위원
장실에 들어온 이유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여선규를 향해 자세를 고치면
서 넌지시 부른다.
  “위원장 동지”
  여선규도 자세를 고치며 말없이 동현문을 넌지시 본다.
  “어떴소. 요즘 시상돌아가는 거시 어영 수상하재이요?”
  여선규는 우선 고개를 끄덕여 동감임을 알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경성 소식도, 평양소식도, 도시 시원한게 없구마. 두 군데가 다 소란 스
럽기는 한 데 실속이 없는 것 같습메”
  말을 마치며 동과장을 본다.
  “옳소. 그런달쉬 옳소.”
  총무과장은 여선규의 의견에 주저없이 찬동한다. 그리고 조금 멈칫거리
다가 입을 연다.
  “요즘 돌아가는 이상한 소문 들었슴둥?”
  여선규는 조용히 동 과장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연다
  “청진의 공장에서 마우제들이 공장 시설을 뜯어간닥하는 이바구 말임
둥?”
  동현문은 은밀한 이야기인 듯 남의 귀를 조심하는 듯 거북하게 망서린
다. 여선규가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
서야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연다.
  “마우제들이 조선땅의 공장을 헐어 간닥하는 소문은 많소. 흥남 비료공
장도 뜯어개고 원산 성진 청진……로 쓰개들이 가는 곳곳마다 반반한 공
장 시설은 몽조리 뜯어간닥하는 소문이야 조선 사람드르는 다 알고 있는
일이 아이겠음? 내가 이바구 하고작 하는 거스는 길병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락하는데. 그 내용이 우리들과 관련이 있는 말이오. 참 쓰거분 이바구
오.”
  동과장은 말을 일단 멈추고 여선규의 표정을 더듬는다. 여선규의 표정
에는 변화가 없다. 조용히 동과장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일본놈들에게 관리 생활을 한 사람드르는 몽조리 친일파로 규정한답데.
그리구 어저부터의 새 나라에는 깨끗한 애국자들, 노동자 농민들 그리구
무산대중들이 똘똘 뭉쳐서 새 나라를 세워 나간닥합데. 그래서 지금 있는
직원들, 도청이고 군청이고 면사무소고 간에 지금 있는 관리드르는 다시
심사해서 친일파드르는 모조리 숙청하고 임명 한닥합데. 그 심사하고 임
명하고 히는 거스는 새로 구성되는 공산당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로 한닥합
데”
  일단 말을 끊고 동현문은 여선규의 표정을 더듬는다.
  여선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창을 통하여 먼산을 더듬는다. 해방
이후 민주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공산당 등의 말은 여러번 들었다. 그런데
여선규는 만주주의 가 어떤 것인지 공산주의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말댓구도 못하고 망서리는 데 동현문이 말을 잇는다.
  “그대로라면 위원장 동지도 나도 멀지 않아 물러나야 되닝기 애이오?”
  잠시 말을 끊고 또 여선규의 표정을 살피더니 조용히 말을 다시 잇는다.
  “그랗다믄 겡헴도 없구 배운것두 없는 무식한 놈드르 모아 놓구 일으
한다 이거 겠는디 무식한 것드르 모아 놓구 무시래 일으 한다는 문센지
무르겠구마.
  “그렇겠지비. 나로서는 물러나는 것이 불쾌하지는 않지만 친일파로 몰
리는 거스는 불쾌 하구마오.”
  “옳소. 나도 기기요. 일본놈드리 주는 월급을 받았닥해서 몽조리 친일파
락 한다믄 새나라에서 일 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슴둥. 위원장 동지
도 아다시피 경성에가서 중학교르 다니고 와서 바로 군청에서 일 했으니
까니 한 2십여년간 되재이요? 일하고 월급 받았지 일본놈들에게 아부하고
월급받은기 아이재이요?”
  동현문은 지금 당장 파면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불쾌한 어투였다.
  그렇다. 조선땅에 왜놈들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구석이 어디 있었나. 왜
놈들의 입김이 조선의 팔도강산 구석구석이 일본 쪽바리들이 뿌리는 된서
리에 시달리는 초목과 같은 신세였는 데 그래도 생명을 부지하려니 움직
인 것이고 움직이는 길과 방법은 개인의 능력과 의지에 따라 다를 뿐이었
다. 말하자면 방향과 형태가 다를 뿐이었다. 우리들의 생명과 의지를 존중
해 줄 조국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친일파”어쩌고 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여선규는 여전히 먼산을 보며 그저 고개만을 끄덕인다. 그러
면서 청진에 간 아내가 내일 온다. 여러가지 소식과 함께 여선규 자신의
문제에 관련이 있는 소식도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처남의 새로운
출발에 조금 서운한 생각이 든다.
  김남철이 청진에 있는 제철소에서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뽑혔다는 소식
은 엊저녁에 전화로 알려 와서 알았다.“ 노동조합위원장”보다는 사무직으
로 들어 앉았으면 했다.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차츰 경험을 쌓
고하면 그 체철회사의 계장도 되고 과장도 될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
에서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