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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08년 [소설-최재도] 실록 서사지전(鼠蛇之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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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57회 작성일 09-02-0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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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하건대, 한때 이곳은 낙원이었으며, 이곳에서 우리는 더없이 행복했
다. 처절한 투쟁과 격렬한 전투로 이 창고 안의 적을 완전 섬멸하고 쌀가
마를 독점했으니, 진실로 그때 우리는 자유와 풍요를 구가했다.
우리가 단지 잊고 있을 뿐이나, 우리의 역사 중엔 고양이를 패퇴시킨 영
광스런 전과가 있고, 구렁이를 능멸한 자랑스러운 선조가 있다. 그들로 인
해 수십 년 동안이나 우리 쥐들은 이 창고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오오, 동서고금을 통틀어 대체 언제 쥐에게 쫓기는 고양이를 본 적이 있
으며, 어디에서 쥐를 피해 달아나는 구렁이를 찾겠는가?
우리의 선조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구렁이와 싸웠으며 그처럼 헌신적으
로 무리를 지켜왔음에도 오늘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으니, 이 또한 애
석한 일이다. 그때의 구렁이들은 감히 이 창고 안을 넘보지 못했고, 설령
그 중 어리석은 자들이 간혹 침투한다 하여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희귀한
병에 걸려 굶어죽곤 하였다. 구렁이들은 움직일 때마다 방울소리를 내곤
하였으니, 이로 인해 우리 쥐들은 여유있게 피할 수 있었고, 따라서 저들
은 좀처럼 우리를 잡아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구렁이들이 방울소리를
내는 지 아무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었기에 세상이 모두 의아하게만 여겼
으나, 그게 다 선조들이 조화를 부렸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일
찍이 서양의 쥐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는 꿈을 끝내 실현하지 못
했지만, 이 창고 안의 우리 선조는 구렁이 꼬리에 방울을 다는 데 거뜬히
성공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후대에 길이 추앙 받을 만 하다.
하나, 그 신통한 비법은 더 이상 전수되지 않는다. 그 능력은 전쟁을 통
해 얻은 것이고, 그 기술은 낙원 건설을 위해 전수되었던 것이건만, 우리
가 전쟁을 두려워하고 이를 회피하면서 그 영광스러운 전통도 끊어지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은 다시금 누추하고 비참해졌다. 우리는
여전히 어둡고 비좁은 곳을 헤매며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 한다.
아아, 그 시절의 낙원은 정녕 회복할 수 없단 말인가.
내 오늘 그대들에게 우리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선조와, 우리가 가장 행
복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로되, 이는 기어코 그때의 낙원을 회
복해야 한다는 열망 때문이다. 성현이 말씀하시길,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
을 알면 그것으로 스승을 삼을 수 있다 하였거늘, 지금 이 자리에서 그때
의 실록을 강독함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제군들이 이를 경청하여 큰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 서당의 훈장으로서 내 사명은 그것으로 충분하리
라.
<정해년 8월 14일. 집단 도피를 논의했으나, 오히려 구렁이와 싸우자는
비장한 결의로 결론을 맺다.>
120년 전, 우리 쥐들과 구렁이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으니, 이를 다
룬 부분을 발췌한 실록의 첫 대목이 바로 이러하다. 당시에도 이곳은 사
방 오십 리 농토에서 거둔 소출이 모두 집결되는 가장 큰 창고였던 바, 우
리 쥐들에게 있어 이곳만큼 풍요로운 곳은 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창고 안에는 우리 쥐들을 먹이로 삼는 구렁이들도 창궐했기에, 우리는
늘 불안하고 처참하게 살아야 했다. 구렁이의 세력이 날로 드세져 도무지
견딜 수 없게 되었고, 기어코‘임금쥐’까지 시해 당하는 사태에 이르자,
우리 쥐들은 이 창고를 버리고 떠날 것을 신중하게 검토하게 되었다. 무
리가 모여 토론을 벌였으나 그 결론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이 창고 바깥에선 먹을 걸 구할 수 없고, 이 창고 안에는 저처럼 잔악
한 구렁이가 우리를 해치니, 정녕 진퇴양난입니다.”
“소나기는 피하고 볼 일입니다. 이 창고 안 구렁이들의 세력이 날로 드
세 지니 일단 도피했다 돌아오자는 말입니다.”
“마을로 가면 고양이가 괴롭히고, 산으로 가도 족제비와 너구리에게 시
달려야 합니다. 차라리 이 창고 안이 더 낫습니다. 구렁이 밥이 될지언정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당시 이 인근에서 곡식이 보관되어있는 창고는 오직 이곳뿐이고, 자연
이를 훔쳐 먹는 쥐들 또한 이곳에 집중되었으며, 따라서 쥐를 양식으로 삼
는 구렁이들도 이곳으로 꾸역꾸역 모여들 수밖에 없던 터였다. 식량과 천
적의 틈새에서 우리 쥐들은 오도 가도 못할 처지가 된 것이다.
그 때 이 서당의 훈장께서는, 나에겐 먼 스승이 되는 분으로, 당대 최고
의 석학으로 추앙 받고 있었는데, 그는 구렁이들을 이 창고 밖으로 몰아
내기 위해선 일단 그 먹이가 되는 우리 쥐들부터 창고 안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먹이가 사라지면 구렁이들도 떠날 것이고, 그 틈을 이용
해 기습적으로 돌아와 모든 쥐구멍을 폐쇄하면 온전히 이 창고를 낙원으
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리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었
으니, 구렁이들이 굶주림에 지쳐 떠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쥐들 또한
그 이상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인근에서 곡
식이라곤 오직 이 창고 안에만 있고, 따라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곧 굶
주림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하며, 더욱이 창고 밖에는 이곳보다 더 많은
적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쥐들은 눈물로서 이 불
행한 처지를 하소연할 따름이었다.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구렁이에게 시달려야 하는 겁니까? 왜
이렇게 당하고만 살아야 합니까?”
“…어쩌겠습니까? 이 대자연은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얽혀있고,
우리도 그 일원이거늘 어찌 예외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것도 인연이니
오직 따를 뿐입니다.”
훈장께서는 현실을 인정하고 도피를 실행하자고 설득했으나, 이곳을 떠
나길 거부하는 무리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왜 우리는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왜 번번이 피해 다녀야만
하냐 이 말입니다. 왜 구렁이와 맞서 싸울 생각을 못하는 겁니까?”
구렁이와 맞서 싸우자니? 그때만 해도 그런 사고는 우리 쥐들 세계에선
있을 수 없었다. 처음엔 그저 울분을 참지 못해 우발적으로 나온 소리로
만 여겼다.
“옳은 말씀이오! 그토록 오랜 세월 저 놈들한테 당하면서 왜 아무런 방
책을 세우지 못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소. 저 놈들만 없애면, 이 창고
는 지상 최고의 낙원이오. 이처럼 풍족한 곳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소?”
무리 중 가장 덩치 큰 쥐가 나서며 울분을 더욱 확산시켰다. 그 우람한
덩치 때문에‘장군쥐’라고 불리는 이였다. 훈장께서는 무리들이 지나치게
흥분해 자칫 오판할 것을 우려하며 조용히 설득했다.
“저들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
지만 대자연의 섭리가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얽혀 있고, 저들은 우
리의 상층부에 있으니 우리로선 속수무책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달림으로 집단우울증을 앓고 있던 무리들을 대표해‘장
군쥐’는 끝내 그 분노를 표출시키며‘훈장쥐’의 의견에 정면으로 도전했
다.
“훈장님을 존경하긴 하지만, 그런 패배주의적 발상에는 동의할 수 없소.
어찌 우리 앞에 놓인 시련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그토록 도피할 생각만
한단 말이오? 저 잔악한 구렁이들과 투쟁해야겠다는 생각은 왜 못한단 말
이오!”
“어쩌겠습니까? 이 세상엔 온통우리보다 강한 자들뿐인 걸.”
“바로 그 잘못된 의식부터 바로 잡읍시다. 더 이상 피하거나 숨지 말고
당당하게 저들과 맞서 싸웁시다!”
우리가 오랫동안 경험해 온 바, 이런 분위기에선 탄식으로 일관한 자의
주장보다는 공격적 언사를 쓰는 자의 의견이 더 선호되는 법이다. 무리 중
몇몇이 나서며‘장군쥐’의 선동에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장군. 이 악순환을 우리 대에서 끊어야 합니다. 서까래 위
에 똬리를 틀고 웅크리고 앉았다가 우리를 습격해 날름날름 잡아먹는 저
구렁이들을 퇴치하지 않는 한, 우리의 불행은 자손만대 이어질 것입니다.”
“옳습니다. 분연히 일어나 저 놈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이곳에 발붙
일 수 없도록 씨를 말려야 합니다, 장군!”
의견은 일시에 기울어졌다. 어느덧 무리의 지휘권은‘장군쥐’에게 옮겨
가 있었다. ‘장군쥐’는 의연히 무리 앞에 나서며 외쳤다.
“지금이야말로 봉기할 때요! 이 풍요로운 창고 안이 저들 구렁이 때문
에 아비규환으로 변했으니, 우리도 저들을 응징해야 옳을 일이오!”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선언은 무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리
들은 찬동했고 결연하게 행동으로 옮길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군! 대체 우리 쥐들이 어떻게 구렁이를 이긴단 말입니까. 만
용을 부리다 자칫 더 큰 해를 당할까 두렵습니다.”
무리의 맨 끝에서 한‘늙은쥐’가 외쳤다. 이미 무리의 지지를 받아 의기
양양하던‘장군쥐’로선 이 발언이 심히 도전적으로 들렸으리라.
“뭐라 하였소, 지금?”
“창고 밖으로 도피하자는 훈장님의 의견에는 저 또한 반대하나, 아예 구
렁이와 맞서 싸우자는 장군님의 의견에도 동조할 수 없습니다. 쥐가 구렁
이에게 대드는 것은 약육강식의 생태 원칙을 거스르는 것으로, 하늘의 뜻
이 아니니 필시 우리가 지고 말 것입니다. 무모할 따름입니다.”
‘늙은쥐’는 충정에 우러난 목소리로 외쳤으나, 이는‘장군쥐’를 자극할
뿐이었다.
“우리를 옥죄었던 것이 바로 그런 패배의식이오. 하늘은 대담한 자를 돕
는 법. 우리가 지금처럼 비참하게 살고 있는 것은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
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오. 생각해 보시오. 우리가 저들보다 못한 것이 무
엇이란 말이오? 대체 왜 저들에게 쫓겨 다녀야 한단 말이오? 용기만 갖춘
다면, 우리도 밝은 태양 아래 저 너른 길을 당당하게 행진할 수 있을 것이
오.”
‘장군쥐’의 위엄에 굴하지 않고‘늙은쥐’는 자신의 소신을 강한 어조로
피력했다.
“잘못된 소망입니다. 땅 속을 기어 다니는 두더지가 태양을 그리워하지
않고, 어둠 속을 누비는 부엉이가 낮을 동경하지 않거늘, 어이해 우리 쥐
들이 태양 아래 행진하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남이 쌓아놓은 양곡을 훔쳐
먹는 것이 우리의 본분일 진데, 어둠은 당연한 우리의 영역입니다.”
“그건, 용기 없음에 대한 변명일 뿐이오! 우리가 애당초 용맹스러웠다
면 어찌해 어둠 속에서 남의 양곡이나 훔쳐 먹는 삶을 택했겠소?”
“그게 우리가 선택한 최선의 방식입니다. 살상을 피하고 약한 자를 괴롭
히지 않으려는 평화주의적 습성이 왜 지탄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네 삶의 질이 조악해진 것이오! 무릇‘뒷간에 사는
쥐는 똥을 먹고살고, 곳간에 사는 쥐는 쌀을 먹고 산다’고 했거늘, 우리가
이 풍성한 곳간을 두고, 뒷간으로 밀려나 똥밭이나 뒤져서야 될 말이오!
구렁이들을 이 곳간에서 쫓아내고 이곳에 낙원을 건설해 자손만대에 물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 작금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란 말이오!”
당위성에 관한 한‘늙은쥐’의 논리가‘장군쥐’를 능가할 수 없었다. 이
미 무리들은‘장군쥐‘를 지도자로 삼은 상태였다. 무리들은 하나같이‘장
군쥐’의 의견에 동조하며 자신들의 결의를 앞다투어 쏟아냈다.
“그렇습니다, 장군. 우리가 단결만 한다면, 저따위 적은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돌격한다면 마침내 승리하고야 말 것
입니다!”
“우리 쥐들에게서 가장 수치스러운 건, 공포에 찌들려 살아온 우리의 역
사입니다. 우리가 언제 단 한 번만이라도 당당하게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저 어둡고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두려움에 떨며 숨어 살아오지 않았느
냔 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쥐구멍에는 단 한 순간도 볕이 들어온 적이 없다고요.”
“그게 다 저 놈들 때문입니다. 우린 너무 오랫동안 저 놈들한테 시달려
왔습니다. 우리 모두 봉기해야 합니다!”
결론은 분명해졌다. ‘장군쥐’는 열정적으로 구렁이와의 전쟁을 선언했
다.
“동지들이여! 이제 우리는 이 생태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려 하오. 구렁
이가 쥐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쥐가 구렁이를 물어뜯는 걸 당연한 현
상으로 여기게 만들 것이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싸움
을 멈추지 않을 것이오. 승리의 순간까지 처절하게 투쟁할 것이오. 진정한
용사라면, 나를 따르시오!”
<정해년 8월 15일. 적에게 전쟁을 선언하니 이로써 서사지전이 발발하
다. 이 창고 안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다. 사생결단의 자세로 전쟁에
임하니, 승승장구 연전연승하다. 쥐가 구렁이를 능멸하고 고양이를 싸워
물리치니, 세상이 경악하여 말하길, 이는 천지개벽에 준하는 생태이변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창고 안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다. 후대 역
사가들은 이를‘서사지전(鼠蛇之戰)’또는‘서사대전(鼠蛇大戰)’이라 불
렀으니, 곧 쥐(鼠)와 뱀(蛇)이 치열하게 맞선 전쟁이라는 의미이다. 쥐가
구렁이를 공격하는 것은 이 생태계에선 전례가 없었던 바, 당시 세간에선
이 전쟁을‘생태적 하극상’이라 평했다. 쥐가 구렁이에게 대들다니? 아아,
그때만큼 개혁적 사고를 가진 때가 언제 또 있었으랴.
우리는 그때 이 쌀가마 위에서 당당하게 구렁이와 맞섰다. ‘장군쥐‘는
언제나 전면에서 싸움을 지휘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적을 물리쳤다.
“한 마리만 희생하면 된다. 구렁이는 한 번에 한 마리밖엔 삼킬 수 없다.
누군가 구렁이 입에 물려 있는 사이, 우리가 총 공격을 가하면 간단하게
물리칠 수 있다. 누가 나서겠는가?”
‘장군쥐’가 단상에서 이렇게 외치면, 누군가가 선뜻 희생자로 나서기 마
련이었다.
“어차피 병든 놈, 내가 나서겠소. 내가 저 놈에게 잡혀 먹히는 동안, 그
대들은 저 놈의 몸을 갈가리 찢어주시오!”
“장하다! 그대는 우리 역사의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니, 자손만대 칭송
을 받으리라. 자, 우리 모두 저 구렁이를 포위하고 일제히 돌격 할 지어다.
진격하라!”
대체로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연이어‘장군쥐’의 호령이 이 창고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악착같이 달려들라! 달려들어 베어 물라. 물었으면 놓지 마라! 살점을
뜯어내라! 물어뜯으라! 용기에 비례해 우리의 행복도 커질 것이니, 한 치
도 양보하지 말라!”
이렇듯 가미가제식 전투를 벌인 결과, 곳곳에서 승전보가 들려왔다. 구
렁이들은 늙거나 병든 쥐 한 마리를 입에 문 채, 별다른 저항도 못해 보고
우리에게 물어 뜯겼다. 우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고, 이에 구렁이의 사체
가 창고 바닥에 뒹굴었으며, 상처 입은 구렁이들이 황급히 창고 밖으로 쫓
겨 나갔다. 승리는 온전히 우리의 것이었다.
이윽고 우리는 승전가를 부르며 평화와 풍요를 만끽했다. 이제 이 창고
안의 곡식은 모두 우리의 전리품이 되었다. 투쟁 끝에 얻은 승리는 축복
그 자체였다. 축복을 창출해 낸‘장군쥐’에게 어찌 칭송이 쏟아지지 않을
수 있으랴.
“장군의 지도력은 실로 놀랍습니다. 장군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풍요를 만끽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싸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풍요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하면 된다’라는 신념 하에 과감하게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행복은
결단코 얻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군 덕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겁니다.
‘쥐는 구렁이를 공격할 수 없다’는 자연법칙을 우리 당대에 깨부순 것 아
닙니까.”
“생태의 악순환을 우리 대에서 끊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역사와 후
손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습니다. 참으로 보람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적 영웅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영광스럽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었고,
공포에 질릴 이유도 없었다. 창고 안의 곡식은 모두 우리 차지였으니, 아
무리 먹어도 좀처럼 줄어든 양을 가늠할 수 없었다. 우리는 쌀가마 위에
서 마음껏 먹고 놀았으며, 이 창고 안을 종횡무진 당당히 활보했다. 오오,
지상의 행복을 그때서야 비로소 만끽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때 이곳에다 완벽한 이상향을 건설했다. 우리는 그 시절 온전
히 자유를 구가하며 평화를 누렸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노래
를 불렀으니, ‘만포고복 격양가’가 바로 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리 길지 못했다. 적의 반격이 개시된 것이다.
“큰일 났습니다, 장군. 적이 다시 몰려 올 것 같습니다.”
그 날도 풍악을 울리며 연회를 열던 중이었는데, 난데없이‘첩보쥐’가
뛰어 들어오며 이 비보를 전했던 것이다.
“그토록 당했으면 두려움에 떨어야 마땅하거늘, 감히 우리에게 다시 대
항하겠다고?”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이번엔 수십 마리의 구렁이들이 일제히 쳐들어
올 모양입니다.”
“대체, 그 소식은 어디서 들었느냐?”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우리 쥐들이 듣는 법입니다. 제가 직접 듣기
로, 이 창고의 주인마님은 난데없는 구렁이 떼죽음에 어이없어 하며, 온
마을 구렁이와 고양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이 창고 안에 풀어놓을 것이라
합니다.”
일순간 연회장은 그야말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 창고의 주인마님
이 연합군을 구성해 우리를 공격하기로 했다는 것은 우리가 구축한 평화
가 일순간에 깨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군쥐’와 무리들이 당혹해하는 것
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
신만 차리면 살 수 있는 법. 비록 적으로부터 총공세를 당할 처지에 놓였
으나 이를 또 다른 승리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터였다.
“무슨 상관입니까, 장군!”
언제나 호전적으로 전투에 임하던‘싸움쥐’가 나서며 우렁차게 외쳤다.
“어찌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겠습니까. 창고 밖의 구렁이와 고양이들
도 언젠가는 우리와 싸워야 할 적이거늘, 저들 스스로 찾아와 준다니 이
는 쌍수를 들어 반길 일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능력을 천하에 알릴 좋은
기회라 할 것입니다.”
무리들은 침을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구렁이와 고양이들이 아무리 몰려온다 해도, 수적인 면에서 우리를 능
가할 수 없고, 더욱이 용맹스러움에 한해서는 우리를 따를 수 없으니, 저
들을 두려워하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장군쥐’가 흔쾌히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듣고 보니 그렇도다. 자, 나서자. 모두 전투 채비를 하라. 칼과 창과 활
을 챙기고 모두 나를 따르라. 이 잔치의 음식이 식기 전에 적을 퇴치하고
돌아와 다시 먹으리라!”
그리하여 이 창고 안에서는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이
번엔 더욱 치열했고,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구렁이들도
상당히 비장한 각오로 싸움에 임하였기에 이전처럼 맥없이 당하지 않았
고, 이 창고의 주인마님은 어디선가 끊임없이 구렁이와 고양이를 구해 이
창고 안에다 풀어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정해년 9월 4일. 뱀과 고양이와 쥐약과 쥐덫으로 적이 총 공격을 하니,
이로써 아군은 크게 패하다. 도처에 쥐의 주검이 널려 있고 곳곳에서 쥐
의 신음소리가 울렸으니 아비규환이 바로 이곳이었다.>
육중한 창고 문이 열릴 때마다 구렁이와 고양이 떼가 대거 등장했고, 그
때마다 우리는 혼비백산 달아나야 했다. 창고의 주인마님은 응원군뿐 아
니라, 쥐약과 쥐덫을 놓아 저들을 측면 지원했으며, 창고지기들에게 명하
여 우리 쥐들을 일망타진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들의 총 공세로 사태는 역
전되었고 싸움은 장기화되었다. 이윽고 우리 쥐들도 지치기에 이르렀다.
“무릇 전투에서의 패배는 늘 있는 일이다. 적의 세력이 좀처럼 꺾이지
않아 우리가 잠시 고전하고 있으나, 이럴수록 전의를 잃어서는 안 될 것
이다. 자, 힘을 추슬러 돌격할 채비를 하자. 다시 한 번 승리의 영광을 재
현하자. 오와 열을 맞춰 힘차게 돌격하자. 진격의 북소리를 울려라!”
‘장군쥐’는 무리들을 독려하였으나 그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때에
‘늙은쥐’가 다시 나서 적과의 종전을 종용하였다.
“장군, 애당초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생태적 질서를 파괴하는 무지한
발상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거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호. 대동단결해도 승리를 보장하지 못할 진데, 어이해 번번이 딴죽을
건단 말이오?”
“어찌 쥐가 구렁이와 싸움을 벌인단 말입니까. 어찌 쥐가 고양이를 이긴
단 말입니까. 이 피비린내 나는 참상을 보고도 어찌 느끼는 바가 없단 말
입니까.”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선 사소한 희생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법, 단지 승
리를 얻기 위한 과정일 뿐임을 어찌 헤아리지 못한단 말이오.”
‘장군쥐’는‘늙은쥐’의 충언을 묵살하고 무리에게 다시 전투에 임할 것
을 명하였다.
“자, 북을 울려라. 적진을 향해 일제히 돌격하라.”
마지못해 진격의 북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 번을 넘지
못하고 곧 북소리는 멈추었다. 무리 속에서‘진보쥐’가 나서며 이를 제지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날카롭고도 공격적인 어투로‘장군쥐’에게 따졌다.
“장군께선 왜 동족의 희생을 그토록 강요하는 겁니까? 왜 동족을 피비
린내 나는 전쟁터로 몰아넣느냐 이 말입니다.”
“그대도 한 패더냐?”
“우리가 왜 이처럼 스스로 멸망을 재촉해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왜
자해행위를 해야 하는 겁니까?”
“멸망을 재촉한다고, 우리가?”
“이 창고의 주인마님은 구렁이를 총애하고 있습니다. 그건 구렁이가 쌀
을 축내지 아니하고 단지 우리 쥐만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쌀의
임자인 주인마님은 어떤 형태로든 구렁이를 보호할 것입니다. 그런 막강
한 후원자를 둔 구렁이를 공격한 것이 어찌 자해 행위가 아니라 할 것입
니까?”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구렁이는 우리의 원수고, 저들이 이 땅에서
완전 소멸되어야 비로소 이곳이 낙원으로 화할 것이다. 우리는 이 창고를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봉기한 것이며, 우리 모두 목표를 이룰 때까지 투
쟁하리라 다짐하지 않았더냐?”
“장군께서 헤아리지 못한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구렁이는 우리의 원수
가 아닙니다. 더욱이 이 땅에서 완전 소멸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약 장
군께서 끝내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희생은 계속 이어 질 것
이고, 우리의 삶만 황폐해 질 것입니다.”
그 순간 무리들이 술렁대었다. ‘장군쥐’도 크게 의아해하며‘진보쥐’에
게 되물었다.
“무어라 하였느냐?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 하였느냐, 구렁이가? 그게 무
슨 해괴한 소리냐? 우리를 잡아먹는 구렁이가 어째서 원수가 아니란 말이
더냐?”
“구태의연한 사고는 이제 버려야 합니다. 구렁이를 적대시하는 것이야
말로‘비 생태적 관점’이고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바 없는 좁은 식견입
니다. 구렁이가 우리의 동반자라는 걸 왜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까.”
‘장군쥐‘는 어이없어하며 격노하여‘진보쥐’를 나무랐다.
“구렁이가 쥐의 동반자라니? 그런 해괴한 말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무
슨 의미인 지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설명하라!”
“우리 쥐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굳이 무리를 지어
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내 이웃이 모두 죽고 나 혼자만
살아남는다면, 이 창고 안의 곡식은 모두 내 차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
까.”
또다시 무리들이 크게 술렁이었다.
“아시겠습니까, 장군? 내 경쟁자는‘같은 먹이’를 다투는 다른 쥐들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경쟁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개체의 입장에서 보
면, 구렁이는 경쟁자를 제거해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내 경쟁자를 구렁
이가 잡아먹어 주지 않습니까.”
“오호! 어떻게 저런 반역적 발상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동료를 팔아,
자신의 영달을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더냐.”
격분한‘장군쥐’와는 달리, ‘진보쥐’는 더욱 침착하고 당당하게 말을 이
었다.
“냉철해져야 이 난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까놓고 말해, 구렁이가 나
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보장만 해주면, 구렁이는 나하고 동지인 셈입니
다!”
“저, 저런 발칙한! 우리 무리가 자자손손 번영하려면 마땅히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거늘, 어떻게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느냐?”
“무능하고 연약한 자를 도태시키며,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야말로 종족 보존의 정도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이 익히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건 자유경쟁 체제 아래서만 가능하고, 그런 의미에서 구렁이
는 우리의 생존력을 높여주는 실질적 동반자라는 말입니다.”
“어찌 저런 발칙한 자를 보고만 있느냐? 저 자를 잡아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할 지어다!”
그러나‘진보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계속 펼쳤다.
“구렁이는 자신의 먹이가 살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쥐들이 쌀을
훔쳐 먹는 걸 전혀 말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전쟁을
벌인 이래, 저들은 우리를 무차별 공격합니다. 구렁이는 단지 3일에 한 마
리씩 쥐를 잡아먹을 뿐이고, 우리는 그 정도의 희생만 치르면 되었건만,
괜한 전쟁을 일으켜 이렇듯 불필요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장군
의 감성적 발상과 포퓰리즘 때문에 수십 마리의 동료들이 억울한 희생을
당한 거란 말입니다. 장군께서는 제 생각이 발칙하고 이기적이라 비난하
지만, 정작 우리 동족이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낸 건, 바로 장군 때문입니다!”
‘장군쥐’로선 더 이상 인내할 여력이 없었다.
“무엇 하느냐? 당장 저 자를 체포하라!”
하지만‘장군쥐’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대세를 미처 읽지 못했다. 장
군의 지휘를 늘 최일선에서 받들던‘싸움쥐’마저 이미 등을 돌린 상태였
다.
“체포해야 할 자는 당신이오! 장군의 공명심 때문에, 우리 쥐들이 억울
한 희생자만 낸 것 아니겠소?”
‘싸움쥐’의 반란에 일부 무리들이 동조했다. ‘장군쥐’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오호, 어떻게 자네마저 나한테!”
‘장군쥐’는 무리들이‘진보쥐’의 주장에 호응하는 걸 바라보며 악을 쓰
듯 외쳐댔다.
“동료를 경쟁자라 하고 원수를 친구라 부르니, 이 어찌 망언이 아닐쏘
냐? 대동단결해도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을 진데, 저 자의 꾐에 빠져 동료
를 저버리는 것은 결단코 온당한 일이 아니도다. 기필코 후회하리라!”
하지만‘장군쥐’의 호령은 무리의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이제 무
리는 오직‘진보쥐’의 연설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으니, 저런 안목 없는 자를 우리 지도자로 삼
은 것 자체가 불행의 시발이었습니다. 이제 이 지리하고 소모적인 전쟁을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고 평화를 되찾아야 합니다!
이 창고 안의 평화를 위해, 우리의 발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호! 동료 쥐들이야말로‘같은 먹이를 탐하는 경쟁자’임을 깨달았으니,
이제 누가 더 이상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것인가. 이 진보적 성향
의 젊은 쥐는 우리의 패러다임을 또다시 바꾸어주었으니, 전체주의적 시
각이 아닌,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동료나 이웃으로 인식했던 자들은 실제론 경쟁자이고, 지금껏 우리의 적
이라 여겼던 구렁이는 오히려 경쟁자를 제거해주는 우호적인 존재며, 구
렁이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고 전쟁을 일으킨‘장군쥐’는 동족의 희생을
강요한 몹쓸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에 우리 쥐들은‘장군쥐’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이‘진보쥐’를 새로운 지도자로 모셔 새 질서를 세우
기에 이르렀다.
<정해년 10월 5일. 화해를 간청해 전쟁 종결을 허락받다. 그 조건으로
방물 공납을 약속한 바, 이는 곧 저들에게 우리 자신을 스스로 식량으로
바치는 것이라.>
우리의 삶은 전쟁 전에 비해 그 질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구렁이를 피해 다니며 목숨을 부지해야 했고, 더럽고 어두운 곳을
헤매며 저마다 불안에 떨어야 했다.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지켜야 하고,
공포나 불안도 개인의 문제일 따름이었다. 더 이상 집단은 구성원을 보호
해주지 못했다.
고단한 삶이 이어질 때엔 때로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하는 법, 이때의
이 창고 안이 바로 그러했다. 질서를 무너뜨릴 만한 악소문이 돌며 민심
을 악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 쥐가 자신의 일신을 구하기
위해 조직을 배반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문은 당연히‘진보쥐’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혹자는 내가 구렁이
와 내통하고 있다고 험담을 늘어놓고 다닌다 합니다. 내가 어찌 구렁이 따
위한테 목숨을 구걸할 것입니까? 심지어 어떤 쥐들은, 내가 정적들을 구
렁이에게 밀고해 우선적으로 제거하고 있다고 소문을 내고 있습니다. 어
떻게 이렇게 가증스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무리들은 그의 어조에 기가 죽어 아무 소리도 못했다.
“이에, 본인은 이런 혼탁한 소문과 흉흉한 민심을 제거하고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합니다. 훈장님께서 이 새 질서
에 대해 설명해 주실 겁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인 우리‘훈장쥐’께서 어느 사이‘진보쥐’의 정책이론
가가 되어 그를 대신해 한 묘안을 제시했다.
“우리의 적인 구렁이는, 때로 인간에게도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엔 구렁이 동굴 앞에 처녀를 제물로 바친 적이 있다 합니다.
우리도 그 방법을 원용하는 겁니다.”
언제나 그렇듯‘늙은쥐’가 나서 그 진정성을 확인하였다.
“구렁이에게 스스로 제물을 바치자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그것만이 이 창고 안의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대
안입니다.”
“이 보시오, 이 창고 안에 도사리고 있는 구렁이만도 십여 마리요, 구멍
을 통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고양이 또한 예닐곱 마리나 되거늘, 그 많은
적들에게 제물을 바치려면 우리 쪽 희생도 만만치 않을 터이오. 대체 누
구를 제물로 삼는단 말이오?”
“재물을 바치지 않아도 어차피 그만큼의 피해는 발생합니다. 그럴 바엔
합리적이고 공평한 방법으로 조직을 위해 희생할 이를 선발하는 것이 창
고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도자 동지께서, 우리 쥐들은‘동료’이자‘이웃’이지만 그와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하다고 갈파하셨거늘, 이제 와서 경쟁자를 위해 자신을 희
생하라 하면 누가 따르겠소?”
“인간들의 설화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 인도의 어느 작은
왕국의 임금님이 사슴 고기를 무척 즐겼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사슴 사냥
을 나가느라, 국정을 소홀히 했죠. 그러자 신하들은 아예 수백 마리의 사
슴을 잡아다 큰 울 안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제 임금은 산으로 갈 필요
가 없었습니다. 그저 매 끼니 때마다 활을 들고 나가 뜰에 갇혀 있는 사슴
을 한 마리씩 잡아들이기만 하면 되었죠. 그러니 사슴들은 임금이 활을 들
고 나타날 때마다 이리 뛰고 저리 피하며 불안해하곤 하였습니다. 이때 사
슴 무리에‘니그로다’라는 이름을 가진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그가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미리 차례를 정해 한 마리씩 스스로 처형대로 가서 누워
있으면, 임금은 더 이상 우리에게 활을 겨누지 않을 것이요, 우리도 더 이
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라고 말이죠.”
‘훈장쥐’가 그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적절한 사례를 제시하여 무리
의 이해를 구한 후에‘진보쥐’는 그의 제안을 내놓았다.
“우리도 추첨에 의해 순번을 정하자 이 말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따라서 이 창고 안에도 진정한 평화
가 깃들 지 않겠소? 추첨이 공평하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구렁이와
내통했다는 따위의 오해도 사라질 거고.”
이렇게 해서 이 창고 안에선 매일 아침마다 죽음의 추첨이 이루어졌다.
그 날의 제물로 정해지면, 고양이가 출몰하는 구멍이나, 구렁이가 잠자고
있는 서까래 위로 올라가 조용히 기다리다 스스로 그 먹이가 되었다. 아
닌 게 아니라 그렇게 되니 나머지 쥐들은 아주 평화롭게 먹이활동을 할
수 있었다. 배부른 구렁이들은 굳이 쥐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힐 필요가 없
었고, 이로 인해 아비규환의 신음소리는 사라지게 되었다. 추첨은 공개적
으로 이루어졌으며, 대단히 공평하게 진행되었기에 그 누구도 이 새로운
질서를 원망하지 않았다.
<정해년 10월 15일. 지도자가 그 날의 제물로 선정되었으나, 이를 회피
하고자 규약을 파기함에 따라 질서가 무너졌다. 이후 반대세력들을 무마
하고자 지도자는 대안을 제시했으니, 이는 너구리와 협상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견고해 보이는 이 새로운 질서에도 작은 취약점이 있었다. 매일
아침의 추첨에선 누구라도 순번표를 받아야 했으니, 설령 지도자라 할지
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 날 공교롭게도 이 제도를 도입한‘진보쥐’가
그 날의 제물로 결정되었다. 그처럼 당당하던‘진보쥐’도 죽음에 이르러서
는 당황해 했다. 느닷없이 재 추첨을 주장한 것이다.
“왜 무효라는 거예요? 왜 재 추첨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여느 때처럼‘늙은쥐’가 또다시 나서 이를 따졌다. ‘싸움쥐’가 대신 나
서‘진보쥐’를 적극 옹호했다.
“세상의 어느 무리도 자신들이 섬기는 지도자를 희생시키는 예는 없습
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율법은 누구에게도 신뢰받을 수 없소. 어
떤 이에겐 엄격히 적용되고 또 어떤 이에겐 관대하게 적용된다면 누가 그
질서를 따르겠소?”
“그렇다고 우리의 지도자 동지를 구렁이의 먹이로 내 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예외가 있어서는 아니 되오. 지도자라면, 더더욱 규범을 준수해야 하오.
추첨으로 뽑힌 이상 깨끗하게 승복해야 할 것이오.”
이때에‘싸움쥐’가‘훈장쥐’에게 물었다.
“훈장 선생! 사슴 무리는 어떠했었습니까? 설마 사슴 무리도 자신들의
지도자를 임금님의 화살 앞에 갖다 바치는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요?”
‘싸움쥐’딴에는 이미 어용학자로 자리를 굳힌‘훈장쥐’의 응원을 통해
지도자를 구하려는 방책이었으나 훈장께서는 학자적 양심을 버리지 않으
셨다.
“저는 그저 설화에 나온 대로 말씀드릴 뿐입니다…. 하루는 새끼를 밴
암사슴의 차례가 되었죠.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암사슴이 슬피 울자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사슴이 나서, ‘당신은 새끼를 낳은 다음에 오시오.
내가 대신 가겠소.’하고 처형대로 나갔습니다. 바로 우두머리 사슴 니그로
다였습니다.”
“지도자 동지!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바로 이것이오!”
어느 덧 무리의 분위기는‘진보쥐’에게 공격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훈
장쥐’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 뒷얘기는 더욱 감동적입니다. 니그로다 사슴은 온 몸이 황금빛으로,
그 외모가 특히 뛰어나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던 터라, 임금이 무심코 활
시위를 당기려다 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묻습니다. ‘나는 너를 죽일 생
각이 없는데 어째서 여기 누워 있느냐?’그러자 니그로다 사슴이 답합니
다. ‘임금님, 새끼 밴 사슴의 차례가 되었기에 내가 대신 죽으려고 합니
다.’이 말을 들은 임금은,‘ 나는 너처럼 자비심이 많은 짐승을 보지 못했
다. 너로 인해 내 눈이 뜨였도다.’라며 크게 뉘우치고 다시는 살생을 안
했다 합니다. 물론 울 안에 갇혀 있던 사슴들도 모두 풀려났죠. 이 니그로
다 사슴은 훗날 몇 차례의 전생을 거친 후 인간 세상의 부처님이 되었다
합니다.”
이쯤 되자 무리들의 분위기는 급격히 험악해졌다. 리더십을 상실하고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한 우리의 젊은 지도자 쥐는 궁지를 벗어나고자
얼른 잔꾀를 생각해 갑작스럽게 공표해 버렸다.
“아, 아. 정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추진해 오던 프로젝트를 이 자리에
서 공개하겠습니다. 사실 이 비책을 추진할 이는 우리 무리 중에선 나밖
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내 차례를 조금 미루고자 했던 것뿐입니다. 이 제
안은, 우리 쥐들로선‘손 안대고 코 푸는 격’이니 아마도 이보다 더 획기
적인 묘안은 없을 겁니다.”
“대체 그 묘안이 무엇이란 말이오?”
“너구리를 우리의 용병으로 채용할 것이오. 너구리가 우리 대신 구렁이
를 물리쳐 줄 것이란 말이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지도자 동지? 너구리가 무엇 때문에 우
리를 위해 일해 줄 것이오?”
<정해년 10월 20일. 협상은 이루어졌고 약속은 지켜져, 너구리의 보호로
안전을 확보하게 되다. 달콤한 평화가 이어져 모두가 환희하며, 이런 꾀를
낸 지도자 동지를 찬양하다.>
“어쩜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지도자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역시 지도자 동지께선 천재임에 분명합니다. 누가 감히 그런 묘안을 찾
아낼 수 있을 것입니까.”
다시금‘진보쥐’를 향한 무리의 칭송이 이어졌다. ‘훈장쥐’마저도 그의
해박함을 동원해 앞장 서 그를 찬양했다.
“제갈공명의 지략도 이에 따르지 못할 것이고, 징기스칸의 용맹도 이를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도자 동지께서 쓰신 방법은‘이이제이(以夷制
夷)’라는 기법으로,‘ 이 나라의 힘을 빌리어 저 나라를 친다’는 고도의 지
략입니다.”
“하하. 내가 너구리의 힘을 빌어 구렁이를 없애겠다고 했을 때, 여러분
은 아무도 믿지 않았지요?”
‘진보쥐’의 당당함이 다시 이 창고 안을 메웠다. 무리들이 그의 면전에
서 앞다투어 고개를 조아렸다.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지도자 동지.”
“저는 그때도 지도자 동지를 믿고 있었습니다. 궤짝 안에 갇혀 있는 너
구리를 구해주자고 했을 때, 오직 저만이 찬성하지 않았습니까, 지도자 동지.”
“그랬었지요. 궤짝 안에 갇혀 있는 너구리를 구해주면, 우리의 적만 늘
어날 뿐이라고 모두 극렬하게 반대했지요.”
“너구리는 구렁이도 잡아먹지만, 우리 쥐도 즐겨 먹습니다. 그때 우리가
우려했던 건 결코 지나친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단지 우리의 날카로운 이빨로
궤짝을 쏠아 너구리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것뿐이지만, 이후 너구
리는 우리의 적인 구렁이만을 골라 공격했습니다. 너구리라고 어찌 은혜
를 모르겠으며, 더욱이 나와 그토록 단단히 약속을 했으니 어찌 이를 어
길 것입니까. 그럼에도 몇몇 어리석은 동지들은 나를 의심하고 불신했습
니다. 내가 동지 여러분의 반대에 굴복했더라면, 이 창고 안에 이처럼 안
락한 평화가 깃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도자 동지의 놀라운 선견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아직
도 우리의 제물을 구렁이와 고양이에게 바치고 있어야 했을 겁니다. 안 그
렇습니까, 여러분!”
“지도자 동지는 우리의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쥐구멍에 볕들 날’을 만
들어 준 역사의 호걸이십니다!”
때로 잔꾀가 통하기도 하는 법이다. 젊은 지도자 쥐가 자신의 궁색한 처
지를 벗어나기 위해 얼떨결에 제시했던 전략이 운 좋게 성공을 거둔 것이
다. ‘진보쥐’는, 창고 밖 울타리 옆 나무 궤짝에 갇혀 있던 너구리와 담판
을 벌였으니, 그것은 우리 쥐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이용해 궤짝에 큰 구
멍을 내 주어 너구리의 탈출을 돕는 대신, 너구리는 창고 안의 구렁이들
을 제거해주기로 했던 것이다. 사람에게 잡혀 궤짝 안에 갇힌 채 오직 죽
을 날만 기다리던 너구리로서는 이‘진보쥐’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
었으며, 그는 실제 구출된 후 충실히 그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너구리들이 창고로 들락거리며 구렁이와 고양이를 퇴치시키자, 창고 안
엔 또다시 평화가 깃들었다. 우리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안전을 만
끽했으니, 지난 날 구렁이와 벌인 전쟁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남의 피
를 이용해 이처럼 훌륭하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가.
<정해년 10월 25일. 뱀들이 저항을 결심하여, 너구리와 뱀 사이에 전쟁
이 벌어졌으니, 뱀이 이기고 너구리가 패하다.>
하지만 외세의 힘을 빈 평화는 결단코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처음
너구리의 공격에 얼떨결에 당하기만 하던 구렁이들이 전세를 가다듬어 대
항을 시작했고 이는 곧 큰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그 싸움의 결과도 역시
민첩한‘첩보쥐’에 의해 전달되었다.
“지난 밤, 이 창고 지붕 위에서 벌어진 구렁이와 너구리의 집단 싸움에
서 너구리들이 크게 패했다 합니다.”
“패배는 병가지상사요. 싸움이란, 때로 이기기도 하고 때로 지기도 하는
것 아니겠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구렁이 집단에게 패한 너구리 무리들
은, 이제 더 이상 구렁이를 공격하지 않고, 대신 우리 쥐들을 잡아먹고 있
습니다. 이웃 마을 쥐들이 황급히 우리 창고로 대피하고 있는 것 또한 그
런 이유 때문입니다.”
아뿔싸.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무리가 동요했다.
“그렇다면 혹,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겠네요?”
“걱정 마시오. 너구리들은 다른 쥐들은 공격하되, 우리 창고 안 쥐는 해
치지 않을 것이니까.”
‘훈장쥐’가 황급히 사태를 수습하며 나섰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너구리들이 구렁이와 그토록 큰 싸움을 벌였다면, 둘은 서로 경계할 것
이고, 그러니 당분간 충돌을 피하려 하겠지요. 절대로 너구리들은 구렁이
의 소굴인 이 창고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그제서야‘진보쥐’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들으셨소? 이제 안심이 되오?”
<정해년 11월 1일. 뱀과 고양이와 너구리와 창고지기가 총 연대해 공격
하니, 아군은 크게 패하여 멸절될 위기에 이르다. 묘안을 논의했으나 대책
은 없고 절망으로 시름에 빠지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반대였다. 구렁이와 너구리 무리는 자신들의 소모
적 전쟁을 중단하고, 대신 우리 쥐들을 집중 공격하였던 것이다. 구렁이와
고양이와 너구리들로서는 이곳이 그들의 식량창고인 셈이니, 저들의 연합
작전에 우리 쥐들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서 지옥을 경험했으니, 그때만큼 참혹한 정경은 겪어보지
못했다.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에 버금갔고 킬링필드를 능가했다.
“지도자 동지께선, 우리의 질책에 못 이겨, 너구리와 새로이 협상을 해
보겠다며 홀로 떠났다가 이제는 소식마저 끊겼습니다. 너구리에게 잡혀
먹힌 건 지, 아니면 그 길로 도망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지도자로 삼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합
니다, 여러분.”
“누가 이 난세에 지도자로 나서겠습니까? 우리의 젊은 지도자 동지는
얕은 잔꾀를 부리다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고, 직전의 늙은 장군께서는
무모한 전쟁을 벌이다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는데, 그들 말고 또 다른 대
안을 가진 자를 어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정녕 방법이 없겠습니까? 근원적인 대책이 없겠냔 말입니다.”
우리의 통곡소리가 하늘에 울릴 만도 하였으나, 우리를 구원할 그 어떤
조짐도 찾을 수 없었다.
<무자년 1월 16일. 드디어 하늘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어, 고양이 목과
뱀의 꼬리에 방울을 다는 데 성공하다. 이로써 우리는 낙원을 건설하고 행
복을 누리게 되다.>
세차하여‘쥐의 해’라는 무자년이 도래했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황폐
했다. 구렁이와 고양이들은 소리 없이 돌아다니다 기습적으로 공격했기에,
우리는 잠시도 불안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이 창고 안 그 어디에도 안전
지대가 없었으니, 잠들 곳도 먹을거리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어쩜 좋단 말이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이오?”
“쌀가마마다 구렁이들이 올라앉아 있고 쥐구멍마다 고양이들이 지키고
있으니, 우리는 식량을 구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창고 밖으로 도
피할 기회마저 잃었소. 이를 두고‘독 안에 든 쥐’라고 하거늘, 이제는 앉
은 채 죽음을 기다릴 도리밖에 없소. 세상에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겠
소?”
창고 안은 암울함으로 가득 찼고 탄식은 그칠 줄을 몰랐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오. 실행하기가 어려운 것뿐이지.”
이때에 우리의‘늙은쥐’가 저 뒤편에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무리들이 귀
를 세우고 그를 돌아보며 반문했다.
“방법이 있다고요?”
‘늙은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훈장님과 내가 머리를 맞대고 묘안을 찾아보았소.”
무리의 시선은‘훈장쥐’에게로 옮겨갔다. ‘훈장쥐’라면 능히 묘안을 찾
아낼 수도 있으리라
“두꺼비가 어디다 알을 낳는 지 아시오?”
‘훈장쥐’는 침통한 어조로 무리들에게 그렇게 물었다. 모두가 어리둥절
해 있는 사이 그의 발언이 이어졌다.
“두꺼비는 스스로 먹이가 되어, 구렁이에게 잡혀 먹힙니다. 그리고 그
몸 속에다 알을 낳지요. 알은 구렁이의 몸에서 부화되고, 구렁이에 기생하
여 자라다, 종내는 그 구렁이를 죽게 하고 그것으로 먹이를 삼습니다.”
“어미 두꺼비의 살신성인, 감동적이지 않소?”
‘늙은쥐’가‘훈장쥐’의 말을 이어 받았지만 무리들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게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우리도 구렁이 몸 속에다
새끼를 낳자는 말씀이십니까?”
“우리도 누군가 그런 장엄한 희생만 한다면, 무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장엄한 희생? 어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동료를 적에게 제물로 바친 적이 있소.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방법이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소.”
“또다시 누구를 제물로 삼자는 안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습니다. 남을
희생시켜 내 목숨을 연장하는 것만큼 잔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의
생명이든, 누구의 삶이든 다 같이 소중하다는 원칙을 깰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나서겠다는 것이오.”
더 이상의 토론은 부질없다는 듯‘늙은쥐’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종결
시켰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무리를 둘러보았다.
“누구 나를 따를 자 없겠소? 현재 이 창고 안에는 열 한 마리의 구렁이
가 살고 있소. 따라서 우리도 열한 마리의 전사가 필요하오.”
“대체 무슨?”
“일찍이 서양의 쥐들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 적의 출현을 미리 알
아내려 시도했던 적이 있소. 하지만 아무도 고양이에게 다가가 그 목에 방
울을 달 수 없었기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
“우리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저들이 하지 못한 일을
우리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못했으나, 우리는 구렁이 몸에 기어코
방울을 달고야 말 것이오.”
“대체 구렁이 몸 어디에 방울을 달겠단 말입니까? 대체 누가 그 일을
할 것입니까?”
구렁이의 몸이 비록 길다고는 하나 매끈하기 이를 데 없거늘 대체 어디
에다 방울을 달 것이며,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구렁이 앞으로 누가
나설 것인가. 도무지 실현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이 제안을‘늙은쥐’는 태
연히 주창하였다.
“어찌 구렁이 몸에 방울 달 곳이 없겠소?”
‘늙은쥐’는‘훈장쥐’로부터 방울을 건네받더니, 천천히 무리들을 둘러보
았다. 그리고는 방울을 높이 치켜들고 마치 포도 알을 따먹듯 이를 꿀꺽
삼켰다. 무리가 놀라 그에게 물었다.
“대체, 선생께선 왜 방울을 삼킨 겁니까?”
‘늙은쥐’가 조용히 대답했다.
“난 이제 구렁이의 먹이가 될 것이오. 내 몸은 구렁이 뱃속에서 한 끼
식사로 소화될 것이나, 이 방울은 그대로 그 놈의 몸속에 남아, 움직일 때
마다 소리를 낼 것이오. 여러분은 그 방울 소리를 듣고 미리 피할 수 있을
것이니, 더 이상 구렁이에게 잡혀 먹히지 않을 것이며, 종내는 구렁이 또
한 굶어죽고 말 것이오.”
일순간 창고 안엔 적막이 감돌았다. 잠시의 침묵 후에 무리들이 술렁대
기 시작했다. 몇몇 의협심 강한 젊은 쥐들이 뒤를 따랐다.
“오호,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다면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선
생과 함께, 방울을 삼키겠습니다.”
“적이 있는 곳에 늘 제가 있었거늘, 어찌 방울을 물고 적진을 향하는 데
망설일 것입니까. 저 또한 이 한 몸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첩보쥐’를 비롯해 몇 마리의 자원자로 결사대가 조직되자‘늙은쥐’가
이들 대열의 맨 앞에 섰다.
“자, 이제 구렁이에게 방울을 달러 떠납시다. 고양이에게도 방울을 선사
합시다. 우리는 비록 이 몸과 더불어 이승과 작별하나, 방울소리는 그대로
남아 우리 종족을 지켜 줄 것이니, 우리야말로 자손만대의 번영과 함께 영
구히 남을 것이오!”
…이것이 서사지전의 결말이다. 1승1패의 이전 전투와는 달리, 이번 세
번째 전투는 외형상 대단히 평온하게 진행되었다. 이렇듯 몇 마리의 희생
자가 방울을 삼킨 채, 스스로 구렁이의 뱃속으로 기어 들어가 장엄한 최
후를 맞음으로써 조용히 종료되었던 것이다.
그 이래 구렁이들은 움직일 때마다 방울소리를 내었고, 우리는 민첩하
게 대피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구렁이들은 모두 굶어죽고 말았다. 집단
을 위한 현명한 희생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이 창고 안에 구축할 수 있
는 유일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그 전통은 한동안 이어졌으나, 언제부터인가 개인주의적 생존방식이 다
시 선호되고, 게다가 전쟁에 대한 두려움마저 생겨나, 더 이상 방울을 삼
킨 채 구렁이나 고양이에게 스스로 잡혀 먹히는 용사를 만날 수 없게 되
었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하노니, 작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빛나는 선
조의 지혜를 복원하고, 그 거룩한 희생정신을 부활하며, 끈끈한 단결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곳에 바로 우리의 낙원이 있나니, 그곳에 이르면 우리
쥐들도 더 이상 어둡고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두려움과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니라. 밝은 태양 아래 저 큰 도로를 당당하게 행
진하던 그 시절이 정녕 그립다면, 제군들 또한 그 지혜와 희생을 따를 지어다.
(『한국소설』2008.2. 재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