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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08년 [수필-서미숙] 사십 오 페이지의 투명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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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54회 작성일 09-02-0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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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끔 공상을 했다.
어릴 적엔 투시할 수 있는 안경하나 갖고 싶었다.
투명인간 만화를 보면서 난 안경으로 그 투명인간을 대신하고 싶었다.
사람을 잘 알지 못하는 난 헛똑똑이라고 엄마가 늘 말씀 하셨다.
선배 언니한테 돈 빌려줘 못 받기 일쑤고, 지나가다 물건 사라고 꼬시
면 잘 산다.
겨울에 돌아다니는 행상인들도 춥다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해 속아서 물
건사고, 전도하는 사람 불러들였다 끈질긴 설득에 곤혹을 치른다. 남들이
날보고 사람을 잘 볼 줄 모른다고 한다.
이래 속고 저래 속고, 그래서 상처받고, 남자도 여자도 그 사람의 속을
잘 드려다 볼 줄 모른다.
친구들도 그랬다 넌 어떻게 그렇게 사람 볼 줄을 모르냐고?
옷을 사도 어디가 잘못된 거 사가지고 두 번 걸음하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투명안경이다.
남의 마음을 투시 할 수 있는 투명안경 그 역시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
다.
그런데 그렇게 헛똑똑이라고 놀림을 당해놓고도 사십이 넘기기 전 까지
가끔 그런 공상을 했다.
상대를 모를 때 답답함으로 투시 할 수 있는 안경하나 갖고 싶다고, 누
구나 다 그런 맘을 가질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정말 알고 싶을 때가 많다.
친구를 사귀어도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주지 않는 사람들이 내곁에 와
있었고 난 그들을 위해 정성을 다한다,
그러다 그들과 연루되어 귀에 들리는 이상스런 말들 때문에 난 고민에
빠져 헤맨다. 나는 이미 마음을 주고 있는데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을 구별할 줄 안다. 그리고 그런
사람 곁에 가까이 가지 않는다.
내 맘속에 투명안경이 생긴 것이다.
상대가 무슨 이야길 하는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훤히 보인다.
왜 진작에 보이지 않고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아는 것일까?
정말 나는 헛똑똑이 일까?
정작 내 할 일이 많이 있어도 밖에서 누군가 부르면 나가서 도와주고,
집에 돌아와 내 할 일을 못해 발을 동동 구른다. 남일 봐주다 손해도 많이
봤다.
그런데 이젠 거절 할 줄도 제법 안다. 아니라고 할 줄도 안다. 세상 사
는 법을 안 걸까?
점점 내 손해 보는 일도 안하려 한다.
생전 남는 거 챙기지 않던 물건들도 어느 순간부터 챙기기도 한다.
실상 어디서든 경품을 주면 그리 욕심내지 않았다.
타도 그만 아니 속으론 내심 탔으면 했고 결코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몇 년 전이다.
야유회모임 행사에서 경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생전 나서지도 못하는 훌라후프 대회에(사실 집에선 그만 돌리라 할 때
까지 돌렸건만) 나섰다. 훌라후프 3개로 돌리려니 되지는 않았다.
경품 때문에 남들 하나씩 타가니 속도 상했고 기분이 영 싫었다. 더운
날 짜증도 났고 딸에게 나가서 뭐라도 하나 타자고 눈도 흘기고, 결국 선
풍기 하나 손에 쥐고, 도서상품권 뽑히고 신이 났다. 차 트렁크에 가득 스
케치 도구가 있어 자리가 좁아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남은 음식 다른 사람이 챙겨가는 모습을 보고
는 참 부러운 모습으로 그들을 대했는데 오늘은 내가 열심히 동원해서 주
위 사람들을 싸줬다. 제일 연장자 언니가 남은 술을 인심 쓰듯 내게 건 낸
다. 언니 나 술은 필요 없어 하고 예전 같음 사양했을 터“그래 이리 줘
봐, 야 ~이거 너 가져가라~”얻어다 남에게 인심도 쓰고 물론 나도 수
박 한 통 끙끙거리면서 챙겼다.
야유회 끝나고 나니 비가 쏟아졌다.
주차장에서 무거워 못 들겠다고 아들 녀석 보고 내려오라 했다.
나를 보고 피식 웃는다.
‘엄마도 이럴 때가 있어요?’“나도 별일이다. 그래”
말없이 씨익 웃고 내가 챙겨온 물건 비맞고 끙끙대며 들고 간다.
선풍기 한대 아니 에어콘 한대 놔달라고 인터넷 여기저기 뒤져보던 녀
석에게 너무 비싸다고 대신 선풍기 한대 안겨줬다.
굉장히 좋아 하면서 자기 방으로 끌고 간다.
나도 좋았다.
선풍기 한대 그리고 수박 커다란 한 덩어리 우리는 그걸 보고 실실 웃
었다.
공짜가 그렇게 좋은걸 그때 알았다.
지금도 경품 타는 일이면 때 맞춰 응모 한다. 몇 일 전에도 응모해서 화
장품 세트 탔다.
예전 같으면 있어도 꺼려했던 일들을 이젠 서슴없이 한다.
서울에서 살 때 백화점 세일에 머리를 디밀고 경쟁을 부르는 아줌마들
을 보곤 뒷전에 물러나 낄 엄두도 못 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도 서울 가면 경쟁자 물리치면 하나 건져온다
마트에서 반짝 세일 하는 물건 못 사면 그렇게 속상해 한다. 나까지만
해 달라고 사정해서 겨우 우겨서 하나 받아오기도 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
정찰제인데도 값을 깎기도 한다. 직원이 첨 봤단다. 그래서 깎아 준적도
있다.
마트에서 누가 남기곤 간 자판기 커피 잔돈으로 후배랑 공짜 커피 먹고
엄청 좋아 했다. 눈으로 보고 웃었다. 그렇듯 눈으로 이야기해도 무슨 이
야기 인지 안다.
나에게도 이젠 투명 안경이 생겼다.
사십 오 페이지 두꺼운 투명 안경인데도 잘 보인다.
목소리만 들어도 난 그의 마음과 생각을 투시한다. 내 눈 속에 투명안
경이 씌어져 있다. 한 십분만 상대와 이야기해도 그가 어떻게 사는지 그
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낸다.
한번은 마트에 가서 옷을 고르다 그 집 주인과 이야기 하다 두 시간을
보낸 적 이 있다.
내가 너무 그의 맘을 잘 안단다. 어떻게 그렇게 말이 쭉쭉 다 맞냐고
처음 본 나한테 속속들이 자기 속내를 보인다. 돌아서서 내가 왜 이렇지
언제부터 이런 푼수가 되었나, 자신을 돌아본다. 그러나 글썽글썽 하던 그
들의 눈이 투명하게 밝아 질 때는 나도 행복을 느낀다.
하도 상대를 모르다 보니 여기저기 책을 뒤져보다 오행음향으로 보는
사주 책을 보게 되었다. 그때 상대를 알려면 이 공부도 괜찮겠다 싶어 파
고든 적이 있었었다. 재미로 본 것인데 상당히 살면서 많은 도움을 주는
같아 공부했었다.
우리 사람에게는 각각 자기 사주가 있다.
사주란 네 개의 기둥이이란 뜻이며 사람마나 타고난 생년월시를 네 개
의 천간과 지지의 조합으로 구성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사주(四柱)라고
하는 것이다.
사주 학에서 보면 오행과 천간 지지 이렇게 있는데 오행은 목,화,토,금,
수 이 다섯 가지가 우주만물을 뜻하며 천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 임계가
있고 지지에는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가 있는데 사람
마다 연월일시에는 각각 네 가지 동물을 갖고 태어난다.
그 지지에는 삼합과 원진이 있다. 삼합은 해묘미, 인오술, 사유축, 신자
진으로 되어있고 원진에는 자미, 축오 ,인유 ,묘신, 진해, 사술이 있는데 여
기서 삼합의 관계라면 서로 만나서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서로 단점을
보완해주며 장점을 키워주는 작용을 하는데, 원진으로 만나면 서로 헐뜯
고 방해하고 서로 원한을 사게 한다.
그래 상대가 괜히 주는 거 없이 밉고 눈에 거슬리면 그 상대와는 원진
이 낀 것이다.
그러나 왠지 상대가 주는 거 없이 예쁘고 좋고 자꾸 만나고 싶어지는
것은 삼합이나 이합이 있어 그런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래 언젠가 부터는 자꾸 생년월일을 물어본다. 그리곤 집에 와서 대충
그 사람 사주를 풀어본다.
음향오행으로 사주를 풀면 그 사람의 성격, 그 사람이 대충 살아온 풍
경과 그 외 것들이 이상스럽게 맞는다. 이것은 통계학적으로 푼 것이기 때
문에 무속인들이 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저 사주이구나 하고 생각만 할뿐인데 신기하게 들어맞는다.
그래 그 상대를 조금 안다고나 할까, 더 조심스러워지고 이런 면에선 내
가 양보해야 하고 저런 면에선 내가 우겨야 하고 하면서 상대를 대한다.
그렇다고 다 만나는 사람들 마다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나와 어느 정도 절친한 사이로 발전되면 한번 정도 알아본다는 것이다.
집에서 레슨을 하다 보니 우리 집은 늘 오픈되어있었다.
자주 학부형들이 오고갔고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갔었다.
그러면 잘 받아주고 하니 한번은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다.
남편이 속을 좀 썩인 모양이다 낮이고 새벽이고 질질 짜면서 전화를
해 대었다.
처음에는 이야기 저이야기 해주면서 위로도 해주었지만 결국 남 부부
일들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실컷 내 이야기를 듣고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보채면서도 내 말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내게 하소연을 할뿐이다 내가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를 바
라지 않는다.
그것을 이제는 안다. 진작에 알았다면 그 긴 시간들을 그렇게 헛되이 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오지랖 넓게 수다를 길거리고 어디서도
해 대지만 어느 선에서 딱 멈추고 만다. 어디까지만 해야 하는지 알기 때
문이다. 내가 영악스러워 졌다.
이렇듯 이젠 오지랖을 넓히면서도 내가 멈추어야 할 시간을 안다.
그들이 어떻게 내게 이야기 하는지 다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은 아니 자주 그 투명 안경이 없어도 속내를 들어 낼 수 있
는 사람들과 세상을 살고 싶다.


뚝방길


가끔 난 뚝방길에 앉아 누렇게 익은 벼와 그 뚝방길 가에 핀 노오란 들
국화, 코스모스를 즐겨보곤 했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자주 아파 미실이, 비실이, 말라깽이, 미숙아, 미숫가
루 별명을 갖던 난 여럿이 노는 것보다 늘 혼자 뚝방길에 앉아 그 노아란
들국화랑 이야길 했었다.
잡초 속에서도 꿋꿋이 자라는 그 노오란 꽃이 참 부러웠었다.
예쁘기도 참 예뻤지만 친척 오빠들이 코스모스처럼 갸날프다고 해 하늘
하늘하다고 날아갈 것 같다고 하는 그 놀림도 싫었고 보기는 예뻐 보여도
손으로 툭 치면 떨어지는 꽃잎도 싫어 노오란 들국화를 더 좋아했었다.
어릴 적 뚝 방 길을 거닐며 살던 우리 동네 그 뚝 방은 없어지고 새 길
이 생겼다. 여기저기 높다란 아파트들이 생겨나고 불빛 현란한 도시가 되
면서 나의 그 뚝 방길 은 없어져버렸다.
30여전을 잊고 살았던 그 뚝 방길 요즘은 자주 본다.
방과 후 수업을 가기 전 일찍 길을 나선다.
카메라들 들고 여러 컷 찍느라 새로 산 부츠도 진흙탕에 빠져도 난 그
뚝 방 길을 따라 어릴 적 꿈에 젖어 행복한 마음으로 걷는다.
언젠가 어느 학교 뒷동산에서 들국화를 보며 좋아라 했었다. 아는 후배
는‘이구 서울 촌닭’하면서 개망초 라고 알려주었다. 아직 난 알지 못한다.
내가 좋아했던 그 들꽃이 개망초 인지 들국화 인지 쑥부쟁이 인지 확실히
나도 모른다. 그냥 들에 흔하게 피어있던 노오란 색 들국화 였다고 생각
했었다.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그것이 들국화 인지 개망초 인지 쑥부쟁이
인지 난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들국화 였던 것 같은데…
그래 살면서도 난 자주 현관 입구에 국화꽃을 사다 그 향기를 맡고 했
었다. 그래서 인지 향수도 은은한 프로랄 향기를 좋아한다.
어려서 혼자 놀던 내 놀이터 그 뚝 방 길의 추억이 아니, 내 안의 것을
나누던 들꽃이라 그럴까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 내가 어느 뚝 방 길에 그
들국화향기를 맡으며 놀던 꿈을 그런데 꿈속에서도 보면 잘 놀다가 그 비
포장도로를 포장하는 모습이 보인다. 커다란 포크래인, 인부들의 모습, 커
다란 덤프트럭에 자갈들이 잔뜩 실려 있고 요란한 괭음을 내며 비포장도
로를 감추고 있는 모습 그 한쪽은 덜되어 조심조심 반쪽 비 포장도로를
걷다가 깨곤 하는 데 아마도 그 뚝 방 길에 대한 미련 때문이니라.
하긴 우리나라는 특히 도로를 여기저기 맨 날 뜯고 부수고 한다,
가끔은 돈이 제일 많은 나라가 아닌가 하기도 하고 혼잣말로 멀쩡한 도
로를 늘 부수고 다시 만들고 한다고 푸념을 하기도 한다.
여기저기 공사들로 거리는 불편하니 난 그것을 돈이 많아 그 흙구덩이
를 파고 메꾸고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내가 살던 예전의 집은 흙 마당이었다. 지금 다니는 성당 마당도 흙이
었다. 평일은 먼지가 많이 나고 비가 오면 그 흙탕물로 차는 더러워지고
옷에 혹여 묻기라고 하면 빠지지도 않는다. 질퍽질퍽 불편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흔한 흙 마당은 보기 어렵고 흙집 흙 색깔의 향토도
보기 힘들다.
난 참 꿈도 많았었다.
내가 집을 지으면 향토색으로 흙 담과 구들방으로, 온통 흙으로 지은 집
에서 살겠노라고 했다. 다들 미쳤냐고 하지만 그 꿈은 아직도 변함이 없
다. 더구나 요즘 웰빙, 웰빙 하면서 흙으로 집들을 짓느라 한동안 유행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러면 날 놀리던 친구들에게‘봐봐’난 다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큰소리 치기도 했었다.
향토찜질방, 머드팩도 유행했고 그렇듯 흙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난 어릴 적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으니 나야 말로 순수한
토종 웰빙 족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쇳소리 나는 아파트 안에서 쇠를 굴
리며 시멘트 도로를 주행하며 살고 있다.
언젠가부터 내 몸이 이상해졌다.
다리에 벌래 물리듯 발갛게 부어오르더니 만지면 너무 아프다
한두 군데도 아니고 하도 여러 군데 나다 보니 처음에는 뭔 모기가 이
렇게 나를 물었나 싶어 계속 약만 발랐었다. 그런데 낫지 않고 자꾸 부위
가 아프고 그것이 나면 미열도 있고 오래 서있기도 힘들고 맥알 머리가
없곤 했다.
팅팅 부어 있는 다리를 보고 이상하다 싶어 내과를 가 검사를 해보고
나중에는 피부과를 가보니 자가 면역증이라는 요상한 환경문제에서 빚어
지는 병에 걸렸단다.
면역성이 떨어지면서 얻어진 병, 꼭 무성하게 4월의 벚꽃이 피는 날이
면 난 그 병에 걸린다. 약을 오래 먹다 보니 살이 찌고 안 먹으면 힘이 들
고 남들은 나이 살이고 살이 쪄서 좋다고 하지만 난 약으로 찐 이 살에
더 서글프다.
조금만 힘들게 일하면 팅팅 다리는 붓고 미열이 나면서 감기인 듯 약간
의 기침과 그리고 다리에 모기가 엄청 물린 듯 생기는 반점들, 늘 긴 치마
를 입고 다녀 공주병이라고 놀려대어도 난 어쩔 수없이 다리를 내놓지
못하고 다녔다.
내가 아끼고, 아끼고 두었던 예쁘고 짧은 치마를 못 입은 지 3년이다
해마다 그 병에 시달려 몸살을 앓고 고된 날은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한
다.
그러는 나에게 누가 보면 늘 게으르다 할 것이고 아침에 눈을 뜨지 못
하는 병자 아닌 병자인 나 오래 걷다가 힘이 들면 주저 않아 쉬면 뭐가
힘드냐고 무늬만 삼십 몸은 육십이라고 놀리던 그때도 난 아팠었다
오래도록 걷기를 좋아했던 나, 서울서 살면서 내 아지트인 곳 광화문에
서 종로까지 그 동네를 걷고 걸었던 나, 유난히 걷기를 좋아하는 난 이제
오래 걷지도 못한다.
‘운동도 심하게 하지 마세요’, ‘힘들면 무족 건 쉬세요.’‘큰일 납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그 놈이 내 몸을 돌아다니다 나의 가장 약한
부위에 가서 염증을 일으키는 무서운 병 아닌 병에 난 해마다 시달린다.
보기에 멀쩡해 보이고 알게 모르게 약을 달고 사는 난 하루가 힘겹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던 내 몸, 언제 가 부터 약으로 인해 살이
찌니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약을 끊어 견디어 보려고 하지만 힘들다.
이 모든 것이 환경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산화탄소의 양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대기층이 두꺼워지고 산소의 양
이 점점 줄어들고 온통 도시는 대기오염으로 어둠에 쌓인다.
열대하가 생기며 한류에 살던 명태는 이미 멸종 된지 오래이다. 서해안
에서 오징어가 나와 서해에서 오징어잡이가 난리를 치며 세상이 뒤집히고
있다.
여기저기 환경운동가들이 나서 대기오염을 줄이자는 운동을 펼친다. 그
러나 이미 지구는 병들어 가고 있음을 우리는 지금 느끼고 있다.
난 쓰레기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환경오염의 피해
자의 선두자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과학기술의 발달로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은 증가 했다.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움직임을 더 많이 설명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자
연이 파괴되고 있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다.
분리수거 반드시 지켜야 할 기대로 이것을 어기면 벌금을 물어야 할 상
황이면서도 우리의 자연 지킴은 어렵다.
이제는 환경문제가 국제화로 번지면서 지구지킴을 확대하고 있고, 급속
한 경제발전의 산물로서 대두되고 있지만 아직도 미지수이다.
너나 나나 그 분리수거만 제대로 진행되어도 좋으련만 내 맘일까?
다들 이 지구에 살지 않는 걸까? “우리지구가 죽어가고 있어요.”더 몸
으로 나처럼 실감해야 지구를 지키려는 맘이 더해질까?
푸른 들판에 시시 때도 없이 계절을 모르고 피어난 들꽃들 보기보다는
제 계절에 맞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들국화, 코스모스들을 보고 싶다.
하긴 요즘은 2월이면 개나리는 이미 다 피고 피어야 할 4월쯤이면 이미
져버린다. 이것 또한 환경문제가 도와준 셈이다.


정현이


야외학습을 했다. 아이들이 좋아했다. 문득 정현이가 생각났다. s 중학교
갔다고 한다.
작년 겨울 마지막 수업 때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선생님 가? 선생님
가?’, ‘정현이도 가 ’하면서 한 열 번은 이야기 했다. 한번 안아주고 중학
교 가서 잘 지내 했더니‘네~’하면서 갔다. 그러나 또 다시 돌아와 전화
번호를 물었다. ‘전화해, 전화해?’하면서 쪽지를 꼭 쥐고 가더니 아이들
다 보내놓고 교실 정리하다 보니 쪽지가 떨어져 있었다. 뭘 잃어버리면 앙
앙거리며 울던 아이 정현이, 많이 울었을까? 맑은 하늘 아래 이렇게 이젤
을 펴고 있으니 정현이가 보고 싶다.
천사 같은 아이 그 아이 눈은 늘 맑았다.
교육청 순회강사로 등록되어 첫 수업을 하던 y초등학교, 내가 여기 속
초에 처음 이사와 우리 아이들을 전학시킬 때의 그 시골학교, 바다냄새가
나던 신록이 푸르던, 그 시간이 생각났다.
y초등은 숲속에 숨겨져 있었다.
작은 마을이 있는 숲 속에 살포시 숨겨져 있는 학교, 그 아이들과의 첫
만남은“휴우”였다. 그림이라곤 접해보지도 못한 아이들 더구나 전교생 35
명을 수업하기는 너무나 벅찬 인원이었다.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숨이 나
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업을 진행해야 할지 난감했다. 너무 많은 아이
들이라 걱정스러웠고 많이 힘들었었다. 전교생이 35명인 작은 학교 누군
빼고 안 빼고 할 수 없다고 하여 다 가르쳤다. 교장선생님 또한 시골 아저
씨답다. 양복차림을 거의 본적이 없다. 늘 일하시느라 작업복이다. 처음엔
교장선생님이 아닌 줄 알았다. 받아쓰기가 안 되는 아이들 붙들어 놓고 한
자 한자 가르치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정말 아름다운 학교이다.
여기에 정현이가 있었다. 약간 부진아이다. 처음 그림은 온통 검정색으
로 그렸다. 그리고 3개월 후는 온통 파랑색으로 그렸다. 그리고 몇 개월
후는 빨강색, 그리곤 1년 후 색을 쓰기 시작했다. 고학년이라 4B연필로 그
린다 했더니 철저하게 준비하며 자신도 고학년이라 연필로 그리겠다고 했
다. 아버지가 사준 이젤을 자랑도 하며 너무 기뻐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출석을 부를 때 이름을 안 불러주면 잘 되지 않는 발음으로 내게 와서
“정현이 왔어요.”한다. 천사 같은 아이였다.
난 정을 많이 준다.
그래서 아이들과의 헤어짐은 눈물바다가 된다.
언젠가 문화의집에서 미술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처음에 말도 안 듣고 삐딱했던 아이들 헤어짐 앞 에선 날 붙들고 엉엉
운다.
아마도 내가 다신 못 올 걸 알고 말이다.
멀어서 다시 갈수가 없었다. 먼 곳 명파까지 갔으면서도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밖에 없었다.
너무 울어서 아이들을 떼놓기가 힘들었다.
편모편부에서 자란 아이들, 정이 굶주린 아이들, 그 아이들은 나의 작은
사랑들을 너무도 크게 받아들인다.
그 다음부터 정을 주지 않기로 하다.
그래도 난 또 아이들에게 정을 준다.
아이들을 보면 너무 예쁘다.
젊은 시절에도 유난히 아이들이 잘 따랐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결혼을 해서도 남의 아이들이 온통 우리 집에 한방을 차지했었다.
늘 먹이고 더러우면 씻겨서 보내고 엄마들은 고마워했고 좋아했었다.
서울에서 살 때 아래층에 미용실이 있었는데 아기엄마들이 머리를 하러
오면 머리위에 뒤집어 쓴 자기 엄마의 두건을 보고 아이들은 막 울기 시작한다.
걷잡을 수 없이 울어댄다. 자기 엄마가 이상하기 때문에 보고 또 보고운다.
그러면 미용실이 아수라장이 된다.
그럴 때 마다 미용실 언니는 날 귀찮게 했다.
아이들 봐달라고 신기하게 그렇게 울던 아이들은 내 품에 오면 새근새
근 잤다.
오죽하면 동네 부부교사가 애 봐달라고 그 당시 꽤 많은 돈을 주겠다고
두 달을 쫓아 다니며 사정한 적이 있다.
나야 그땐 돈 벌 이유도 없었고 내 취미생활인 수영을 열심히 배우러
다닐 때라 거절을 해 그를 볼 때 마다 피해 다닌 적이 있었다.
조카들이 어릴 때도 한번 씩 서울 가면 동생네를 돌아야했다.
내가 목욕시켜주면 뽀얗다나? 아이 목욕시키면서 온 거실을 난장판을
하고 있어 난 비켜보라고 하고 애를 번쩍 들어 안고 목욕탕으로 바로 데
리고 들어가 십 분 만에 씻겨가지고 나왔다. 두 부부가 기절하듯 날 쳐다
본다. ‘언니, 처형 그렇게 쉽게 시키는 목욕을 우린 전쟁을 해요’한다. 그
래도 자기네가 난리를 치며 시킨 거 보다 뽀얗다나 뭐라나 하면서 약을
먹여도 전쟁 난“이리줘봐”하면서 아이를 내 가랑이 사이에 넣고 울리지
도 않고 후딱 약을 먹였다. 한 시간을 씨름하면서 반은 버리고 옷이고 뭐
고 젖고 하는 약 먹이기 운동이 난 일분이면 끝냈다.
밥도 잘 안 먹던 아이도 내가 일주일 데려다 키우면 잘 먹고 통통하게
키워서 데려다 준다.
늘 신기했다고 했다.
오죽하면 동생네는 속초에 내려오면 지 친구들까지 동원해 꼬맹이들 8
명을 내게 맡기고 지들은 콘도에서 논다. 그리곤 하루만 재워달라고 한다.
같이 놀러오면 전쟁을 치루는 아이들, 그런데 내가 하루 밤 데리고 자
는데, 아무 일도 없이 잘 놀고 하니 몇 번 전화오더니 아옌 첨부터 맡기고
지들은 놀기 바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내가 키우면 살이 찐다.
아무도 엄마 외는 안지 못했던 후배의 아이, 같이 놀러 갔는데 엄마가
꼼짝을 못했다. 한 시간을 우는데 내가 달려가 달라고 했다 소용없다고 하
면서 계속 아이들 울리는게 시끄러워서 그러니 달라고 강제로 아이들 뺏
어 내 품에 안겼다. 십 분 만에 잠이 들었다. 다들 환호성을 지르면서 나
의 아이 달램을 칭송했다. 정말 이상했다.
에레베타에서도 아이는 날 보고 실실 웃고 지나가는 아이들도 날 보고
웃는다.
엄마들이 으아 해 하면서 내게도 인사를 한다. 그렇게 별일이었다.
내가 이 아이들을 돌 볼일을 하려고 그랬나? 신기하기도 했다.
지금도 수업을 가면 졸졸 부대가 나를 따른다.
큰 아이지만 유독 정을 주던 아이, 남들과 달라서 그랬을까 인사할 때
꼭 나와 눈을 마주쳐야 가는 아이, 내가 대답을 할 때까지 인사하는 아이,
그 천사 같은 아이가 자꾸 요즘은 생각난다.
많이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아이들도 많이 영악스러워지고 순수함도
잃는다.
벌써부터 노랑이짓을 하고 머리를 굴리며 내가 알던 예전의 아이들의
모습을 점점 잃는다.
눈치만 보고 말대꾸하고 지 맘에 안 들면 선생님을 노려보기도 한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한 아이가 하도 말썽을 피워 나가라고 했다. 내가 벌
을 주는 대신 어깨를 주물러준다고 했다. 목덜미 어깨 쪽은 근육이 뭉쳐
힘을 주면 엄청 아프다. 어깨를 주물러주니 자지러진다. 눈물이 글썽하면
서 나를 노려보더니 내게 크레파스 조각을 던져버렸다. 정말 때려주고 싶
었다. 의자를 던지고 난리를 피웠다.
남자선생님을 데려와 데리고 나가라고 했는데 안 나가고 버티면서 나를
힘들게 했던 아이.
그리고는 와선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내게 아양을 떤다. 다시 오지 말
라고 해도 그 아이는 늘 먼저 와서 이 이야기 저이야기 하면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런 아이를 내칠 수도 없다. 다른 강좌에선 다 손들었다고 한다. 오다
가다 하면서 아이들에게 침도 뱉고 욕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미술은 안 빠지고 온다. 늘 와서 물바다를 만들고 물감을 범벅
을 하고 솔직히 안 왔으면 하고 바라는 아이다. 그런데 성실하게 일찍 와
서 나와 가장 가까운 코앞에 앉는다. 저리 멀리 가서 앉아라, 해도 먹히지
도 않는다. 하도 골치가 아파서 그 아이를 빤히 바라다보았다. 왜 저를 보
냐고 난리를 친다. 네가 하도 말을 안 들어서 내가 너무 힘들다 했더니 앞
으론 잘 들을 테니 걱정마라 하더니 곧바로 교실 문 앞에 물감을 엎지르
곤 대걸레를 내게 찾아 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었다. 걸레를 갖
다 주니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청소를 한다.
그리곤 꼬박 인사는 하고 간다. 인사를 안 받아 주면 교실이 떠나가듯
내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대고 도망간다. 그 골치 아픈 아이도 그림을
그릴 때는 신기하다.
곧 잘 그린다. 90프로 엉터리로 그리지만 열 번에 한번은 잘 그린다. 잘
그리면 앞에다 걸어주는데 그 아이는 걸어주지 않아도 지가 걸어놓고 간
다. 아이들이 웃음바다를 보내도 신경도 안 쓴다.
하도 여기저기서 힘들게 하는 아이라 관에서 부모님한테 전화를 해서
몇 번이고 오지 말라고 한다고 했지만 놔두라고 했다.
내가 무슨 수호천사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래서 안 오면 내가 너무 아플 것 같다. 그중 그래도 가장 오래된 아이
이니 말이다.
이렇듯 버릇이 없고 막무가내이고 골치 아픈 아이들도 있다.
말썽부리는 아이들이 꼭 어딜 가든 한 두 명씩은 있다. 난 그 아이들은
내 코앞에 두고 수업을 한다. 그러면 왜 앞에 앉으라 하냐고 난리를 부린
다.
“난 너가 너무 예뻐서”하면 이상하 다듯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반 아이
들도 이상하다고 하면서 질문하기도 한다. 왜 예쁘냐고 난 정확한 대답은
안하고“그냥 예뻐”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대답에 자꾸 케 묻는다.
내 아이가 힘들게 자라서 일까? 혹 자폐가 아닌 가해서 여러 병원을 전
전긍긍하며 키웠던 생각이 나서 일까? 힘들게 자란 아이 때문일까?
사회성 결핍성장애라고 섣불리 판단을 내린 그들이 싫어서 일까?
유난히 삐딱한 아이 말 안 듣는 아이,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들에게 정
을 더 쏟는다.
왜 그럴까 내 아픔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어느 겨울날 나와 헤어지기가 싫어‘선생님 나 못 봐 나 못 봐’하면서
자기가 여기 없다고 내게 강요를 하던 아이, 헤어짐이 아쉬웠던 아이, 태
양빛이 유난히 내리쬐는 오늘 이 학교 운동장에서 그 정현이가 유독 생각난다.
눈물이 글썽했던 그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아른거린다.
파란 가을 하늘 속에 그 이아이의 미소가 구름처럼 마구 번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