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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08년 [수필-이은자] 범바위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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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87회 작성일 09-02-0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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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보면 정길 형이 생각납니다.”
나를 큰 길까지 따라 나와 택시에 태워 보내며 노광복 문화원장이 한
말이다. 내 심중을 정곡으로 찌르는 말인 것을 노 원장은 모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사람 한 두명씩은 있게 마련이다. 나를 보
면 생각나는 그 누구, 그를 보면 생각나는 나. 가까이 지내던 사람끼리 라
면 서로를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정길이의 무엇이 내게서 보이는 걸까? 나의 어떤 면이 정길이를 겹쳐
보이게 했을까?
이정길. 오래전에 세상 떠난 동창생, 채 30살이 안 돼서 돌연히 먼저 간
친구다. 노 문화원장과 우리는 속고 선후배이고 속초감리교회 학생회원으
로 각별히 지냈었다. 청년 이정길은 그 당시 교우들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6.25 전쟁이 휴전으로 처리되고, 수복지구 속초에 새로 지은 속초국민학교,
공동묘지를 밀고 지은 터라서 운동장에선 사람 뼈가 시도 때도 없이 발뿌
리에 채이던 날에, 호리호리 하고 곱살한 사내아이 정길이는 천진에서 우
리 5학년 3반(남녀 합반)에 전학 왔다.
이북 피난민, 어부 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고 했다. 정길이 말고도 우리
반엔 그런 아이가 더 있었다. 정길이는 명랑하고 씩씩한 아이였고 학교를
빛내는 축구선수였다.
우리가 조금 철나고 고등학생이던 때에, 그가 삶을 힘들어 하는 걸 알
았다. 저마다 공부 외엔 여념이 없던 때에도 그는 학교가 파하면 교회당
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조목사님을 따라 허접쓰레기 치우기, 지게로
물 길어 올리기(우물은 도립병원 마당에), 가리방 긁어 등사하기, 새벽종
치기 등등… 교회에서 만난 그의 얼굴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턱
과 코에, 심지어 입술에 까지, 마치 연탄배달 아저씨 같은 얼굴로 씨익 웃
던 얼굴이 엊그제 같다. 사람들은 그를 믿음 좋은 학생으로 칭찬했고 그
는 언제나 명쾌했다. 우리들은 제아무리 교회가 재미있어도 때가 되면 집
에 가기 바쁜데, 그는 집에 갈 마음이 없었다. 정길이의 그런 마음을 목사
님은 오래 전에 알아채셨던 것 같다. 선량한 아이건만 집 밖으로 도는 아
이, 외롭고 추워하는 아이, 아버지가 낯설어지는 아이…
차가운 기도실에 숨어들어 새우잠 자는 정길이를 사모님은 서재에 끌어
들여 재우고 먹였다. 옛 말에‘흉년엔 열손(10인) 번다고 말고 한입(一口)
덜라.’는 말이 있다. 혹독한 보릿고개를 넘기던 때라, 장정 열이 벌어도 한
사람 입을 감당 못 한다는 말이다. 그에게 명분을 세워주려고 목사님은 일
거리를 주곤 했으리라.
그의 아버지는 새 엄마를 들이고, 그새 동생이 태어났다. 어린 것 손잡
고 피난 온 아비가 아들에게 향한 마음이야 어디 갈까 마는, 사춘기 정길
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 같다.
휴전 상태로는 언제 고향에 돌아가 엄마를 만날 기약이 없는 절망, 버
림 받은 건 아니지만 어머니를 잃은 아이의 상실감이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만 갔으리라. 동생을 들여다 보는 아버지의 눈빛, 그리고 이어지는 가
난…
그가 교회에서 약간의 학비 보조를 받은 것은 본 성가대 지휘자로 임명
받고서였다. 청장년 대원들 앞에 선 까까머리 지휘자. 하지만 열정을 가지
고 그 자리를 거뜬히 감당해 나갔다. 남자들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 아
니면 군(軍)에 간다. 정길이는 응당 군 쪽이다. 일단 군 복무를 마치고 주
경야독으로라도 제 힘으로 창공을 날으리라 맘 먹었다. 군 징집 신체검사
에서 그는 폐결핵 중등증 활동성이란 판정을 받았다. 지금도 완벽하게 퇴
치된 상태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6.70년대만 해도 결핵이 나라 안 방방곡
곡에 창궐 했었다. 구한말 미국 선교사 셔우즈 홀 가 (家) 가 황해도 해주
를 거점으로 삼대(三代)에 걸친 싸움의 대상이던“결핵”이 6.25 전쟁을 치
르면서 속수무책이었는데 60년대 초에 마침내 WHO에서 서울시 영등포
보건소를 선발, 결핵퇴치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정길이도 그 때에 넘어졌
다. 결핵은 공기로,세균감염으로 쉽게 전염된다. 대체적으로 폐를 먼저 점
령하고, 몸 전체 어느 기관이라도 다 공격하는 병이다. 그의 절망은 이제
까지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었으리라. 무서운 복병에게 발목을 잡힌
것이니까. 폐병은 나병처럼 사람들 틈에 섞여 살 수 없다. 전염 때문이다.
그는 이제 성가대원 앞에 서면 안 된다. 목사님 댁 어린 아이들과 한 공
간, 한 식탁에 앉으면 안 된다. 직장은 더 더욱 불가능 하다. 목사님 내외
분은 별 내색 않으시지만 교인들이 노골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정길이는 정말 갈 곳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목사님의 주선으로‘마산결핵요양원’에 보내졌다. 그 무렵
우리들도 속초를 하나 둘 떠나고 있었다.
일년여 만에 돌아온 정길이는 지휘자 일 말고는 거의 전과 같이 잔 일
을 거들며 교회에서 재활 안정기를 보내고 있었다. 수요 예배 후에 성가
연습을 마치면, 먼 데 사는 자매들을 바래다 주는 일은 늘 있어온 일이다.
그날은 망년회를 마치고 정길이는 최 동창과 그렇게 돌아오던 길에, 수복
탑 근처에서였다. 갑자기 기침과 동시에 입에서 피가 튕겼다. 길 건너에
박사님 병원이 있었지만 떼굴떼굴 구르면서 피를 토하는 그를 어떻게 도
울 수 있었겠는가. 한 순간의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갔다. 질식사(窒息死)
였다. 서럽고 힘들 때, 엄마가 그리운 밤에 맴돌다 가던 모자상(母子像)
수복탑 아래서…
며칠 뒤면 한식이다. 불을 지피지 아니하여 찬 음식을 먹으며 조상들
산소를 찾아 성묘하고 손보는 날이다. 한 때 실향민들은 범바위 언덕 그
능선을 따라 묘역을 만들고 단천, 북청, 이원, 홍원같은 고향땅 이름으로
망향동산을 가꾸었다. 우리 아버지도 그 곳에 묻히셨다. 얼마 뒤에 내 친
구 정길이도 두서너 기(基) 옆에 묻혔다. 나무 십자가에“이정길”글씨만
해마다 흐릿해져 갔다. 범바위 언덕은 온통 돌소금 같은 왕모래 산이다.
잔디나 관목이 제대로 살지 못한다. 우리 아버지 묘에 벽돌을 두르고 객
토를 하고 떼를 입힐 때, 알몸으로 옹크리고 있는 정길이에게 참 미안했
었다. 그를 애통해 하여 오고가며 묘를 찾던 지인들이 살 길을 따라 다들
떠나고, 목사님도 임지를 옮겨 떠나신 뒤로는 그는 또 외톨이로 누워있었
다. 어느 핸가 영랑호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고 속초시로부터 묘지이장 공
고가 나붙었다. 시에서 주는 이장비가 실제와는 턱없는 액수여서 실향민
들은 또 한번 시름에 빠졌다.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가는 날 그때에, 먼저
가신 님들 시신(屍身)일망정 떠메고 함께 가렸는데 느닷없는 이장공고라
니... 끝내 이장 못 하는 사람들의 망극함이란 또 다른 한으로 서리었다.
우리도 시한 끝자락에 쫓겨 가까스로 결행했다. 아버지를 옮기던 날, 나는
내 가족들 모르게 정길이 때문에 울었다. 그를 버려두고 가는 게 너무 미
안하고 가슴 아팠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무연고 묘지들은 일괄 화장한 다
음 산골(散骨) 처리 되었다는라는 소문을 들었다. 정길이는 속초의 산하
에 훠이훠이 뿌려졌을 것이다. 어쩌면 범바위 언덕이 였을지도 모른다.
그 곳은 지금 골프장. 영랑정, 카페, 영랑리죠텔이 성업 중이다. 호반을 에
두르는 보행로가 있어,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풍요 속에 즐기려
그 곳에 간다. 지금의 절반만 같았어도 나는 벗들과 힘을 모아 어찌해 봤
을 것이다. 노 원장 역시 그 혼자의 역량으로서 능히 정길이 묘는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공을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함을 통감하는 대
목이다. 절대가난, 최소한의 제 앞가림도 어려웠던 시절의 우리들, 그 연민
이 나의 <범바위 언덕>처럼 노원장의 <정길형>이 아닐까?


양미리


‘양미리도 생선 축에 들어가나? 그 무슨 불경스런 말이람. 지난 12월 한
달 동안 양미리 축제 까지 벌이지 않았나.’
그렇다. 금년 겨울 속초항에선 양미리 축제를 벌였다. 양미리 소금구이,
양미리 음식 만들기, 양미리 엮기 대회 등등….
날로 한산해 가는 어항(魚港)에 활기를, 어부들에겐 팔아주기, 또 관광
객들에겐 추억거리를 선사하고자 시작한 이벤트임엔 별 이견(異見)이 없다.
그 축제의 성공여부나 평가는 입장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리라 본다.
축제라면 선뜻 흥이 나야 할 일이건만 그 대상이 양미리라니 어쩐지 서
운한 감이 들었다. 나만 그럴까?
거진항은 명태요, 울진 강구는 오징어, 영덕엔 영덕겐데 어쩌다가 속초
항에선 겨우 양미리 축제인가?
‘물고기엔 값이 없다’는 말이 있다.
바다가 밭이고 - 특별히 양식장 외엔 개인 소유가 아니다 - 물고기는
저절로 낳고 자라고 떼지어 다니다가 잡혀온다. 값을 매기자면 배와 어구
와 기름 그리고 사람의 수고비를 얹은 것이리라.
어쨌거나 값으로 따지자면 양미리 만치 싼 생선도 없다. 명태는 망선태
건 주낙태건 마리당 4, 5천원, 도루묵은 한 드럼에 3만원도 받는다. 배불뚝
이 심퉁이(도치)조차 한 마리에 6천원 이상 받는다. 그런데 양미리는 한
드럼에 3천원을 더 넘겨본 날이 없다. 생물로 팔거나 무우청우거지마냥
엮어서 팔거나 값은 거기서 거기다. 제철에 팔지 못하면 승산이 없는 생
선이다. 냉동보관 했을 때 그 비용을 능가할 만한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다.
축제가 끝나고 며칠 뒤에 나는 수복탑 앞 선창가에 나가 보았다. 양미
리 배들은 새벽 6시경에 부두를 떠나고 있었다. 몇 안되는 배들만이 아직
조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 올 때까지 나는 기다려 보기로 맘
먹고 시외버스 터미널 쪽 큰 길을 건넜다. 건널목에서부터 막무가내 내 뒤
를 따라오는 흰 강아지 한 마리, 그냥 묵인한 채 나는 속초감리교회당 마
당에 올라갔다.
그 곳에 서면 시원하게 펼쳐진 동해가 있다. 북쪽으로 천진앞, 남쪽으로
낙산 곶 까지….
등대 앞 저만치에 점점이 배들이 떠 있다. 7시 30분경 구름사이로 일출
이 보였다.
앞발을 울타리 턱에 올려놓고 바다를 보고 있는 강아지가 황금색 강아
지로 변했다.
나도 눈이 부셨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잡아오던 그 옛날 양미리가 생각났다.
한다는 뱃사공들은 그까짓‘양미리’바리는 하지 않았다. 그것도 고기바
리냐고.
평퍼짐한 목선을 여나믄 명 되는 중늙은이들이 노를 저어 나간다. 이물
에 앉은 도사공 좌상 영감이 고기떼를 발견하면 추임새 같은 손짓을 한다.
일제히 그물을 내린다. 소위‘후리’로 양미리를 퍼 올린다.
그물이 뱃전에 당도할 즈음 눈치빠른 갈매기들이 배를 감돈다. 그물의
출렁임에 따라 높게 또 낮게 날으며 잽싼 놈은 그물 코에 걸린 양미리를
낙아 채 간다.
어떤 녀석들은 배 위에 정지비행 하다가 어부가 버리는 잡어를 공중에
서 받아 물고 날아간다. 그 때도 이 언덕에 서면 갈매기 떼를 보아 양미리
배 위치를 알 수 있었다. 퇴역 어부의 어눌한 솜씨로도 양미리 배는 자주
만선이었다. 짚으로 한 드럼 씩 엮어서 지금처럼 시장에서 팔았지만 아주
소량이고, 대대적으로 소비되는 곳은 따로 있었다.
명태 주낙 미끼로 쓰기 위해 염장을 했다. 그때는 겨울철 명태 잡이가
으뜸인 때여서 항구엔 데구리 배(저인망)는 몇 척 안 되고 주낙어선이 빼
곡하게 드나들었다. 명태 주낙의 미끼로 양미리 외에 고등어, 새치(이면
수)가 있긴 했지만 그것들은 염장을 해도 몸이 물러서 적당치가 않았다.
낚시 사공이 함지에 담긴 낚시를 바다로 뿌릴 때 쉽사리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양미리는 염장을 하면 살이 단단하다. 아무리 세찬 바람을 맞서
낚시를 뿌려도 끄덕 없이 낚시 끝을 감싸고 물속 깊이 내려앉아 명태가
물게 한다. 집집마다 양미리를 그득이 염장해 놓고, 긴 겨울 내내 낚시를
찍는다. 이듬해 춘태바리까지.
그래도 남는 것은 춘궁기에 염분을 우려내고 반찬이 된다. 엮은 양미리
는 겨우내 얼다 녹다 꾸덕꾸덕 적당하게 마른다. 가난한 술꾼들에겐 안주
로도 만문하다. 성탄절을 준비하는 아이들이 밤마다 예배당에 모여 연극,
노래, 무용을 연습할 적에 무쇠 난로 위에 구워먹던 맛있는 군것질 감이
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변한 것이 어디 바다 사정 뿐 이랴마는, 그 많던
명태는 어느 길로 다 가버리고 낚시 미끼 외엔 보잘 것 없는 취급받던 양
미리를 축제란 이름에 부쳐 띄우고 있는가.
내가 긴 상념에 젖어 있다 보니 황금 강아지는 본래의 흰 강아지로 오
돌오돌 떨고 있었다.
‘너 땜에 안 되겠다.’
나는 다시 그 선창으로 내려갔다. 큰길을 건너기 직전 나는 단호하게 그
녀석을 따돌려 버렸다.
배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6~11톤급 유자망 동력선, 선원 3~4 명 승선.
황덕불 쬐고 있던 아낙들이 지금 막 배에서 그믈을 받아 당겨 사린다.
그물은 3~6인조로 그물코에 걸린 양미리를 벗겨서 광주리에 담는다. 한
광주리에 1만원 씩 수고비를 받는다. 끝물이라지만 거의 빈 그물이다. 이
삭 줍듯 듬성듬성 꽂혀있는 양미리.
내가 어릴적에 본 어부의 형편이나 지금의 형편이 조금도 나아진 구석
이 없어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경제가 몇번째 순위라고 하지만 양미리 잡아
살아가는 우리네 어촌은 무관한 숫자에 불과하다. 관광 속초를 내세우고
있지만 생선이 없는 속초를 사람들은 와 줄까? 어부들이 모두 떠난 속초
가 여전히 속초일 수 있을까?
시(市)에서는 조만간 양미리 저장 시설에 관해 논의 중이라는 소식이
있다. 그리되면 좋으련만.
싸늘한 새벽에 출어한 어부들. 쓸쓸한 아침으로 입항했다. 그럼에도 서
로에게 농담과 덕담을 주고받는다. 옛날보다 따스하게 입은 입성하며 산
듯하게 빗어 올린 머리카락의 아낙들의 웃음 띈 얼굴에서 건강한 속초의
미래를 보았다. 나는 그 아낙들이 건네는 따끈한 커피 한잔을 받아 마시
며 조금은 아픈 마음 가라앉혔다.
내년 이맘때 양미리 축제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