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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08년 [시-신민걸] 지극히 낮은 방 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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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49회 작성일 09-02-0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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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낮은 방 한 칸

천장이 낮아서 자꾸만 허리가 꼬부라지는 방
여러 겹 덧붙여 울룩불룩 두툼해진 사방무늬 검버섯 꽃무늬 벽지
까맣게타 들어오며 쪼그라드는 흐릿한 형광등 눌러 붙은 별똥파리똥
요 깔고 전기요 깔고 담요 깔고 마고자 걸치고 털모자 쓰고 이불 덮고
꼬부라진채 돌돌 말아서 한없이 녹작지근한 길고 야윈 팔다리
머리맡 쟁반 위 물병과 속보이는 유리잔과 따로 글자가 적힌약통들과
세 끼니 나란히 붙여놓은 약봉지 속 알록달록 동그란 예닐곱 알약들
재작년 전화번호부와 조그만 수첩뭉치와 가끔 느닷없이 울리는 전화기 옆
경첩이 빠져 열 때마다 닫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십장생 문양 문갑 위
하루종일 천지사방 동그랗게켜진텔레비전위 먼 손자사진위
음력까지 적혀서 명절마다 싱숭생숭한 새마을금고 신년 달력이 걸린 방
홀로 늙어간다고 쓸쓸한게 아니라 늙어져서 홀로 살아내는게 참 거시기해서, 문지방 너머
십 킬로그램 닫힌 쓰레기봉투 옆 이십 킬로그램 열어놓은 쌀자루
달걀 풀어 소금 약간 엄지검지 뿌리고 지져 먹은 기름때 낀 프라이팬
미닫이문 아래 나란히 놓인 화장실 가는 슬리퍼와 마실 가는털신
누가 두고 갔는지도 모르는 한쪽이 찌그러진 우산 하나 챙겨둔방
지붕 위로 비 두들기고 그 많은 눈 쌓이고 바람이 어둠을 부려놓고
그래서 차츰차츰 가라앉아 납작해진 관 지극히 낮은 단칸방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맞고 처음 이마에 주름살도 잡더니
새하얗게 내린 눈 만지려다 뜨거워 금세 뽀얀 조막손을 물리더니
좀 센 봄바람 한 모금 마시고 흠칫 놀라 까만 두 눈이 동그래지더니
온 세상 철마다 열리는 꽃이라면 그게 다 예쁘다고 사족을 못쓰더니
엄마 아빠 사이에 오동통한 계집아이 밥 먹고 누워 영영 뒹굴더니
늙어가는 게 살아내는게 혼자라서 이제는 자꾸만 걱정이 되는 그런 방 한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