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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08년 [시-장은선] 나무늘보의 낮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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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72회 작성일 09-02-0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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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의 낮잠

음향도 꺼진 세탁기 버튼을 누르고
나무늘보가 되어 낮잠을 즐긴다
허물이 벗겨지도록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오르지만
빈 주머니에 과일 소리가 나지 않는 것 처럼
낡고 오래된 세탁기는
삶에 지쳐 자맥질하는 소리가
누더기 시장과 만원 지하철을 빠져 나오려는
낡은 구두 뒤축 끄는 소리만 날 뿐이다
나는 시큼털털한 과즙을 빨며 뒤척거리다
빈 배들이 흔들리는 강물소리에 취해
무거운 눈꺼풀들을 가라앉힌다
밤길을 헤매다 달라붙은 얼룩들과
버려진 리어카 바퀴에서 쿨럭거리던 가래까지도
세탁기는 숨이 멎는 기관지소리로 표백시킨다
시골 마을 강어귀에서
곱사등이가 되어 말없이 빨래를 하시던 어머니
파문도 없이 두레박으로 강물을 길어올리던
숲으로 난 굽은 길을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목탁소리를 내며 빨래방망이를 두들겨
해가 솟지 않은 진흙길을 하얗게 만드셨다
나무늘보가 하품을 하며 내려올 무렵
세탁물은 나비 날개로 가지런이 개여 있고
어머니는 아직도 꼿꼿이 돌에 앉아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