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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08년 [시-지영희] 붉은 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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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23회 작성일 09-02-06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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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꽈리

조금씩 서운했던 얼굴들이
수십 년간 허파꽈리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하필이면 이 높은 하늘에서 반란을 일으키다니
손발이 싸늘해진다는 의미 앞에
세상에 있는 그림자란 것이, 햇살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오랜 시간 전 나비의 날갯짓에서
시작된 필연임을
낯선 의사의 배려를 받으며 눈 뜬다
담 밑, 꽃 같은 주머니 안에서 날 기다리던 꽈리들이
붉게 떠다니고
불편한 의자를 투덜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꽈리 속을 다 파내봐야 안다
괴로움을 겪는다는 건
햇살이 있기에 가능한 어둠인 것을
서운했던 얼굴들이 꽈리 하나씩 물고
끼르륵 이 사이로 내뿜는다
붉은 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