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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09년 [소설-강호삼] 성층권(成層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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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63회 작성일 09-12-2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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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의자를 젖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아까부터 그 생각에 골몰했다.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일까.
생각이 날 것 같으면서도 얼른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 산수 과목을 빼고는 암기과목인 국사나 사회는
학업성적이 괜찮았던 편이다. 유독 산수과목만은 항상 낙제점을 받았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봄이 되어 농사일이 시작되면 한 달,
여름 모심기철에 한 달, 그리고 가을 추수 때 학교를 가지 못했다. 젖먹이 어린 동생을 봐야만 어른들이 품앗이를 하거나 농사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봄파종 때와 모심기 김매기, 가을걷이까지 젖먹이 동생을 업고 논으로 밭으로 젖을 먹이려 다녔다.
그러다가 다시 학교에 가면 모든 과목의 진도가 한참이나 앞으로 나가 있었다. 암기과목 같은 것은 대충 따라 잡을 수가있었지만 산수는 달랐다.
1/2 더하기 1/2 분수 셈을 배우다가 한 달 후에 학교에 가면 대분수 가분수를 배우고 있었다. 설명을 듣지 않고서는 도저히 풀 수 없었다.
자연히 산수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손님이 많았겠네. 내 아들은 콘티넨탈 호텔에서 했지 그 강남 삼성동에 있는 호텔 말이야. 손님들이 천명이 넘었지.
손님들이 너무 많이 와서 로비에까지 테이블을 다시 만들었어, 참말로 굉장했제.”
사내의 입에서 숨을 내 쉴 때마다 덜적지근한 술 냄새와 구린 입 냄새가 한꺼번에 독가스처럼 뿜어져 나왔다.
비행기가 대구 관제구역을 벗어나 기수를 곧장 동쪽으로 잡고 순항고도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내는 스튜디스에게 위스키를 주문했다.
날라다 준 위스키를 단숨에 홀짝 마시고 다시 스튜디스를 불렀다.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넉 잔째부터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사내와 줄잡아 12시간을 이렇게 가야할 형편이었다.
아니라도 비행기를 타면 특유의 우--하는 소음과 기압차이로 인한 먹먹한 불쾌감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앞좌석 등받이 뒤쪽의 개인용 모니터에 비친항로 표시에는 비행기가 이제 겨우 일본 근해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사내가 손에 술잔을 든 체 조금 머뭇거리다가 불쑥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형씨는 어디까지 갑니까?”
“아, 예 엘에이에 갑니다.
“관광 가시는 건 아니실 테고…”
“예에, 갑자기 볼일이 좀 있어서…”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어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내는 새삼스럽게그의 아래 위를 무언가 탐색하듯이 훑어보았다.
사내는 조금 전 옆자리의 여자에게 자신의 나이가 여든 둘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바짝 올려 깎은 상고머리가 나이를 무색하게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젊은 시절 힘깨나 썼음이 분명했다.
두툼한 손바닥과 아름드리 나무토막 같은 몸통이 아직 오십 장년 같았다. 그를 보는 사내의 시선은 집요함이 지나쳐 무례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나이를 빙자해서 상대를 한 수 접고 들어가는 행동이었다. 늙은이 특유의 노회함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이 땅에서 그 노회함을 굳이 탓할 필요가 없다. 누구랄 것 없이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일제 식민지 치하와 해방공간과,
6.25의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4.19와 5.16 쿠데타와 군사독재 30년의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터득한 지혜 같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내는 잔 밑바닥에 조금 남은 위스키를 홀짝 마시고는 얼굴을 돌려 기내를 두리번거리면서 스튜디스를 찾았다.
스튜디스가 눈에 들어오지 않자 다시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나, 지금 우리 아들집에 가는 길이야. 우리 아들 스탠포드 대학을 나왔어. 스탠포드 대학 알지. 미국대학 중, 명문 중에 명문이야.
엘에이에 우리 회사의 법인체가 하나 있지. 그걸 우리 아들에게 맡겼어. 이번에 회사를 좀 늘려 보려고 가는 길이야.”
사내의 아들이 스탠퍼드 대학을 나왔다는 건 거짓말이다. 사내는 미국에서 스탠퍼드 대학이 좋은 대학이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주워 섬겼을 뿐이다. 실제 사내의 아들은 엘에이의 2년제 전문대학을 나왔을 뿐이다.
사내의 말대로 엘에이에 사내의 법인체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겉으로는 한국의 먹 거리 같은 것을 수입해서
현지 한국교표들이 사는 마켓에 공급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내의 외화도피 창구로 활용되고 있다.
사내는 이미 자신의 막대한 재산 거의 전부를 엘에이로 도피 시켜 놓았다.
한국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5.16쿠데타로 박정희의 군사독재가 시작되고서부터다.
박정희는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한 달이 멀다하고 간첩사건과 휴전선의 충돌사건을 조작하거나 침소봉대해서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종신 집권을 위해서 민의를 가장해 헌법을 바꾸고 자신에 반대하는 정적을 가차 없이 제거하고 고문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매일 연출했다. 사람들은 언제 휴전선에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악몽 속에 살았다.
6.25와 같은 악몽을 겪지 않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이민 길에 올랐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앉아서
전쟁을 맞을 수밖에 없다고 체념했지만 상대적으로 형편이 조금 나은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 번쯤 이민을 생각했었다.

“그래 선생은 무슨 사업을 하시는가?”
다시 사내의 시선이 그의 아래 위를 훑었다. 그는 사내의 집요한 표정을 보면서 예의상 어떤 대답이던 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직생활을 했습니다.”
“공직생활이라, 어느 부서에서 일을 했는데…?”
의외로 사내가 반색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뭐, 내세울만한 곳이 못됩니다.”
“말을 해봐. 어디서 근무했는데? 그래야만 우리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어.”
그는 비행기에 동승했다는 사실만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내의 말이 너무 엉뚱했다.
사내의 뻔뻔한 비윗살이 여간 아니라는 것은 이미 짐작한 바였다. 사내가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왔다면
그건 순전히 남을 전혀 의식치 않는 뻔뻔한 비윗살과 임기응변과 교활함 때문일 것이다.

  사내는 일제 때, 세무공무원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은 그저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소사였다. 일본헌병의 밀정이었던 그의 아버지
가 주선했다. 소사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시골 구석구석 쫓아다니면서 놋그릇과 놋수저 등을 강탈하는 데 앞장섰다.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서였다.
세무서 소사가 된 덕에 일제가 패망해서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겨 두고 간 적산가옥 수십 체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다.
해방이 되자 세무서의 촉탁에서 세 단계, 네 단계를 건너 뛰어 주사로 승진했다가 이내 세무서장이 되었다.
뇌물이면 안 되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세무서장이 된 후 사내의 활약은 더욱 눈 부셨다. 나라에서 공인 받은 도둑이 되어 부하직원들과 함께 국고로 들어 갈 나라의 세금을 훔치고
서민들의 등을 치거나 세금을 탈루를 자행했다. 나랏돈이 모두 사내의 돈이었다. 사내는 부대로 돈을 끌어 모았고 방안 가득, 쌀가마니 대신 돈 가마
니로 채웠다. 사내가 끼친 해악이 이 나라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건 사내의 삶은 참으로 성공적이었다.
사내의 게슴츠레한 눈길이 그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상당히 센데 있었던 모양이네…?”
그는 내키지 않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내는 완곡하게 대답을 피하는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의외로 쉽게 체념하고
옆 자리의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그가 사실대로 자신의 직장을 밝혔을 때 돌아 올 사내의 반응에 자유스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과학 연구소가 그의 직장이었고 연구관이 그의 직책이었다. 그가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 둔 결정적인 동기는
대기과학 연구소가 차관급 기관이 되면서 정치논리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 때 선거전의 논공행상을 하면서 대통령 인수위원회에 있었던 대기의 <기>짜도 모르는 인사가 낙하산을 타고 연구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다시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그것이 관례가 되어, 청와대 비서관을 했던 법대 출신의 행정 관료가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는 난센스가 되풀이 되었다.
세계에도, 공산권에도 그 유례가 없는 일이 자유대한민국을 표방하는 한국에서 아무 부끄럼 없이 천연덕스럽게 자행된 것이다.
병원 원장자리에 행정 관리를 앉혀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엔 산하에 세계대기연구기구라는 것이 있고,
이 기구에서 매년 세계의 기상학자들이 모여 새 기술과 정보를 나누고 토의하는 회의를 연다.
이 회의에 대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행정 관료가 참석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국가적인 망신이자
스스로 후진국임을 천명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색시 결혼식에도 사람들이 많이 왔겠네.”
“네에.”
“그런데 몇 년 만에 친정 가는 거야?”
“작년에 다녀왔습니다“
“호 오! 그래. 신랑이 굉장히 미남인 모양이제, 그러니까 미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오지,
한국에서 미국으로 시집가는 색시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미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
그래, 시집은 무슨 사업을 하는가?”
“제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제조업도 여러 가진데…?”
“전자회사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들어서 납품을 하고 있습니다.”
“옳지, 삼성이나 엘지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드는구만.”
여자는 30대 중반, 별로 꾸미지 않은 갸름한 미인형의 얼굴이었다. 목선만큼 내려 온 머리칼을 귀 양옆으로 자연스럽게 웨이브를 넣어,
고전적인 지적세련미가 느껴졌다. 여자의 가족도 70년 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피해 엘에이에 정착한 경우였다.
사내의 호기심이 여자에게 쏠린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마침내 그는 생각해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이 1936년 일이었다.
당시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냈다가 신문이 폐간되었다.
같은 해 장항의 제철소가 준공되고 서울의 한강인도교가 개통되었다. 함
경남도 갑산을 중심으로 항일 운동이 벌어지고 이동녕과 김구가 상해에서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중국에서 장학량이
장개석을 감금한 서안(西安)사건이 일어났다. 스페인에서 내란이 일어나 프랑코가 정권을 장악하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합병했다.
독일에서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고 히틀러가 대통령직을 겸임하면서 나치 독일 시대가 열렸다.

  그는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일련의 역사적인 사실을 더듬다가 다시 1936년 그의 아버지가 왜 일본의 오사카에 있었는지 궁금했다.
2년 전인 1934년에 낙동강 유역에 대홍수가 났다. 낙동강의 강물이 실어 나르는 모래와 흙이 쌓여서 만들어진 삼각주 평야가 김해평야다.
김해평야는 낙동강물이 범람할 때마다 홍수가 일어나 물에 잠기고 태풍과 함께 바다의 짠물이 덮쳐
애써 경작한 곡식들이 하얗게 메말라 죽거나물속에 잠겼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1932년 제방을 쌓았으나
아직 덜 축조된 제방의 약한 부분이 터져 다시 대홍수를 겪었던 것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홍수와 가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아버지가 오사카로 간 것은 분명하지만 확실한 동기는 알 수 없다.
그 시절에 부부가 함께 도일했다는 사실로 미뤄 그의 아버지는 어떤 의미에서 개척 정신이 강했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오사카에서 그의 형을 낳았다. 지금 대전에 살고 있는 그의 큰 형은 대저면의 할머니 손에 맡겨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오사카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오사카에는 2년 정도 살다가 다시 가족을 이끌고 동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용정으로 이주했다. 말이 이주지 오사카에서 간도까지의 이정이란 교통이 발달된 지금도 며칠이 걸리게 마련인데
당시에는 보름이나 한 달 정도의 고달픈 여행이었을 것이다.

  중국 심양의 호로도(葫爐島)라는 곳에서 그가 출생했다. 호로도는 당시 일제가 대륙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항구로 개발하던 곳이다.
낡은 사진첩에서 당시의 사진을 보면 각반 차림의 그의 아버지가 수건을 허리띠에 차고 산더미 같은 목재더미에 앉아서 쉬고 있는 모습이 있다.
군항첩에서 당 토목공사에 목재의 수요가 많았던 것 같았다. 이모부와 함께목재 공장을 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서기 겸 십장 같은 감독 일을 했던 모양이다.
그가 출생한지 11개월 만인 이듬해 심양에 만연한 장티푸스로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스물일곱의 파랗게 젊은 나이였다.
어머니를 화장한 뼈를 가지고 귀국한 아버지는 딸 하나를 낳고 청상이 된 계모를 다시 맞아 들였고 그 계모와 함께 다시 간도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일본의 오사카에서 출생한 그의 작은 형도 큰형과 마찬가지로 김해 대저면의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돌을 막 지난 그만 계모와 함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시 심양의 호로도로 갔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귀환동포가 되어
다시 김해로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샛별지자 종다리 떴다.>
  그의 손을 잡은 형이 중얼거렸다. 엄궁 나루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는 형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고 희망에 들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동 쪽 푸르스름한 하늘에서 말갛게 떠 있던 샛별이 어느 사이엔가 자취를 감추었다. 구덕산 너머가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형은 그때부터 혼자만이 그리는 미지의 세계가 있었다. 그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
그의 형이 시선을 주고 있는 하늘을 처다 보았다. 곧 해가 뜰 모양이었다. 남동쪽 하늘이 점점 주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부산으로 가는 길은 작지 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엄궁으로 해서 하단으로 걸어가는 길과 덕도에서 낙동강제방 길로 구포까지 걸어가서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구포로 가서 부산으로 가는 길은 버스비가 더 들기 때문에 하단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구덕산 고개를 넘어 서대신동에 도착하면 그곳에서부터 서면과 동래로 가는 전차를 탈 수 있었다.
왜 그때, 그가 새벽길에 그의 형과 같이 작지나루까지 갔는지 알 수 없다. 짐이 있어 나루까지 들어다 주러 갔는지 기억에 없다.
분명한 것은 형과 같이 부산으로 가지 않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부산에 처음 간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양자로 간 작은집의 할머니가 여름 한낮 쇠죽을 끓이다가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짚북데기에 옮겨 붙은 불로 돌아가셨다.
이 때 부산에서 이종사촌 누나의 사업을 돕고 있던 아버지에게 알리러 갔던 것이 부산행의 처음이었다.
형의 부산행이 이루어진 것은 대처 출입이 잦은 동네 사람이 영주동의 어느 서점에 점원으로 소개시켜주었기 때문이다.
형은 그 그 그 점주인의 호의로 야간고등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고등학교에 바로 입학했다.
서점에서 중학교 과정의 통신강의록을 배웠기 때문이다. 2년 후 그의 형은 부산에서 점원 생활을 그만 두고 그의
큰 형이 자리잡고 있는 포항으로 갔다. 그의 큰 형은 김해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던 미공군부대의 하우스보이를 했다.
시중들던 미군장교의 공군부대가 포항으로 이동하면서 그의 큰 형도 그 장교를 따라 포항으로 갔던 것이다.
6.25전쟁 중에 그의 큰 형의 미군부대 하우스보이 생활은 집안 경제의 큰 몫을 담당했다.
봄철 보릿고개 때마다 몇 사람씩 죽어나가고 북쪽에서 내려 온 피난민들이 먹을 걸 얻으러 왔다가
동구 밖에서 허옇게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던 시절이었다.
큰 형은 부대 안에 있는 낮 동안 음식물 쓰레기를 뒤져 먹을 만 한 것을 가져왔고 더러는 탄약박스를 뜯은 널빤지를 철조망 밖으로 가져나왔다.
당시에 그 널빤지는 참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작은 어머니와 그는 비행장 활주로의 철조망 밖에서 큰 형을 기다렸다.
그의 큰 형이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길도 없는 갈대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들을 보자 널빤지 무게가 고통스러우면서도 시익 웃었다.
못이 삐죽삐죽 나와 있는 널빤지를 조심스럽게 둔덕에 내려놓은 뒤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추잉검이라고 불렀던 껌과 초콜릿 반 토막이 형의 손에 짚어 나왔다. 그건 미군장교가 형이 먹으라고 준 것이었다.
반 토막의 초콜릿은 형이 먹고 싶은 유혹을 참고 남긴 것이었다. 껌은 향기롭고 달았고 초콜릿은 환상적인 맛이었다.
형은 그 환상적인 맛의 초콜릿을 차마 다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작은어머니는 자신의 몫으로 나누어 준 껌을 씹지 않고 치맛단에 간직했다. 집에 있는 어린 사촌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작은 어머니는 어린 사촌 형제를 혼자 키우고 있었다. 당시 스물여섯이었던 작은 아버지는 카투사로 미군부대에 배속되어
낙동강의 어느 전선에서 인민군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전선이 점점 남으로 밀러 내려오고 있었다. 집집마다 가마솥에 보리를볶고 맷돌로 갈아 식구 수대로 미수가루 자루를 만들었다.
여차하면 피난갈 준비를 했지만 어디로 피난을 가야할지 몰랐다. 불과 몇 십 킬로미터밖이 남해바다였다. 그 바다 건너에 일본이 있었다.
머리에 뿔이 난 괴뢰군에게 붙잡혀 죽지 않으려면 바다에 뛰어 들 수밖에 없어서 어딘가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다행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의 큰형이 비행단을 따라 포항으로 간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큰형은 그 곳에서 작은 형을 불러 들였다.
작은 형은 그곳에서 다시 서울에서 피난 내려와 학교를 열고 있는 고등 있는야간부에 다녔다.
큰 형도 포항에서 새로 설립된 2년제 포항수산 전문대학에 난 내려와 큰형은 2년 후 졸업과 함께 광주에 있는 보병 있에 들어갔고
작은 형은 야간학교를 다녔다. 가난하긴 했지만 머리 하나만은 뛰어났던 작은 형은 주야간 합쳐 수석으로 졸업, 무시험으로 형은
분교를 내고 있는 연세대 있에 난 내려와 얼마 후 큰 형은 소위로 임관되었다.
작은 형은 그가 처음 부산으로 돌아와 서점의 점원으로 있던 집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고 큰 형의 도움을 받으면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에 그도 무작정 가출해서 부산으로 갔지만 형들을 만나지 않았다. 가끔 형들의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형들에게 도움을 청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큰형이 육군 장교이고 작은 형이 대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웠다.
부산의 좌천동 산비탈에 있는 00고등학교 야간에 입학했다. 육군 장교가 된 큰 형이 자신의 월급에서 보내준 삼 천 원이 입학금이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돌렸다. <아이스 케키>를 팔고 구두 통을 메고 하루 종일 뛰어 다녔지만 하루 한 끼, 먹는 것조차 어려웠다.
좌천동 산비탈의 판잣집에서도 쫓겨나 창고 같은 근로자 합숙소에서 생활했다. 사흘 동안 물한 모금 먹지 못한 체 탈진해서 쓰러졌던 적도 있었다.
팔 하나 들어 올릴힘도 없었던 그 때 어떻게 해서 다시 일어났는지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요새 세계경제가 어렵다고 난린데 색시 시집은 어떤가?”
“아직까지는 별 영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자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앞좌석 등받이에 붙어 있는 액정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터치 화면이었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옮기며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큰일 났어. 달러 값이 올라가서 수출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고 있거던. 그 좋던 시절도 다 지나갔어.
수출을 해서 벌어먹고 사는 나란데 수출을 할 수 없으니 말이야.”

  갑자기 기체가 기웃둥 하는 것 같더니 비행기가 낙엽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전벨트를 매라는 사인이 들어오고 이어서 기장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비행기가 난기류 지역을 통과하고 있으니 벨트를 매라고 했다.
아무리 큰 비행기라 하더라도 비행 중 난기류에 휩싸이게 되면 비행이 위험해진다. 심한 경우 조종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다.
조종사는 비행기 이륙 전에 공항기상청으로부터 자신이 비행할 항로상의 난기류에 대한 브리핑을 받는다.
또 비행기는 기종에 따라 장착된 자체 레이더로도 난기류지역을 사전에 알 수 있지만 미처 파악할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미국으로 가는 항로 중에 고도 10킬로미터 상공에 강한 편서풍대가 있다. 이 편서풍대를 제트 스트림이라 부른다.
풍속은 초속 50킬로미터에서 100킬로미터를 상회한다. 이 고도에서 가끔 발생하는 난기류는 편서풍대부근의 풍속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비행기의 흔들림이 몇 십초 동안 계속되었다. 세상의 어느 교통수단보다 사고 날 확률이 적다는 비행기도 이때만큼은 별 수 없다.
승객들은 이대로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공포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는 경황 중에도 세 자리 뒷좌석에 앉아있는 아내를 돌아보았다. 아내는 평소 입버릇처럼 아무 것도 무서운 것이 없다고 공언했다.
전쟁의 공포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란다. 아내는 1.4후퇴 때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왔다.
평소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이 공포로 파랗게 일그러져 있다.
아내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이다. 14후퇴 때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왔다.
무동력선의 고기잡이배에 큰집 식구와 외가 쪽 친척들이 쌀과먹을 물과 옷가지를 싣고 피난을 나왔다. 할머니는 집을 지키기 위해 남았다.
할머니가 손을 내저으며 재촉했다.
“여기 걱정은 말고 쌔기쌔기 가아.”
배를 매 놓은 밧줄을 푸는데 갑자기 아내보다 한 살 더 먹은 큰집의 사촌어니가 <앙–>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른들이 생업 때문에 신포에 나와 있는 사이, 할머니 손에 자란 사촌언니는 같이 배를 타지 않고 부두에서 있는 할머니를 보고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제는 할머니하고 같이 있을라 보네.”
배를 탄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자 사촌언니는 더욱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나, 할머니하고 있을래.”
“그래, 쟤 할머니 하고 같이 있게 해라.”
별 생각 없이 아내의 큰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며칠 있으면돌아 올 것이라는 계산이 그 말 속에 깔려 있었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유엔군이 다시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면 며칠 안에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과 며칠간인데 할머니 혼자보다는 아이와 같이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의 곁에 있던 어른이 사촌을 달랑 안아서 부두에 내려놓았다. 아이가 내리자 이내 밧줄이 풀리고 배가 부두에서 떨어졌다.
할머니와 사촌언니가 부두에 나온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부두가 점점 멀어지면서 사람들이 조그맣게 보였다.
급기야 해안선만 보이다가 그나마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이산가족이 되고 60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그것이 그의 아내 나이 불과 다섯 살 때의 일이다. 그가 8.15 해방이되어 그의 아버지 손에 이끌러 중국에서 귀환했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리고 그가 대기연구소 공무원으로, 속초지소로 가지 않았다면 그와 그의 아내의 만남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와 좌석을 나란히 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이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던 것은
항공사에 근무하는 딸아이의 친구가 대기표 앞 번호를 주선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대기좌석이 나오는 대로 앉을 수밖에 없었고,
대기 좌석 표를 구할 수 있었던 것만도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딸과 아들은 어쩔 수 없이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는 대로 출발하기로 하고
두 사람 만 먼저 출발했다. 지구의 여기저기서 테러가 동시다발적으로 계속 일어나고 경제는 공황직전인데도 사람들은 어딘가로 자꾸만 떠나고 있었다.

<승객 여러분! 죄송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난기류를 만나 일시적으로 승객 여러분을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회 비행기는 지금 무사히 난기류를 벗어나 안전하게 비행하고 있습니다. 저회 비행기는 지금…>
기장의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아까처럼 조용하게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다.
순항고도 11킬로미터, 순항속도 시속 900킬로미터, 비행기 밖 기온은 섭씨 영하 51도. 한글과 영어, 중국어와 일본어가 차례대로
모니터에 떠오르고 동시에 비행기의 궤적이 빨간 선으로 표시되었다. 비행기는 기수를 북동쪽으로 향하고 태평양 상공을 지나는 중이었다.
이어, 남은 거리와 현지시간, 출발지 시간이 차례대로 모니터에 나타났다.

  지상에서 6-13킬로미터의 고도에 권계면이 있다. 권계면의 고도는 적도와 극에서 다르다.
적도에서는 15킬로미터, 극에서는 6킬로미터로 평균 13킬로미터이다. 기온은 지상에서 고도가 높아질수록 내려가지만 성층권에서는 반대로 점점 올라간다.
오존층이 태양의 복사 파 가운데 파장이 짧은 자외선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성층권 위는 열권이다.
열권까지도 기체가 있지만 밀도가 극히 낮아 하나의 기체 입자로 존재한다.
그는 종교가 없다. 종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이 머무는 곳은 하늘의 어디에도 아닌
성층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의 이러한 생각은 뿌리가 깊다. 물론 지구 대기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다.
원시지구 대기에는 본래 산소가 없었다. 최초의 산소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외선이 미치지 않는 바다 속 남조류의 광합성(光合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오랜치지 , 산소가 만들어지고 이 산소는 대기 중에서 광해리(光解離)에 의해 산소 원자로 쪼개지면서
산소 분자와 결합하여 오존소가 었다. 이 오존소가성층권인 고도 20개지킬로미터 상공에 오존층을 형성하면서
태양으로부터 오는 유해한 자외선 대부분을 흡수하였다. 비로소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나기 시작한 자외선 대산소가 만들어지지 않고
자외선을 흡수하는 오존층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지구상에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상에서 상공으로 갈수록 기온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성층권에서 오히려 기온이 오르는 이유는 바로 이 오존층이 태양의 자외선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오존층 아래의 기온이 섭씨 영하 50~60도인데도 성층권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다.
아무리 죽은 영혼이라고 해도 기온이 극단적으로 추운 곳보다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곳에 머물고 싶을 것이다.
그의 엉뚱한 생각대로 생을 마감한 죽은 영혼들이 성층권에 살고 있다면 지금 비행기는 그 영혼들의 안식처 아래를 지나고 있는 셈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영혼들이 착하고 아름답게 살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죽은 영혼들이 사는 그 곳만은 종교나 더 가지겠다고 서로를 죽이는
끔직한 전쟁이나 테러 같은 것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문득 성층권에서 영혼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인줄 알면서도 그는 바깥을 차단하고 있는 기창의 가리개를 조심스럽게 위로 밀어 올렸다.

  칠흑같이 깜깜한 어둠이 기창 밖에 나타났다. 그 순간이었다. 유성인가, 바늘 같이 날카로운 빛 한줄기가 어둠을 뚫고 날아와
기창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동시에 누군가, 매우 귀에 익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예리하고 격한 통증이 전신을 훑어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얼굴을 돌려 기내를 빠르게 둘러보았으나 끝내 소리의 출처를 찾지 못했다. 340명의 승객을실은 747 점보기는 어둠을 헤치고
여전히 잠든 고양이 같은 규칙적인 조용한 엔진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듯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다.
사내의 코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옆으로 머리를 떨군 체 입을 반쯤 벌리고 잠이 들었다. 벌린 입에서 침이 흘러 내렸다.
승객들 대부분도 눈을 감고 있거나 잠을 청하고 있었다. 스튜디스가 다가와 기내 담요를 펼쳐 사내의 어깨와 무릎을 덮어주었다.
스튜디스는 다른 자리로 떠나기 전에 그를 보며 미소했다. 코고는 사내에 대한 양해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는 모니터를 보았다. 이제 세 시간 쯤 지나면 비행기는 엘에이 공항에 착륙할것이다. 남은 시간이라도 그는 잠을 좀 자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아내는 이미 잠이 든 것 같았다. 옆자리의 여자는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이어서 고인의 약력을 고인의 큰 아드님이 소개하겠습니다.”고인의 친구였다는 퇴직 원로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그의 형은 종교가 없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다. 친구가 교회에 나오도록 수 십 차례 설득했으나. 그때마다 완곡히 사양했다.
영혼이 있고 사후세계가 있고 하나님이라는 것이 있다면 왜 중동에서 종교를 빙자한 전쟁이 일어나 수 천 수만 명의 사람이 죽고 죽이느냐고 반문했다.
신이라는 게 있다면 한국에서 는 왜 김일성이나 박0희, 전0두환 같은 흉악한 인물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데도 응징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장례식은 묘지 내에 있는 영결식장에서 종교의식 없이 진행되었다. 종교의식이 없다 해도 목사가 진행하는 만큼 준 기독교식에 가까웠다.
한국에서라면 관습대로 유교식이겠지만 이곳에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기도도 하고 장례식장에서 주선한 금발의 백인남녀가 성가대에서 찬송가를 불렀다.
고인은 단 아래, 피칸 목재로 만든 관 속에 반신을 드러내고 눈을 감은체, 잠든 듯이 누워 있었다.
평소에 즐겨 입었던 밝은 회색에, 갈색이 섞인 캐시미어 천으로 지어진 양복 저고리 차림이었다. 보라색이 사선으로처진 넥타이와 잘 어울렸다.
장미와 백합, 백일홍의 붉고 희고 노란 화사한 꽃들이 관 주위와 영정의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관과 꽃 장식과 수의 일체를 졸지에 미망인이 된 그의 형수가 이틀 전 장례식장에 비치된 샘플을 보고 손수 골랐다.
앞자리에서 그의 큰 조카가 일어났다. 고인의 큰 아들이다. 미혼임에도 이마가 벗겨져 나이가 들어보였다.
고인의 잦은 해외근무로, 어린 시절,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은 조카는 생전에 고인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

  연단으로 올라간 고인의 아들은 금 새 눈가가 붉어졌다. 관속에 누운 아버지를 보면서도
아들은 아직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실감을 못하기는 고인의 유족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다.
미망인이 자식들의 재산 상속문제를 꺼냈을 때 고인은 화를 버럭 냈다.
<20년은 더 살테니 염려 말라>고 했다. 유족 누구나 그렇게 믿었다. 그의 형은 평소에 누구보다 자신의 몸 관리를 잘해왔다.
사업에 여유가 생기면서도 해외 나들이 골프도 치러 다니고 피트니스 클럽에 나가 운동도 열심히 했다.
자신의 건강에 더욱 자신을 가졌던 이유 중에 또 하나는 장수하는 가족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숨을 거두기 보름 전, 부부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왔고 김해로 가서 작은아버지를 찾아뵈었다.
6.25참전용사인 작은 아버지는 낙동강전투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몇 년 전, 작은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사촌들과 떨어져, 혼자 살고 있었지만 여든 일곱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도 정정했다.
그의 형은 김해의 불암산 산소에 들러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도 만났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여든까지 장수했으나 아버지는 술병으로 예순 넷에 죽었다.
그런 다음 대전 큰집에 들려 오래 만에 형제가 해후했다. 서울로 상경 한 뒤에는 퇴직한 은행친구들과 태백으로 가서 골프를 쳤다.
비가 내리는 스산한 가을 날씨에 야외에서 골프를 친 것이 무리였던 모양이다.
서울로 돌아와서 부부가 같이 심한 감기와 몸살로 핸드폰도 꺼 놓은 체, 외부와의 모든 연락을 끊고 일주일 동안 호텔에서만 지냈다.
쉬고나면 좀 차도가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부부는 나머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의 형수가 공항에서 그에게 전화를 했다.
“삼춘, 오늘 우리 미국으로 가요. 지금 공항인데 형님 전화 바꿀게요.”
“전화했는데 그 동안 어디 계신 겁니까?”
“우리, 감기가 걸려 일주일동안 호텔에서 꼼짝 못했어요..”
이어 수화기에서 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다. 여기 공항이다. 그 동안 감기 때문에 꼼짝 못했다. 또 연락하자”
“어쩌다가… 무엇보다 건강입니다. 건강에 조심하세요.”
그가 그의 형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언제나 팔팔하던 그의 형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가 무어라고 더 말하기 전에 그의 형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큰 조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큰 조카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저의 아버지는 1936년 2월, 할아버지 강영중과 할머니 박음전 사이에서 차남으로 일본의 오사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의 6.25전쟁을 겪었습니다. 1954년 한국의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동지상업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시고
부산에 있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하였습니다. 3학년 때 연세대학교 서울 본교로 왔고,
이듬해 일어난 4.19 학생혁명에 참가했으며 1961년 5.16 쿠데타를 겪었습니다.
1965년 당시 한국의 시중은행인 한일은행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며 이후 외환은행 창립 멤버로 참가했습니다.
1967년 4월, 저회 어머니 오희순과 결혼했으며 저와 동생 승과 명의 삼형제를 낳았습니다.
1982년 엘에이 외환은행 차장으로 일하다가 은행간부 딸의 혼수품 반입문제로 갈등을 빚은 후 사직했습니다.
이후 귀국해서 주식회사 원림에서 사장직을 수행하다가, 엘에이에 원림의 현지법인을 설립했고 1995년 원림에서 독립,
독자적으로 회사를 이끌어 오다가 2008년 11월 14일 향년 칠십 사세로 영민하셨습니다.”
조카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기도가 다시시작되었다.
고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기도가 이어지는 데 대해서 그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형의 죽음에 가장 애통해 할 사람은 동생인 그도 자식들도 아닌 그의 형수일 것이다.
모든 절차와 의식을 형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6일장만 해도 그랬다. 한국에서 3일장과 5일장이라는 것은 있어도 6일장은 없다. 형수가 6일장을 택한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조문을 올 사람들도 사람이지만 미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문객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머리를 숙인 체 그의 형의 임종 전후의 모습을 들려준 형수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의 형이 쓰러진 것은 심장이 완전 멎기 이틀 전이라고 했다. 형수가 아침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층에서 거실로 내려온 그의 형이 갑자기 <으->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벽에 기대 스르르 무너져 내리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뭔가 이상해서 달려가 그의 형을 뒤로 껴안았으나 그대로 의식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구급차가 달려와 병원으로 가서 응급처치를 했으나 피 찌꺼기가 뇌동맥과 심장 혈관을 막고 있는 상태로 이미 그의 형은 뇌사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형수는 그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고인을 임종하도록 생명 보조 장치를 걷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안타깝게도 그의 형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형수와 조카들이 자리를 비켜주자 그는 형의 볼과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아직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완된 볼 근육 때문에 자꾸만 벌어지는 형의 입을 다물게 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는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어금니를 악물며 참았다.
“형님이 삼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더 기다릴 수 없었던지 삼춘이 도착하기 세 시간 전에 당신 스스로 숨을 거두었어요.”
그는 갑자기 뒷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아찔한 충격을 느꼈다. 장례식 도중이라는 것도 잊은 체 하마터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를 번했다.
왜 그걸 미처 생각지 못했을까. 세 시간 전이라면 바로 그가 탄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의 성층권 아래를 지나면서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난기류에 휘말린 뒤였다. 그가 기창의 가리개를 걷어 올리고 기창 밖을 내다보다가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한 줄기 날카로운 빛이
그가 앉은 기창을 스쳐 지나가면서 동시에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시간이다.
그는 그 제서야 그 낯익은 목소리가 그의 형이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였음을 깨달았다.
형이 마지막 숨을 거두고 성층권의 영원한 안식처로 올라가면서 그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던 것이다.
(2009년 3월 29일 15:36분에 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