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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09년 [수필-노금희] 장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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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96회 작성일 09-12-2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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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양양엔 오일장이 열린다.
영동지역에서 알아주는, 제법 규모가 큰 오일장이다. 4일과 9일에 장이서는데 좁을 시장 길을 서로 어깨를 마주치며 걷다보면 사돈의 팔촌까지
여기저기에서 인사를 나누며, 반가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장마당은 그리운 이웃들과 만나는 소통의 공간이며, 지역민의 경제적인 통로인 셈이다.
근무처와 장마당이 가까이 있어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난 서둘러 점심을 먹고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며 계절을 미리 맛보고
또 내게 필요한 오일간의 부식, 제철음식을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누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양양을 벗어나서 근무하다 보니
어쩌다 한번 공휴일이거나, 휴가를 냈을 때가 아니라면 시골장터의 맛을 느끼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고 어느 곳에나 있는 유명 할인점에서 깨끗이 정돈된 그런 물건을 사기엔 익숙지 않다.
푸짐하게 산처럼 쌓아두고 100g에 450원, 뭐 이런 식이면 물건마다 가지고 있는 품새가 달라 양을 가늠할 수 없어 저게 싸다 비싸다 판단이 흐려진다.
적어도 시골장터에서는 좌판을 벌리고, 담는 그릇을 하나 준비해 두던가 아님 1,000원, 2,000원 단위로 한 무더기씩 무리지어 보여 주니
양을 눈으로 확인 할 수도 있고, 흥정을 하면 반드시 따라붙는‘덤’이라는 인심도 있지 않은가!

  오늘도 볼일이 있어 오전 휴가를 내고 잠시 짬을 이용해 모처럼 장터를 나섰다.
내가 고구마줄기 김치를 알게 된 건 전북 고창에서 시집온 친구를 통해서이다. 그 지방에선 고구마줄기로 김치를 담가 먹었는데
시집와서 그 김치를 담갔더니 시어머니가 처음엔‘무슨 고구마 줄기로 김치를 담궈’하시며 정색을 하셨는데 혼자서 다 드셨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시도해 본 것이 고구마줄기 김치이다. 고구마줄기 껍질을 일일이 벗겨야 해서 손품이 많이 가는 김치이기는 하나 붉은 생고추를 갈아 담그면
아삭함과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그런 여름철에 먹을 수 있는 고구마줄기 김치를 담기 위해 고구마 줄기를 찾아 다녔다.
그러다 물건이 싱싱해 보이는 고구마줄기를 발견했는데 주인 할머니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보통은 자리를 비우면 옆에 계신분이 대신 팔
아주기도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내가 보기엔 그 옆의 할머니 물건은 좀 시들어 보이고 상품이 좀 떨어져보여 망설였는데, 한분이 웃으며
“마수도 못한 이 할머니의 고구마순을 팔아 줘”하면서 주위 분들이 옆에 계신 할머니 물건이 더 좋다며 그걸 사라고 서로 권하셨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내가 원하는, 자리를 비운 할머니의 물건을 대신 나에게 주려고 했으나 주위 분들의 적극적인 공세에
나는 첫 마수걸이를 해드리게 되었다. 처음 사려 했던 고구마 줄기는 아니었지만 내가 첫 손님이었다고 생각하니 돌아서 오는데 마냥 기분이 좋았다.
공지영 작가가 평창에서 생활하면서 장터를 나갔다가 좌판을 벌인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옆의 물건을 사려했지만 시골장터에도 상도가 있다며
기다렸다가 사 가라고 해서 몇 분 기다리고 샀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난 그와 정반대로 주위 분들이 마수걸이 못한 할머니를 도와주려는
그 배려에 이끌려 조금은 소극적인 할머니의 첫 손님이 되는 서로 상황은 다르지만 시골장터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풍경이 아니겠는가.

  계절별로 내가 필요한 것을 살 때는 항상 정해진 그 자리엔 가면 어김없이 만날 수 있는 약속의 장소이고,
누구도 그 자리를 탐내거나 함부로 앉지 못하는 무언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오일장이다.
오래도록 양양 오일장의 명물이 되어 겨울이면 따뜻한 국물로 아이들간식이나 한끼 식사로 발길 잡는 어묵장수,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더덕을 곱게 손질해서 파는 더덕 아주머니, 매번 큰 양푼 하나 가득 메밀묵을 파는 친구 어머님.
모양은 좀 울퉁불퉁해도 손수 만든 한과를 가지고 나오시는 할머니, 봄이면 인삼 잔뿌리부터 여름이면 토마토, 포도 감, 새우젓, 귤 등
그때그때 계절에 따라 품목을 바꾸어 좌판을 벌리는 아주머니… 양양사람이면 누구든 익히 얼굴을 알만한 분들이다.
설악산을 뒤로하고, 한계령, 점봉산 일대의 지리적인 혜택으로 봄이면 참두릅, 개두릅, 다래순, 잔대, 고사리, 둥글레 등
여러 가지 산나물이 지천이고, 여름이면 계절 과일로 지역에서 많이 나는 복숭아, 옥수수,
가을이면 능이, 송이버섯과 검은색 곰버섯, 싸리버섯, 밤버섯 등 많은 종류의 버섯과 달고 시원한 낙산배, 그리고 겨울엔
가을내 갈무리해 말려두고 보관해 온 묵나물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바닷가가 가까이 있다 보니 봄이면 아주 잠깐 등장하는 지역특산물 부새우 젓갈, 갯바위에서 채취하는 지누아리, 보리해둥 ,서실, 돌김,
파래김 등 자연산 바닷풀은 장터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귀한 먹거리요, 잃어버린 입맛을 자극하는 최고의 향수인 셈이다.
그리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눈을 즐겁게 해주는 외지 장돌뱅이들이 벌려놓는 온갖 물건들로 만물백화점이 되는 장소가 바로 오일장의 매력이다.

  토요일, 일요일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속초에서, 강릉에서 심지어 지나가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활기가 넘치는 오일장.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해서 쇼핑하기 좋은 대형마트에 지역상권이 흔들리는 요즘이지만 우리네 부모님의 생활터전이었던,
복잡하고 다양한 삶 속에서 멀어져가는 사람내음을 느낄 수 있어 좋은, 우리 어머니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오일장.
그래서인지 나의 정서에는 아직도 재래시장이 편하다.
이런 오일장을 오래도록 친구처럼 마주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