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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09년 [수필-서미숙] 잡동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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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74회 작성일 09-12-2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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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나는 꼬박 밤을 새워서라도 물건을 정리하지 않으면 잠을 제대로 못자는 깔끔한 성격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장롱 문을 열고 일렬로 나란히 개켜져 있는 이부자리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나면 장롱 안은 다시 엉망진창이다. 정리할 줄 모르는 식구들 때문에 언제나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나 혼자였다.
집안 곳곳의 책이랑 살림살이들이 정갈하게 제 자리에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잠을 못 잤다.
침대보가 조금이라고 까끌거린다 싶으면 자는 사람을 깨워서이부자리를 털고, 배긴다 싶으면 잠자다 말고 이불의 주름을 펴고…
그 곤욕을 치르던 그는 몇 년을 참다 소리를 질러댔다.
‘난 걸레 들고 다니는 여자가 싫어. ’
왜 그랬는지 그때는 허구헌 날 나는 쓸고, 닦고, 탈탈 털어댔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쓸고 닦고 하니 동네 언니가 한소리 했다.
“너무 쓸어대면 복 달아난다.”
그런데 지금은 내 장롱 안이 뒤죽박죽이다. 이부자리도 대충 개켜져 있어도, 옷장 안이 마구 뒤섞여 있어도 그냥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

  이곳 아파트로 이사 와 나는 베란다를 작은 화실로 꾸몄다. 지물포에서 사온 나무무늬 장판을 깔고 이젤과 화구박스, 사물함 겸용으로 쓰던
커다란 깡통 그 위에 하얀 레이스보를 덮어 방석 하나 놓고 의자로 쓰면서 나와 베란다와는 그렇게 만났다.
뒤에 도로가 나기 전까지 내 작은 화실은 여름이면 풀숲에 숨겨진 풀벌레가 연주를 하고 커다란 산등성이 메아리가 장단을 맞추는 정겨운 곳이었다.
빗소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개구리의 합창이 시작되면 여름도 같이 왔다. 베란다 창문에 기다란 빗줄기 줄무늬 그림이 그려지고 그 사이로 들려오는
그들의 합창소리들은 어떤 때는 아름다운 자장가로, 어떤 때는 엄마를 찾는 구슬픈 소리로 내게 다가왔었다.
겨울이면 눈이 함박 쌓인 산동네 그 너머로 설악산 봉우리들의 정기가 아침마다 나를 깨웠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그 작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고, 가슴이쓰린 날은 달님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고,
외로운 가로등 불빛과 마음을 나누었다.
그러던 베란다가 이제는 창고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그곳에 쓰다 만 스케치북과 물감들, 그리고 헌 크레용,
버리지 못한 컴퓨터 모니터와 읽지도 않는 책들이 쌓여만 간다.

  나의 게으름을 탓하기 전에 아파트 뒤로 세워진 건물 때문에 그 산 위로 덮은 무성한 여름도, 눈 덮인 산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끌어붙인다.
그렇게 깔끔을 떨던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언제부터인가 옷장에는 가득찬 철 지난 옷들이, 거실과 베란다에는 보지도 않고 책들과
잡동사니들이 내 나이만큼 자꾸 쌓여만 가는데 난 그 것들은 정리하지도 못하고 털어내지도 못한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고 지금 보니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싶다. 아니 아직도 그 더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나는
온 사방 집구석 더러운 때들과 같이 살고 있다. 무슨 미련들이 그렇게 많이 남아 이 자질구레한 찌꺼기를 안고 사는 걸까?
아마도 삶의 고단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하고 돌아오면 온몸이 지친다.
나도 치우고 정리하고 싶지만 집에만 오면 눕고 싶고, 내일 하지 하는 습관으로 이젠 산더미 같은 짐들이 내가 사는 세월만큼 쌓여가고 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요즘엔 뭘 잘 버리지 못해 좀 버려보려고 책까지 사 본 적이 있다.
그 책의 첫 장의 문구는 이렇게 써 있다.
“우리는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공간을 막고 있는 잡동사니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앞으로의 삶을 즐기려는 것이다.
잡동사니는 종류를 막론하고 공간에너지의 유연한 흐름에 방해가 된다. 또한 거주자의 삶을 가로막거나 혼란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우리의 삶의 무게만큼 쌓여지는 잡동사니들은 물건뿐이 아니다.
마음속에 있는 잡동사니들도 많다. 지나온 과거에 대한 미련, 후회, 그리고 현재 내가 안고 있는 욕망덩어리들...
세익스피어의 오셀로의 비극도 질투로 시작된 그 욕망의 덩어리들이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하여 결국 아내를 살해하고 오셀로도 자살하고만다.
대부분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상대에 대한 욕심이 생기고 결국은 그 질투가 왕성해지면서 상대를 끝없이 의심하며
가지를 키우는 오셀로 증후군. 흔하게 의부증, 의처증이라고 한다. 결국 그 병은 진실조차 거짓으로 느끼며 자신만의 생각으로 치닿기 때문에
상대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자신의 욕심으로 인한 알콜 중독, 살인,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가끔 자신의 욕망덩어리를 잠재우지 못해 가치관, 의식, 도덕 부재가 되기도 한다.
그 욕심이 무엇이길래…
네 것, 내 것을 가리는 소유욕으로 싸움을 하고 인생의 종말을 맞기도 하니 말이다.
결국 내려놓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내 마음에 쌓아가는 욕심덩어리들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것이다’라고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실천하신다.
이제 나도 좀 버릴 것은 버리고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