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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09년 [수필-서미숙] 멘토(Men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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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83회 작성일 09-12-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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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멘토가 있으신가요?
우리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멘토는 몇이나 될까?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나 자신이 어떠한 판단을 할 때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게 된다.
이생각이 옳은지 저 생각이 옳은지 판가름이 안 나면 머리가 아프다.
올해는 왜 그렇게 구설수가 많은지 정초부터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오해를 하고 떠벌리고 다니고 나로 인해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한다.
나는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지기 일쑤고 황당한 노릇들이 자꾸 반복이 되었다. 잘해줘도 그 때뿐이고 뒤통수 맞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너무 착한가, 미련한가, 별 생각을 다 하며 살다 이제는 지쳤다.
그리고는 내 스스로를 위로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를 끄집어내어 질투다 라고 단정 하고 마음을 비우곤 한다.
그런 일이 자꾸 반복 되다 보니 사람 사귀는 걸 꺼리게 되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만나면 언제부터인가 바리게이트부터 치고 봤다.
나도 모르게 나를 위한 방어를 하며 살아왔다.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길을 가던 내가 잘못이냐? 거기있던 돌이 잘못이냐?
넘어진 사실을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인생길을 가다가 넘어졌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신이 길을 가면서 같은 방식으로 넘어지기를 반복한다면 분명 잘못은 당신에게 있다.”라고 했다.
그렇다 자꾸 내가 넘어지기를 반복한다면 분명 내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그 후로 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써 왔고 노력해왔다. 그래도 가끔은 넘어지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젠 멘토가 생겼다.
몸과 마음이 너무 아파 3일씩이나 끙끙대며 못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해 고3인 아들이 수능시험을 엉망으로 봤다. 다들 그 소위 말하는 일류대를 갈 것이라는 기대와 부모인 나도 그 흐름에 빠져
당연 그럴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만큼 공부를 잘하기도 했으니 기대는 더 컸다.
그러나 남겨진 결과는 그 과정이 잘하든 못 하든에 상관없이 되고 말았다.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나는 앓아눕고 말았다.
수능 보고 오는 아들의 어깨가 축 쳐져 엄마인 나를 보고 엉엉 울어대는 것이었다.
어깨를 다독거리며 차안으로 데리고 와서 달랬지만 아이의 그 설움의눈물은 난 잊을 수가 없었다.
노랗게 떠버린 얼굴, 금방이라도 돌아버릴것 같은 표정, 달래고 달래보았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로 서럽게 울기만 했다.
달래다 나도 같이 부등켜 안고 얼마를 울었는지… 세상이 막막하다는표현이 맞는 것 같았다. 그 당시는 죽고만 싶었다.
세상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끝나보였다.
더구나 그 중요한 시기에 한 모임에서 같은 동년배와 오해가 빚어 마음을 서로 아프게 하기도 하였으니
아들 녀석 시험 못 본 것이 다 내 탓만 같아 더 아팠다. 혼신을 다해 정성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시기에 엄마라는
난, 오해로 빚어진 마음의 상처에 혼을 빼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신에 대한 자책과 엄마인 내가 부덕한 탓에 아이의 인생을 망쳐버린
것 같은 생각에 혼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끼니도 못 먹고 누워있는 나에게 노선배는 가슴앓이 하는 미련한 후배에게 주려고
콩나물국을 끓여 가지고 왔다. 아마도 그 갸날픈 몸으로 씽크대에 서서 온 몸이 흔들리듯 파를 송송 썰어 정성을 쏟아부으며
안타까워 하셨을 것이다. 그 한 사발을 한 번에 먹지 못하고 세 끼에 나눠 먹어야 할 만큼 몸살을 앓는 어리석은 후배에게 끓여다 준 콩나물국.
난 아까워 남겨진 파, 고춧가루까지 싹 쓸어 그릇 밑바닥이 허옇게 보일 때까지 먹었다.
어지러운 마음들, 그리고 몸이 아파도 이제는 끄떡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다는 것은 아주 몹쓸 녀석인데 가끔 우리들의 가슴 속에 들어와 헤집어놓고 간다.
우리들은 또 누구나 늘 아픔을 한두 개 지니고 아파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로 상대는 상처를 받고
그냥 던진 한순간의 내뱉음으로 사이가 멀어지고 심하면 서로 앙숙이 되지 않던가.
우리 사람들은 만나면 대부분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 보따리부터 풀어놓는다. 가득가득 담아 두었던 보따리가 봇물 터지듯 우리는
수다라는 휴지통에 내다버리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솔직히 그 가득 담아둔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에 따라 많이 꺼리기도 하고 망설이며 도로 주머니를 꽁꽁 매어두기도 한다.
휴지통에 가득 쌓인 말들을 삭제시키지 않으면 나중에 서로 피 터질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피 터질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데, 말이라는 달콤하고 쓴 약이 무수히 돌아다니다
결국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끔 나도 누군가를 욕하고 싶을 때가 있다 정말 밉기 때문이다.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거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꺼내려면 상대부터 살피게 된다. 훗날 내게 돌아오는 뒷북이 두려워 적절한 인내로 자물쇠를 잘 채워
내 안의 휴지통으로 삭제를 시켜야 한다. 가끔 다른 휴지통에 버려 남아 있던 다른 쓰레기까지 덮어쓰기도 하니 말조심, 입 조심 해야 한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받아들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게 때문이다.
언어! 말은 무서운 것이다.
나한테서 나오는 많은 단어들, 그 언어들이 때론 남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나? 되돌아보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하고,
한때는 내가 벙어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내 입에서 굴리던 언어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해
내 입 안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너무 고통스러워 토해내어
다시 내 온몸을 상처 낼 지언정
침묵, 침묵하지 못함이
이젠 나의 모든 장기들조차
생채기 나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내 입에서 나간 구린내 나는 칼날들이기에

  순간 순간 내가 뱉어내는 나의 어리석은 말들로
다른 이들을 상처를 입힐까 조심 조심 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잘되지 않는 날들이 있다.
‘당신이 생각할 때 그 생각은 우주로 전송되어 같은 주파수에 있는 비슷한 것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전송된 것은 모조리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원점이란 바로 당신이다.’
론다 번의“시크릿”에서 읽는 내용이다. 내가 누구에게 한 이야기는 결국 우주를 돌다가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남에게 한 이야기는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요즘 나는 참 행복하다. 가까이에 현명하고 지혜로운 스승님이 계시니 말이다. 늘 나의 상담자가 되어주시고 현명하게 도움을 내려주시기도 한다.
몇 개월 전 오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뭔가를 해보겠다고 시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에 이력서를 넣었다.
무언가를 펼쳐보고 싶은 마음에서 큰맘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있는 일들과 자꾸 스케줄이 어긋났다.
어떡하든 있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일정이 잘 조정이 되지 않는 관계로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담당자의 황당한 시선과 난감해하는 모습에 너무 미안하고 죄송함을 금할 길 없었는데 과장님은 그만둔다고 회식까지 시켜주셨다.
마음이 참 따뜻한 분들, 몸 둘 바를 몰랐다. 난 늘 어디서나 대접을 받는 행운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더더욱 그렇게 느끼고 있다.
행정직에 있는 사람들이라 자칫 답답하고 고지식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참 따스했다.
개관도 하기 전에 그만두는데 뭣이 이쁘다고 말이다. 못 먹는 술, 와인을 한 잔 했다. 기분이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행복하다.
얼마나 행복한가!
어찌 보면 인생은 한 순간인가도 싶고 불꽃 터지듯 파파박 번지기도 하고 가슴팍을 지르기도 하니 가끔 뒷걸음쳐 도망가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멘토가 생긴 후에 알았다. 더구나 희망이란 녀석은 우리가 많이 슬퍼할 때 슬쩍 또 다른 희망을 갖고 다가오기 때문에 가끔 사람들은 세상 살 맛이
이런 것이구나 하지 않던가, 나도 한때는 남의 이야기만 들어주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만나기만 하면 내 이야기만 한다. 그렇다고 그들하고 대단한 우정이라든지, 사랑이란 이름의 질긴 연대감도 없으면서 그저
공허한 만남과 흩어짐을 되풀이하면서 낯선 사람들이 아는 사람들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지금 내 곁에는 내 아픔을 당신의 아픔처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멘토가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