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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09년 [수필-이은자] 신뢰 그리고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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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12회 작성일 09-12-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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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일은 아직 비밀이다. 될 수 있으면 당일까지도 누설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비밀이란 없다. 다만 폭로되는 그 시점이 다를 뿐이다.
속초고교 박 동창은 속초 상도문에‘돌감자 장학회’현판을 걸고 ,선대(先代)가 물려준 삶을 사는 중이다.
그에게 전화를 넣으면 핸드폰 호출 음악 때문에 슬며시 웃게 된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앳띤 여자아이 목소리로 받는다. 곧이어 굵직한 남정네의 목소리가
- 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그리고서야 o o 씨_본인이 연결된다.
우리는 그를 돌감자라고 부른다.
이 나이에 이름을 정스레 불러주는 벗이 있어 잠시나마 행복하다.

  달포 전‘돌감자’가 뒷집 친구에게 흘린 정보인데 내가 알아버렸고 즉시 손쳐들고 나도 데려가 달라 졸랐다.
그는 잠시 당황한 듯 목소리를 고르더니“알았다. 자신 있으면 동참하라. 자세한 사항은 차차 알려주겠다.”
누가 들어도 말릴 일이란 사실을 잘 안다. 우리가족이 들으면 엄히 꾸짖어 원천봉쇠 당할 만용이리라.
일단 대장에게 허락 받아 놓은 일이고 보니 절대 보안이 유지 되어야만 결행 할 수 있었다. 보름이 지났다.
주일아침 예배당 로비에서 만난 지인이 그 사실에 놀랐다며 내게 직접 확인하고 나섰다. 나도 긴장됐다.
대답대신 누구에게 들었냐고 되물었다. 문화원 이사회 자리에서라 했다.
—그 누님은 안돼,절대안돼, 미쳤어?— 7회 동기모임 장소에서 돌감자는 내 일로 인하여 집중공격을 받은 모양이다.
천기누설은 다행히 내 측근이 아닌 원방에서 야금야금 퍼져 나가고 있었다.
기왕지사 내친걸음 나는 서울에 사는 후배 자야씨를 불러 동행의 의사를 타진했다.
몇 년간 속초 오려다 나와 사정이 늘 엇갈려 벼르고 있던 후배는 단번에 결정을 주었다.
나는 후배에게 워밍업을 구체적으로 당부하고 나도 평상시 보다 더 강도 있게 걷기 운동을 했다.
남들이 만용이라 하리만치 내 자신에겐 모험이고 도전이다. 10여 년 동안 치른 중병과 투병, 그리고 낙향.
법적인 노인인데 무엇을 도모해도 과연 되는 일일까?

  받아놓은 날은 빨리 다가오는 법, 어느덧 일주일 남겨둔 날, 돌감자는 그간에 시달린 구설수에 슬슬 겁이 생겼는지
내게 전화하기를“내일 청대산 정상에서 정오에 만납시다.”기다렸던 것처럼 나도 그가 염려하는 부분을
확인시켜 줄 기회로 알고 반겼다. 이튿날 우리는 사전 약속도 없었는데 산행 초입에서 만났다. 함께 정상까지 오르고 내려왔다.
“나보다 더 잘 내려오는걸……”나는 합격이란 뜻으로 받아들였다.

  6월5일, 즉 하루 전에 서울에서 후배가 우리 집에 왔다. 그와 미리 입단속 해놓은 터이지만 이쯤에서 산행의 윤각은
내 남편에게 말해야 도리에 맞는다.
“내일 우리는 돌감자 장학회 일행을 따라 1박2일 일정으로 설악산 비선대, 울산바위, 낙산바닷가 등지로 다녀올 예정입니다.
당신이 너무 걱정할까봐서 미리 말하지 못했어요.”거짓말이 섞였다.
6월6일 안개비 내리는 새벽 5시 30분, 내 집 APT 쪽 대문에서 돌감자는 나와 후배를 차에 태웠다. 따라 나와 인사하는 내 남편에게 그는
“업어서라도 잘 모셔갔다 오겠습니다. 힘이 딸려 산에서 죽으면 잘 묻고, 표지석 만은 확실하게 해놓고 오겠습니다. 허허......”

—돌감자들, 대청봉에 오르다—.
  돌 위에 감자 꽃 피우자, 산비탈 돌 틈 사이에서 어렵사리 예쁜 꽃을 피우는 감자 꽃, 배고픔을 달래주는 양식이 되는 돌감자 같이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라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자는 취지로 발족한‘돌감자 장학회’장학금 전달식 하려고
다섯 대의 차에 나눠 타고 상도문‘돌감자의집’을 떠날 때 차엔 비상깜빡이를 켰다.
오색약수 등산로 입구까지 약 40분 걸렸다.
전국에서 흩어져 사는 돌감자 가족33명을 포함, 최종적으로 장비, 인원점검을 마쳤다.
학생팀이 맨 앞에, 다음은 청년팀, 후미에 실버팀 일곱 명이 따랐다. 듣던 그 대로 오색에서 오르는 코스는 거의가 돌계단이였다.
서울 도봉산 등산로 중 구기동에서 비봉으로 오르는 길과 닮았다. 잠시나마 평로 또는 내리막이 없는, 절대 상향 길이다.
시야는 아주 조금씩만 열려서 계곡의 깊이라던가 수목의 펼쳐짐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핸드폰은 터졌다 막혔다를 거듭, 배터리가 금세 방전되곤 했다. 기압관계라고 한다.
실버팀은 학생팀과 점점 간격이 벌어졌다. 안개비와 구름 속을 한발 한발 성급하게도 말고 게을리도 말고 성실하게,
차근차근 걷고 또 걷는다. 나와 후배는 자주 쳐진다. 그럴즈음이면 돌감자는 힘든 체를 하며 쉬어간다.
초코렛, 오이, 다시마를 서로 나눈다.
대장 돌감자는 정상 1km를 남긴 그 지점에서 때 마침 열린 핸드폰으로 청년 둘을 불러내려 나와 그의 배낭을 넘겼다.
미안코 고맙기는 그지없다.
등에서 짐을 풀어내니 날아갈듯 하다. 짐은 거의가 먹을 것이다. 먹고사는 물건은 하나같이 무게가 나간다.
그래서 생명을 받쳐 줄 수 있는가 보다. 산행에선 다른 사람에겐 의존 할 수 없다. 각자의 최선의 품목만을 엄선했고
육체적으로 최대의 극기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금기를 깨고 나는 짐을 다른 이에게 떠 맡겼다. 떠날 때 이미 폐끼칠 작정을 했었다.
염체불구 하고 따라 나선 것이니까. 서울에 살 때 대청봉을 못 가본 내게 당신 속초사람 맞어 하는 소리가 정말 싫었다.
죽어도 꼭 한번 오르고 싶었다. 돌감자 박동창이라면 어찌하든 나를 완주하게 도와줄거란 믿음이 있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다섯 시간을 걸어서 드디어 해발 1708km 대청봉이란 표지석에 도달했다.
정상엔 안개와 구름은 간 곳 없고, 돌작 바위에 앉은 우리들 머리위로 햇볕만 따갑게 내리 쏟아졌다.
이미 도착해 있던 학생들과 청년들이 실버팀 도착을 환호와 박수로 맞아주었다.
네 명의 학생이 프랭카드 양끝을 당겨 쥐고 섰다.
<제 34돌 돌감자 장학회 가족모임. 2009.6.6(토) 설악산 대청봉> 장학금 수여식은 어느 행사나 따라 붙는
관료적 정치적 겉치레가 없었다. 생색내기 인사치레도 없었다. 아주 상큼하고 순수했다. 역시 내 동창은 돌감자 다웠다.
대청봉 정상에 머문 시간은 한 시간 남짓, 학생팀과 청년팀은 당일로 하산이다. 실버팀 7명만이 소청봉 휴게소에서 1박 할 예정이었다.

  중청봉을 지나 소청봉휴게소 우리의 숙소는 외딴 방으로 퍽 조용하여 맘에 들었다.
곧 해가 지려 한다. 신선도 한 폭을 보는 듯, 낙조의‘용아정사’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며 일몰에 따라 묻혀가고 있었다.
방은 어둑하고 일곱명이 둘러앉으니 꽉 찼다. 버너에서 안주거리가 끓고 각자 앞에 놓인 종이컵엔 술이 채워졌다.
그런데 좌중은 무거운 기류에 눌려 있었다. 정상에오른 성취감 같은 들뜬 기분은 아예 꼬리를 내렸다.
저녁 6시경 돌감자 집에서 걸려온 전화, 청년팀 리더 그가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무슨 사고가 아니냐?
불길한 예감으로 좌중은 의기소침 그대로였다. 그는 우리가 이동할 때 내 짐 절반을 덜어 중청봉을 거쳐
소청봉 휴게소까지 내려놓고 거슬러 중청봉에서 양폭 산장 코스로, 앞서간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의 산행 실력이면 능히 지금쯤 일행과 함께 있을 사람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는 필경 조난당한 것일까?
산엔 밤이 일찍 찾아온다.
돌감자 집에서 거듭거듭 확인 전화를 보내오지만 조난자의 핸드폰은 죽어있었다.
마침내 돌감자는 설악산 관리사무소. 산악구조대, 등산로 감시초소에 조난사실을 타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잔에 술을 부어 원샷, 원샷이다.
“ 난그녀석을믿어, 아까보니신발한쪽창이반쯤너덜대던걸. 아마도 그게 보행을 더디게 하는가 봐. 좀 기다려 보자구 설마 무슨 일 나겠어?”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분명 그는 불안해 하고 있었다. 술은 더 자주 털어 넣고 목소리는 자꾸 커져만 갔다.
술주정 아닌 너스레를 떨고 있는 것이다. 초조한 시간이 밤9시를 가르키고 있기까지 조난자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장 아내의 전화는 이제 울음이었다.
“아직도요? 내 뭐랬어요. 비도 오는 날에 남의 집 자식들 위험하게 떠나지 말랬잖아요. 당신은 왜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행사를 하는
거요. 정말 그 사람에게 무슨일 생기면 당신 어떡 할래요?”
그 아내의 채근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돌감자 장학금 수여식을 늘 그런 식으로 치러 아내의 애간장을 다 태운다는 사실을 나는 그 밤에 처음 알았다.
여름이면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겨울엔 눈보라 속 산행으로… 좀 안전하고 평범한 수여식을 하면 안되냐고…
대장은 쓴 술잔만 연신 비울 뿐 아무 대꾸도 못한다.
나 때문이다. 염체없이 따라온 것을 무척 후회했다. 나를 도우려다 생떼같은 청년하나가 이 칠흑 같은 밤 산속에서 생가가 오리무중이다.
대장이 한 마디라도 나를 원망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눈길조차 없었다.
아! 그때, 밤 9시40분 대장의 전화가 울렸다. 순시초소와 구조대 합작으로 조난자 위치 신원확인,
들것에 담에 산 아래로 예인중이란 낭보였다. 방안에 환호성과 박수가 넘쳐났다.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고 큰 상해만 아니기를 빌었다.

  이튿날 새벽‘용아정사’에 비추이는 일출 또한 장관이었다. 나는 비몽사몽간인 듯 했다.
오전7시 출발, 하산하는 코스는 소청봉휴게소-봉정암-백담사로 정했다.
내려오는 길에선 성취감과 자유로움이 완연했다.
고산,준봉, 계곡에만 자생하는 수목, 꽃들을 감상하며 걸었다. 청대산,
외설악에서 이미 피고 져버린 찔레, 때죽나무꽃부리, 산목력, 수수꽃다리 심지어 철쭉까지 보는 감동은 어찌 다 말로 하랴.
그 천연한 색깔이며 짙은 향이 걸음을 더디게 했다.
봉정암을 지나면서 후배는 자꾸 처쳤다.
그의 행보에 맞추다 보니 7명중 4명은 이미 보이지 않는 거리로 간격이벌어졌다.
최종 집결장소를 백담사로 정한바 돌감자는 우리 둘의 앞장을 서서,당겼다 늦췄다를 반복한다.
소청봉을 떠나 6시간 경과한 시점에서는 돌감자도 안보이고 우리 둘만 어정어정 걸었다.
간간이 마주 오르는 등산객에게 이정(里程)을 말해주며 응원하고, 우리를 앞지르는 등산객 몇 팀에게 길 비켜줘 가면서
우리 둘은 도무지 무섭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 앞 어드메 쯤엔 돌감자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긴 출렁다리를 만났다. 후배가 손을 젓는다.
“선배님, 저기 저 배낭 퍽 눈에 익은 배낭이네요. 혹시 대장님 거 아닐까요?”
다리 중간쯤에 보이는 배낭은 마치 권투연습 샌드백처럼 길죽하고 배가 불룩했다.
다가가 보니 배낭 뒤에 돌감자가 큰 대자로 누워 나직이 코를 골고 있었다. 우하하하.ㅡㅡㅡㅡㅡㅡ
우리의 웃음에 깬 그는 따라 웃기를 한참이나 더했다. 우리의 믿음대로 그는 끝까지 우리를 업고 갔다가 업고 내려온 셈이다.
산행엔 반드시 훌륭한 리더가 있어야 한다.
나는 감히 내 발로 대청봉 1708Km를 완주 했노라 말할 수 있을까? 내 짐 때문에 조난당하고 인대가 상해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아야 할
그 청년의 희생, 쳐질 적마다 미안해하지 않게끔 내색 않고 기다려 주는 돌감자의 배려, 안전을 잠시도 등한시 않는 리더로서의 긴장.
그 모든 신뢰와 애정과 배려에 업혀서 완주 할 수 있었음이다.


추신: 남자동창들 왈
      은자씨를 오색 어느 주막에 맡겨두고 저들끼리 정상까지 갔다가 돌아 올적에 다시 데리고 왔을 거야.
      내 삶 속엔 자락마다 뭇 익명의 사람들의 수고와 땀이 거들어 주었다. 그것들이 빚이라면 못 갚고 죽을 채무이리라.
      우정, 사랑의 빚도 그러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