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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09년 [수필-서미숙] 동행2 <동행1: 갈뫼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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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51회 작성일 09-12-2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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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감사야 말로 당신이 가진 큰 무기였습니다. 그것 가지고 외로움이나 허망함에서 비켜가셨습니다.
나는 아직 60대라 힘도 조금 남아 있고 읽을 수 있고, 쓸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어서 절대고독에 직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처럼 문맹, 귀가 절벽일제, 시력이 한계에 이를 때까지 살아야 한다면 당신에게서 배운이 비결에 기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두렵습니다.

  간밤에 가을비가 약간 내렸습니다.
우리가 같이 붙이던 밭, 개울물 소리가 청아합니다. 개울 따라 걷다가 당신의 그 꽃신을 보았습니다. 울 바재에 핀 담홍색 줄당콩 꽃입니다.
바로 그 색 꽃신이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밭둑에 코스모스나 깨꽃 같은 모종을 심으면 얄잘 없이 뽑아 버리시고 콩 한 톨이라도,먹을 거 심어야 한다고 단호히 땅을 경외하였지요.
농부에게 섣부른 낭만을 용납하지 않던 시절을 살아낸 당신다운일이었죠.
물소리에 당신의‘감사’가 생각납니다.

<가차이 개울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지.>
  당신은 소싯 적에 오갈 데 없는 친정아버지를 모셔 와야 했고, 중풍과 치매노인을, 그 당시풍조로는 매우 어려운 친정 부모를 맡았습니다.
믿며느리요, 서슬 퍼런 서방, 이웃눈치 속에서 4년 동안 시중들었습니다.
“집 앞에 좋은 개울을 주셔서 병자가 밤새 뱉은 가래침이며 시도 때도 없이 배설하는 똥……
급히 흐르는 이 개울에다 헹구면 금세 떠내려 가 주었으니 말이다.”
그 개울물을 90세 되도록 감사하는 당신. 이 개울은 청대 산에서 발원, 수도국을 끼고 논산 마을을 휘돌아 청초호에 들어갑니다.
호수공원 분수대 앞 유입구는 바로 이물 줄기여서 그 모래톱에 새들이 많이 앉습니다. 청초호 유입수 중 제일 수질물은 물이지요.
<장맛비 중에서 돌다리 놓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지!>
“아들은 어리고 남정네 손이 없이 농사지을 적에 저 건너 논두렁을 건널 방도가 없어 밤새 새우잠 자고 난 아침에
흙탕물에 떠밀려온 큰 돌멩이 하나, 징검다리를 놓아 주신 하나님 손길이 어찌나 감사했던지.”
가을이 깊어갑니다. 방축과 산자락에 구절초 푸른 꽃, 감국 노란 꽃이 만개했습니다.
빈들에 군데 군데 콩단과 깨단이 외줄로 서있을 뿐인데, 당신의 밭에만 그것들이 노랗게 단풍들어 오스스 떨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 딸이 손 목 풀려서 여태 뭇 베는 모양입니다.
3 년 전만 해도 당신과 함께 추수한 것들을 앞에 놓고 자축의 밤을 가졌었지요.
겨울을 재촉하는 찬바람이 문틈을 흔들고 떨어진 낙엽들이 버스럭 대며 몰려다녀도 집안에서 우리는 행복 했지요.
서리태 한말, 들깨 말가웃, 강남 콩 팥 각 한되, 무우다섯 자루 고구마 세 박스, 늙은 호박 열 덩이, 옥수수 고추, 가지 등등......
<우리가 이대로 내년에도 농사를 할런지!> 당신의 예측이 맞아서 그 다음해부턴 당신은 밭 둑에 앉아 훈수만 두시고 당신 둘째 딸과 내가
씨를 심었지요. 하지만 누가 농부이건 간에‘농사는 하나님께서 하신다.’가 맞지요.
‘농부는 하나님께서 밤사이 해놓으신 일에 대한 증인일 뿐’입니다.
우리가 약간의 노역을 했을 뿐이고 자고새면 가지가 주렁주렁, 고추가 다닥다닥, 호박 잎새 뒤에 애호박을 앉혀놓는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그 손길을 느끼며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몸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스러져가도 총기 하나는 어림도 없던 당신이, 추수감사 자축하고 얼마 뒤에 내 집 창을 세차게 두드렸습니다.
우리 집 좀 와봐. 아직도 냄새가 나는가? 부활절이 곧 다가오는데 집안에 냄새나면 되겠나?
그 사흘 전 나는 당신 집에서 새나오는 역한 냄새의 근원을 찾아서 치우고 락스로 닦고 종일 문을 열어 환기 시켰습니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게 당신은 냄새 맡는 신경이 죽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웬 부활절? 기어이당신도정신이오락가락하려나봅니다.
“ 아직멀었어요. 지난봄부활절 때 산불이 났고, 저 건너 마을 사람들이 불에 쫓기다 돌아온 개 잡아 먹었다고 야단쳤잖아요.”
“맞다 그랬지. 지금 가을이지 내 정신 좀 봐 호호……”
그날 나는 하루 종일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그 뒤로 계속 심화되는 당신의 정신은 아파트 비상계단 2층에 머물지 못하고 상층에서 헤매다 주민들 손에 이끌려 경비아저씨에게로 왔습니다.
그 일도 겁이 나서 걷기 운동조차 머뭇거렸습니다.
당신을 위해 내가 한 일은 고작 미끼마우스 대형 스티커를 2층 계단 입구와 북도 출입문에 붙여 놓는 것이었습니다.
자식들의 성화를 뿌리치며 이곳에 눌러 살게끔 편들었던 일을 ,내가 포기한 것은 전기 밥 솥에 속 용기를 빼낸 채 쌀과 물을 그냥 부어
스위치를 누른 일로 정전이 된 그날 저녁때 였습니다. 더는 혼자 살아낼 수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지난해 초겨울 당신의 자손들이 모여와서 89세 생일을 차려드리면서, 마치 송별연 같았습니다. 그 끝에 아들차로 서울로 아주 가셨습니다.
올 봄 새싹이 돋고 밭에 씨를 넣을 즈음 당신 아들은 승용차 뒷좌석에 요를 깔아 어머니를 누이고 고향산천을 구경시키려 왔었습니다.
그날 나를 찾아 안고 눈물 글성이셨습니다.
그날이 사실상 당신과 마지막 이별인 셈입니다.

  나도 칠십을 바라봅니다.
내게도 동행하는 가족과 후배들이 있습니다. 내가 떠난 자리엔 어떤 아름다운 추억이나 흔적이 남게 될런지요?
해마다 씨를 넣는 봄날에, 추수 끝낸 밭가에서 당신이 많이 그리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