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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09년 [시-정영애] 목욕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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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63회 작성일 09-12-2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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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서


거울 앞에서 옷을 벗는다
거칠고 푸른 배춧잎을 벗겨 내듯
한 잎 한 잎 나를 떼어 낸다
배추 속, 노란 고갱이 같은 중심에 서면
손바닥 하나로 가리던 세상이 있었는데
지금, 내 몸은 허허벌판이다

뜨거운 탕 속에서
미지근한 내가 소금처럼 녹는다
나른하게 부유하는 몇 겹의 시간 위로
아이들의 낮잠이 동동 떠다니고
멸치젓 칼칼한 김치가 익어 가면
드디어 꽃잎처럼
벌어지는 나
접시꽃 같은 여자
함박, 물을 털며 앉아있다
허공을 더듬듯
등 뒤의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 가늠하며
닿지 못하는 손끝으로 걸어 온 길을 밀어본다
생은 거품이 너무 많아서
오래도록 비눗물을 씻어 내린다

다시
거울 앞에서 옷을 입는다
살과 살 사이 어린 날의 하품이 꼬물거리고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들리는
낡은 주름치마 같은 시간들 모아
옷 속에 밀어 넣는다
조각 천을 잇대듯
흔들림을 박음질하며 걸어온 생이
주름치마 속에 겹겹이 접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