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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4년 [수필-이은자]아라베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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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갈뫼
댓글 0건 조회 2,912회 작성일 05-03-2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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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에사는친구가보내온편지는“나비같이가벼운여자”로시작하여속
초 8경을 절절이 적어 나가더니“척산온천장에서 그대의 아라베스크 춤은 아
름다웠는데 왜 이리 슬픔으로 기억 되는지요?”라고 이어지고 있다.
그러고보니요몇년새나는아라베스크를자주춘다. 그것도꼭온천장처럼
넓은탈의장이거나탕주위에서였다. 알몸에타월한장걸치고서.
중년이 넘으면 대다수 여인들의 몸은 풍만해진다. 그게 정상이다. 남들이 허
벅지를감으면될만한타월로나는허리를한바퀴휙감는다.
작년겨울서울에서선배여남은명이속초대명콘도에여장을풀었을때나도
동행하였다. 지나간30여년을우리는‘운경합창단’멤버로혈육보다더자주만
나고애환을나누던사이다. 나의오랜투병과낙향에연민이많은분들이다.
해수사우나에서였다. 내알몸을보는순간하나같이안타까워탄성을토하는
선배들에게나는그아라베스크를추어보였다. 35kg 깡마른사지는춤추기에
안성맞춤. 난이제괜찮으니내걱정마시라고몸으로보여드려재롱을떨었다.
선배들역시처음엔박장대소하더니끝내는내손을잡고눈시울이불콰하니
울먹이셨다. 나는발레리나가아니다. 그저좋아할뿐이다. 그리고관심이많을
뿐이다. 내가추는아라베스크는그저흉내에불과하다.
80년대 중반 어느 해 였던가‘마고트 폰테인’의 내한 공연을 보면서 그가 당
시 60세도 훨씬 넘은 여인이라 믿어지지 않았다. ‘백조의 호수’그는 프리마돈
나였다.
쏠로는말할나위가없고뚜엣을추는그자태는두고두고내게희열과희망으

로남아있다. 청초함고즈넉함아름답다기보다거룩하다말해야옳다. 그의동
작에는군더더기란찾을수가없고절제된미는나로하여금숨고를틈조차주
지않았다. 그의공연에앞서TV에서그가서울시내관광하는모습을방영했었
다.
그의 상대역 남자무용수는 아들 뻘 밖엔 안 되는 젊은이었다. 기자의 질문에
그남자는자기가‘폰테인’선생님과뚜엣을추게된일은자기일생에서가장큰
행운이라 말했다. 그러면서 길을 걸을 때 언제고‘폰테인’오른편에서 한 두 발
짝뒤떨어져걷고있었다. 존경의표현인것을알수있었다.
‘마고트폰테인’은 본명이‘마가렛후캄’이다. 1919년영국서레이지방에서
태어났으나어린시절을거의미국과중국에서성장했다. 그시기어머니와함께
‘안나파블로바(1881~1931)’의춤을본것이계기가되어발레에입문한다. 15
세에‘로열발레단’에입단, 21세에그곳수석무용수가되어72세나이로사망
할때까지, 그후로지금까지도‘로열발레단’의전설적인물로기억되고있다.
그는천재성보다는노력에의한우월성에높은평가를받은예술인이었다.
그가발레의상을입고토슈즈를신고무대위에그대로서있기만해도그자
체가 춤으로 현현된다 하리만치 카리스마도 지녔다. 요란한 몸짓이나, 부산한
테크닉이아니건만관객들이빠져들게하는비범함이있다. 간결하나힘있고날
카로움속에도따스함이있다. 그의명성때문만은정녕아니다. 무얼까그힘은
어디서올까?
나는 꽤 오랜 기간을 글 쓰기에 매달렸다. 하지만 대가들의 치열성엔 근처도
못가본게사실이다. 그래서아직내글은어설픈동작이온갖군더더기로가득
메워져있다. 그사족(蛇足)은곧나의미숙이요욕심이란것을이제어렴픗이나
마알게되었다.
학창시절나의무용선생님이하시던말이자주생각난다.
“아라베스크를보면그앤어느정도인지알수있지.”
발레에서 그 보다 힘든 스텝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샵베, 곱베, 연속회전,

순간정지……. 거기비하면한발딛고한발뒤로뻗고, 양쪽팔은90도혹은대
각선으로쳐들면되는그흔한동작을가지고오디션보고등차를매기는이유를
그때는이해하지못했다. 아무나흉내내기쉬운그동작을최고의미(美)로, 예
술로연출할수있는무용수만이프리마돈나로선택된다는사실, ‘폰테인의아
라베스크’는바로그걸말해주었다.
늦은등단, 그리고오랜습작. 아직도내글은많은사족을떼내지못한채수
필가대열에이름을얹었다.
잘쓴글들에보면여러말늘어놓지아니하고도정곡을찌르는어휘를골라
가장 필요한 자리에 심어 놓았음을 알게 된다. 군살이 전혀 없는,꼭 할 말 만을
하는그런깔끔함을나는부러워한다. 내글에욕심의덧칠하기를벗어날날을
바라보며,나의건강을안쓰러워하는벗님네들에게살아있음을안심시키기위
해나는이후로도종종그슬픈아라베스크를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