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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09년 [시-채재순] 주먹왕 박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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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31회 작성일 09-12-2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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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왕 박춘식


기억하는가, 영화 보기 전 우리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옛날
의 영화포스터 오촌 당숙은 영화 포스터를 그렸지 문희, 신성일,
엄앵란 당시 은막의 스타 얼굴을 알게 된 건 순전히 당숙 덕이었
지 국민학교 4학년이 그의 학력의 전부지만 작은 사진 한 장 달
랑 들고 그 커다란 포스터의 배우의 표정을 생생하게 그려 후끈
달아오르게 하던 붓질, 어린 내가 엄마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영
화를 볼 수 있었던 건 당숙이 건넨 이른바 공짜표의 힘이었지 연
애시절 애인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공짜표로 들어간 영화
관에서였지 당신의 무기였던 맨주먹은 컴퓨터에 의해 무참히 밀
려났지 바야흐로 그의 첫 번째 전성시대가 지나가고 있었던 거야
그의 손은 놀이공원 풍화된 페인트칠로 바빠졌지 어려서부터 손
을 놀리지 않았던 그는 가족들에게 생밤이나 호두를 맨주먹으로
깨서 먹이곤 했는데 손 단련을 위해 틈틈이 돌을 깨고, 무쇠 솥
뚜껑을 깨곤 했던 거야 맨손으로 못 박는 모습은 우리 눈을 질끈
감게 했지 <기인열전>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부각된 것도 굳은
살 박힌 그의 맨주먹이었지 여전히 주업은 놀이공원 페인공이었
지만 특설무대에서 더욱 빛났던 주먹왕 박춘식 요즘은 빵집에서
방 만들기 여념이 없다는 후문이 들리는데 가끔씩 동해 파도 소
리 들으며 격파를 하고 있는 그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더
군 그 말을 듣는 순간 휘어진 외로운 등 곡선이 떠올랐어 험난한
세상이 학교였던 주먹왕 아무도 가르쳐준 적 없지만 독학으로 알
게 된 세상, 어느 날 제사를 끝내고 그 솥뚜껑만한 손으로 악보도
없이 전자오르간으로 구슬프게 연주해 우릴 울렸지 악보를 읽을
줄 모른다는 게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 짐작하겠지만
무쇠솥뚜껑, 영화 포스터, 녹슨 못이 그의 교과서였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