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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2010년 [희곡-최재도] 멈춘 곡선의 우아한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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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86회 작성일 10-12-29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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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장 인 물
남자 : 넉살 좋고 입심 좋은 시골 장돌뱅이, 새점(鳥占)장이.
여자 : 세련되지만, 심통 사나운 사진 작가. 시종 쌀쌀맞다.

무  대
한적한 시골 버스 종점의 변소 앞이다. 버스 종점이라고 하지만, 1시간에 한 대 정도가 다니는 아주 한적한 곳 이므로, 그저 약간 너른 공터에 지나지 않는다. 한쪽 구석에 매표소 겸 구멍가게가 있다. 혹은 무대가 상징적으로 처리되어도 좋다.
좀 떨어진 또다른 구석에 낡고 허름한 화장실이 있다. 원래는 남자용과 여자용이 구분되어 각기 하나씩 있었으나, 현재 남자용은‘사용불가’라는 팻말이 붙어 있어 폐쇄된 상태다.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이곳에선 오직 여성용 하나뿐이다. 막이 오르면, 화장실 앞엔, 차례를 기다리는 듯한 여자가 큰 나무에 기댄 채 신문을 읽고 있다. 고급스런 사진기를 어깨에 걸고 있으며, 행색으로 보아 상당히 세련된 도시 여자임에 틀림없다. 남자, 이때 객석 뒤에서부터 나타나 황급히 무대에 오른다. 약간의 짐을지고 있으며, 손엔 새장도 들고 있다. 그러나 막상 화장실 앞에 당도해서는,‘사용불가’라는 팻말에 상당히 낭패스러워 한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른다.

남자 : 오매, 이게 뭔 소리여? 왜 이렇다여? (여자를 향해) 보소이, 이 그 와 이렇게 된 거라요?
여자 : (대꾸없이, 여전히 신문만 본다.)
남자 : 제기럴, 예까지 기껏 뛰어 왔는디. …닷새 전에만 해도 말짱했는디야. …젠장, 여길 함께 쓰는 수밖엔 없겠구먼이.(남자, 여자 화장실 쪽으로 슬금슬금 옮겨 선다.)
남자 : (새장 속의 새가 요란히 울자, 짜증스럽게) 아따, 조용히 좀 해라. 넌!(여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여그도, 아직 멀었어요이?
여자 : (대꾸없다.)
남자 : (다소 언성을 높이며) 보소이, 여그 들어간 양반, 나올라민 아직 멀었어요이?
여자 : (여전히 대꾸없다.)
남자 : (언성을 높이며 ) 보소이, 사람 말이 안 들리요이? 그라케 신문만 보지 말고 여그 이 사람도 보면서,
여자 : (말을 가로막으며, 차갑게) 여긴 숙녀용이예요!
남자 : (당황하여) 응, 응, 그라께 귀머거리는 아니었어소요이.(관찰하며) ...가만, 아까 그 아가씨 아닌가베?
여자 : (힐끔보고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러나 우호적이지 않은) 그래요, 또 만났군요.
남자 : 제기럴, 오늘, 재수에 옴 붙은걸 진작에 알았어야 하는긴디.
여자 : 뭐라구요?
남자 : 아니여, 아니여, 나혼자 한 소리여이. (짐짓 화장실을 향해) 아따, 안에 있는 양반, 후딱 좀 나오소이.일편단심 망부석도 아닌디, 왼종일 여그 서 있을 수만은 없지 않소이?
여자 : 그래봐야 소용없을 거예요.
남자 : 와여?
여자 : 여긴 숙녀용이니까요.
남자 : 아따, 볼일 보는디, 남녀 유별이 웬 말이여이?
여자 : 그것뿐이죠. 남자가 여자하고 유일하게 구별되는 게.
남자 : 하지만, 뒷일 볼 때는 같으야.
여자 : 어쨌든 여기는 숙녀용이에요.
남자 : 아가씬, 저그 저 뻘건 글씨로 쓴 팻말이 안 보이는 기여?
여자 :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죠.
남자 : 저그가, 바로‘사용불가’라고 쓴그요. 그것도 순 우리 한글로.
여자 : 그래서요?
남자 : 오매, 이 아가씨 좀 보소이. 그 낱말뜻이 뭔지 모르겠다 그 말이요이, 시방?
여자 :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저 팻말은 신사용에 붙어 있고, 나는 남자가 아니에요.
남자 : 그라니까, 그기 무슨 말이겠는가 곰곰히 생각해봐라, 이 말이여요이.
여자 : 내가 분명하게 설명해 드리죠. 신사분들은 용변을 볼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남자 : 오매, 오매, 이 여자 참 딱하고, 답답하요이.
여자 : 그 소린, 아까 장에서부터 입에 달고 있더군요.
남자 : 보소이, 나가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 드릴테니, 잘 들어 보소이.이 대진리에는 버스 종점이 하나 있는디, 그기 바로 여그고, 이촌 버스 종점에, 빈소가 두 개 있는디, 하나는 남자용이고, 또하나는 여자용이라. 근디, 남자용은‘사용불가’라고 팻말을 붙여 놓고 못질을 해 놓아 버렸오요이. …그기, 남자는 볼 일을 못본다 그런 뜻이요이?
여자 : 아닌가요, 그럼?
남자 : 고건 말이여, 남녀가 공히 이 나머지 하나를 사용하라, 고런 말이여요이.
여자 : 그렇다면, 처음부터 남녀용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겠죠. 그렇게 아무나 사용할 수 있다면 말이죠.
남자 : 참말로 딱하고, 답답허요. 애시당초 처음에는 구별이 되었겠지만, 불가피혀게,
여자 : (말을 막으며) 불가피한 건, 남자들뿐이에요.
남자 : 거, 상그도, 무신 말인지, 못 알아 듣는 개비여?
여자 : 못알아 듣는 건 그쪽인걸요.
남자 : 참말로 답답하구만이. 아까도 그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 놓더니만,... 아, 파장한 지가 원젠디 아직도 안가고, 이러키 내 앞에서 또 속을 썩인다야.
여자 : 난, 장보러 여기 온 게 아니었어요.
남자 : 아, 장을 보러 왔든 아니든, 날씨가 꾸물대니 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들 돌아 갔는디, 왜 댁만 남았느냐, 이그여?
여자 : 지금은 이렇게 화창하잖아요?
남자 : 아그야,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여자구먼. 나 댁같이 딱하고 답답한 여자하고는 상관을 안할 모양이니께, 그리 아시오이?
여자 : 내가 바라던 바예요.
남자 : 옳소이. 그람, 나가 여그 기다리고 서 있는거 아무 말도 마소이.
여자 : 가시겠다는 얘기가 아니었던가요?
남자 : 가? 어딜 가야?
여자 : 상관을 않겠다고 했잖아요, 나하고?
남자 : 그랬지.
여자 : 그럼 가셔야죠, 어딜 가든.
남자 : 이보소이, 나도 버스를 기다라고 있는 중이어요이. 다섯 시 이십 분차니께, 아직 사십분은 더 기다려야 하요이. 고 전에는 가고 싶어도 못가것소.
여자 : 그럼 저기 저 구멍가게에나 가서 앉아 계시죠.
남자 : 난 여그 볼 일 보러 온 사람이요이. 저 안에 있는 양반이 나오면, 나가 볼 일을 보고, 그라고 나서는 아가씨가 가지 말라고 혀도 저그 저 그늘에 앉아 있을 거니께, 아무 염려 마소이.
여자 : (비웃는)후후, 그렇게 쉽게, 나오실 분이 아니에요.
남자 : 누가야?
여자 : 저 안에 계신 분요.
남자 : 와 그렇다야?
여자 : 어쩜 방금 들어 가셨을 지도 모르잖아요?
남자 : 아따, 볼 일 보는데야, 허리춤 내리고 올리는 시간이면 되지, 그안에서 하루 해를 다 보내는 건 아니잖여. 그라고 나가 여그 와서 아가씨하고 쓰잘 데 없는 소리를 지껄인 시간만 혀도, 오토바이를 탔으면 십리를 갔어야.

새장 속의 새가 요란스럽게 운다.

남자 : (참는) 아이구, 아구야. 금방 나올 것 같은디. (화장실을 향해) 그 안에 있는 양반, 안 그렇다야? 그 안이 궁전 같지는 않재이? 그라믄 후닥 나오소이. 궁전으로 말할라치면, 이 바깥이 그렇다야, 공주같은 여자하고 같이 있으니께.
여자 : 불행히도 그 분은 저 안을 궁전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남자 : 뭐라야?
여자 : 게다가 변비 증세까지 있을 지도 모르죠.
남자 : 아따, 아가씬 어찌 그리 남 뒷일 보는 것까지 잘 아요?
여자 : 그리고, 다음 차례는‘나’예요!
남자 : 아가씨도 그렇소이?
여자 : 아마 한 삼십 분은 족히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남자 : 삼십 분? 병아리를 까는 것도 아닌디, 뭘 그리 오래 웅크리고 앉아 있을 것이여?
여자 : 다른 곳을 찾아보시죠. 일찌감치?
남자 : 보소이, 댁이나 그라소이. 나도 오기가 있는 놈이여, 그라고 여 그 이 빈소는 나가 5일에 한 번씩 꼭꼭 애용하는 단골이여.
여자 : 단골?
남자 : 고럼이. 장날마다 오니께.
여자 : 그때마다 아무 곳이고, 막 들어 가셨나요?
남자 : 막, 이라니?
여자 : 남녀용 구별도 않구요.
남자 : 이 여자가 왜 이려. 여그 대진 거진 천진에 아야진까지 이 일대를 통틀어 국제 신사는 나뿐이라고들 혀. 알기나 하는기여?
여자 : 그러세요? 그러면 저기 국제 신사 전용 화장실을 쓰시죠.
남자 : 비웃는거요, 시방? 이 박종달이가 이런 촌구석 돌아 댕기는 장돌뱅이 됐다고, 사람 우습게 봐서는 안 되여. 나가 지금은 새점이나 쳐주고, 푼돈이나 챙기지만서도, 옛날에는 안 그랬어야.“마도로스 박”으로 한창 날릴 고 때만 혀도.

새가 요란하게 운다.

남자 : (참는) 참말로 미치것구만이, 신사 체면에 아무 데서나 볼 일을 볼 수도 없고이. (화장실 안을 향해) 아, 빨리 좀 나오소이.
여자 : 후후, 그 표정 정말 신사답군요.
남자 : 보소이, 댁은 즐거운 지 몰라도, 난 안 그렇소요이. 내 앞에서 웃지 좀 마소이.
여자 : 참으세요. 그 정도의 인내는 신사의 필수예요.
남자 : 이 눔의 빈소 문은 왜 이리 안 열린다요, 돈 많고 욕심 많은 늙은이 금고처럼 도무지 열리는 법이 없으니, 이게 워찌된 일이냐 이그여?
여자 : 금고보다 더 두터운 문이 얼마나 많은데요.
남자 : 이 빈소도 말이여, 공중전화처럼 만들어야 혀.
여자 : 공중전화?
남자 : 딱 3분만 딱 지나면, 사정없이 저절로 열려야 한다니께.
여자 : 재미있군요.
남자 : 그래서 그 꼴볼견 몰골을 온 천하에 공개해야 하는 기여.
여자 : 하지만, 숙녀에게는 좀 지나치겠군요.
남자 : 안 그라믄, 그 안에서 자빠져 자는 놈도 생길 거 아니여.
여자 : 아무렴? 화장실과 침실을 구별 못할까?
남자 : 그라니께 하는 말 아니여. 인간이 돼지처럼 먹고 마시는 것이 한 자리에서 이루어 질 수는 없다 이그여, 그란디 이 양반은, 아마도 이 안에서,
여자 : 지나치시군요.
남자 : 나가 지나친 게 아니고, 이 양반이 지나치게 오래 있는 거다 이그여.
여자 : 참으세요. 그 수밖엔 없어요.
남자 : 참으야? 이걸 어찌 참소이? 천하장사도 이건 못 참아야. 역발산 기개세가 다 뭔 소용이여?
여자 : 후후.
남자 : 나 말 좀 들어 보소이. 나가 최전방에서 군대 생활할 땐디, 비무장지대 안에서 잠복 근무를 섰어야. 아, 하루는 근무를 마치고 철수를 하는 길인디, 한 놈이 갑자기 뒤가 마렵다는그여. 그런디 거그가 철책 안이라, 곳곳에 지뢰가 묻혀 있어다야. 지정통로가 아니믄, 다닐 수가 없었는디, 그렇다고 토끼 길만큼 좁은 그 통로 한복판에 변을 볼 수도 없는 일 아니갔어이?
여자 : 그렇겠군요.
남자 : 그래서 이 눔이 나한테 철모와 총을 맡겨 놓고, 그 풀숲에 변을 보러 들어 갔는디, (사이) 아, 그만, 폭음과 함께 뼈도 못 추리고 날아가 버렸어야.
여자 : 지뢰를 밟았군요.
남자 : 그렇제이.
여자 : 안됐군요.
남자 : 아시겠소요이? 그라코롬 이 배설이라 하는 것은, 목숨보다 소중하다 이그요.
여자 : 소중하다기 보다는, 우선한다고 해야겠죠.
남자 : 어떻소이? 목숨을 걸고 용변을 보다 순직한 우리 옛 전우에게 묵념이라도 해 줄 생각 없소이?
여자 : 어쨌든, 기다리세요. 여기처럼 기득권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곳도 없죠. 차례를 기다리세요.
남자 : … 어찌겠오이, 기다려야지. …버리고도 시원한 건 그것밖에는 없소이, 참말로 버릴 거 못 버리는 것도.
여자 : (남자의 이야기에는 관심없다) 새점이나 봐주시죠. 기다리는 동안.
남자 : 새점? 아까 보지 않았소요이?
여자 : 봤어요. 하지만,
남자 : 아, 참 그렇제이, 싸우느냐고.
여자 : 왜 그렇게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시죠?
남자 : 나는 직업적 모델이 아니니께.
여자 : 아주 결사적이더군요.
남자 : 그기 우리집 내력이여, 우리 할아버지는 도민증을 내려고 사진을 찍으라고 하니 께, 그기 싫다고 산 속에 들어가 숯을 구으면서 평생을 숨어 살았제이.
여자 : 난, 단지 사람을 찍고 있을 뿐이에요. 꾸밈없고, 자기 일에 온 전히 도취된 채, 무아경에 빠진 그런 표정들을 찾고 있어요.
남자 : 아무려나 나 안되여.
여자 : 난 댁을 찍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댁의 그 표정을 찍으려고 했던 거예요.
남자 : 나 표정은 나 얼굴에 있는 것이고, 나 얼굴을 나 허락없이 찍으면, 고기 바로, 초, 초상권 침해라는 것이여.
여자 : 생각보다 유식하시군요.
남자 : 이런 촌구석에 있다고 사람 무시해서는 안 돼야.

새가 요란하게 운다.

남자 : (참는) 아그, 아구, 이젠 아주 배가 뒤틀리네요.
여자 : 새점이나 봐 달라니까요.
남자 : 남, 급해 죽겠는데 새점 봐주게 됐어야?
여자 :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모르세요?
남자 : 돌아갈 틈도 없어야.
여자 : 정말 그렇게 급하세요?
남자 : 아, 보믄 몰라여?
여자 : 그런데 어쩌죠? 저기 저 분이 나와도 다음 차례는 나예요. 나 또한 한 번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 모르죠.
남자 : 보소이, 그라께, 사정이 사정이니만치 좀 순서를 바꿔주소이.
여자 : 난 그렇게 관대하지 못해요.
남자 : 보소이, 사람 하나 살려주는 셈치고.
여자 : 천하장사도 참을 수 없다면서요? 난 더욱이 약하디 약한 여자예요.
남자 : 그라도 나가 더 급하지 않겠소이.
여자 : 나도 급해요.
남자 : 보소이, 나는 지금이라도 금방,
여자 : 나도 그래요. 단지 난 참고 있는 것뿐이죠.
남자 : 참는 표정이 아닌디?
여자 : 음, 내 일에 협조해 주신다면 고려해보겠어요.
남자 : 협조?
여자 : 아주 보람있는 일이죠.
남자 : 그기 뭔디야? (참는) 아그, 아구, 배야. 아이구 죽겠네야.
여자 : 그대로 계셔주기만 하면 되요.

여자, 사진기를 들고 남자를 찍기 시작한다.남자, 안절부절못하며, 화장실 쪽만 쳐다보느라고 여자가 사진을 찍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남자 : 아이그, 급한디, 이 안에 들어간 양반은 죽은 기여, 살은 기여, 대체. 나가 여기 온지 벌써 20분이 지났는디, 이게 워찌된 기여.

남자, 비로소 여자가 자신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남자 : 응, 이게 뭐여? 지금 뭐하고 있는 거여?
여자 : 아주 좋았어요!
남자 : 좋아? 뭐가 좋아야? 남 죽갔다는디. 그라고 누구 허락 받고 그
렇게 : 남의 얼굴을 막 박는 기여.
여자 : 잠깐만요. 렌즈 좀 바꿔 끼우고요.
남자 : 보소이 아가씨, 아까도 장에서 내 말했지만, 나 이 박종달이는 평생동안 사진을 안 박기로 작정한 사람이여.
여자 : (렌즈를 교체하며) 아주 좋아요, 훌륭한 작품이 될 거예요. (민첩하게 완료하여) 자, 다시 한 번 해봐요.
남자 : 시끄럽소이, 나 이 얼굴은 예술작품이 될 수도 없그니와, 그 사진이 덩그마니 어느 벽에 걸려 있으믄,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것소, 날보고?
여자 : 감탄하겠죠. 인간의 가장 순수한.
남자 : 치우소이. 나 살다살다 뒤 마려운 사람 얼굴 찍는 여잔 첨 보겠소요이.
여자 : 협조해 주셔야 해요. 이건 예술이어요.
남자 : 예술이 뭐요? 뭐 말라 비틀어진 것이여, 대체?
여자 : 예술을 이해하지 못 하시는군요. 예술이란 미를 추구하는 거예요. 미! 아름다움!
남자 : 뭐시야? 이 여자 왜이리 사람 복장을 훌떡훌떡 뒤집는다야? 시상에 똥마려운 모양이 뭐가 아름답다는 기여? 그기 그렇게 이뻐서 예술이여? (참는) 아이구야, 이이그 배야.새가 요란하게 운다.
여자 : 차례를 바꿔드리죠.
남자 : (급히) 필요없어야, 사람 급한디, 차례가 다 뭔 소리여?
(사이) …정말이여, 그기?
여자 : 협조해 주신다면요.
남자 : 흠. (의심스런 눈으로 여자를 보며, 생각에 잠겨)
여자 : 자, 자. 됐어요, 그 표정 그대로.

여자, 본격적으로 사진 찍기 시작한다.

여자 : 이번엔 얼굴을 저쪽으로 돌리시구요, 됐어요, 그대로 계셔주세요.

여자, 열정적으로 계속해서 사진 찍는다

여자 : 허리를 좀더 낮추세요.
남자 : (마지못해 포즈를 조금씩 취해준다.)
여자 : 됐어요.

여자, 계속 사진 찍고.,

여자 : 허리춤을 풀어헤치고, 엉거주춤 움켜잡고, 예, 예 됐어요.
남자 : 나참 더럽다이.
여자 : 인상을 좀 더 쓰세요, 아까처럼.
남자 : (못마땅한)
여자 : 차례를 바꿔드린다고 했잖아요, 어서요.
남자 : 나, 원.
여자 : 휴지는 오른쪽에 움켜쥐고, 주먹에 좀더, 옳지, 그래요, 좀더 그렇게 힘을 주세요.

여자, 사진찍는데.

남자 : 나 참, 이 짓은 못 해먹겠네이.
여자 :움켜쥔 배와 얼굴 표정을 일치시키세요.
남자 :보소이, 난 정말이지, 이 짓은.
여자 : 차례를 바꿔드린다고 했잖아요.
남자 : (고민하는)
여자 : 빨리요.
남자 : (마지못해 다시)
여자 : 배를 좀더 힘차게 움켜쥐세요, 인상을 좀, 고개를 쳐드세요.
남자 : (그대로 한다.)
여자 : 이번엔 허리품을 풀어 헤치고,
남자 : 으이?
여자 : 흘러내리는 바지를 잡으란 말이에요.
남자 : (그대로 하는데)
여자 : 아, 잠깐만요, 필름이 다 되었군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여자, 필름을 되감아 뺀다.)
남자 : 보소이, 아가씬, 그 사진 그렇게 찍어서 뭐에 쓰요?
여자 : 잠깐만요, 필름 좀 갈아 끼우고요.

여자, 필름을 꺼내 새로 갈아 끼운다. 남자,

남자 : (이를 눈여겨 보며)오호, 그 허리에 찬 주머니가 필름 넣는 주머니구먼이,
여자 : 그래요.
남자 : 거 주머니가 많아서, 난 도무지 햇갈리요이. 그러니까, 그 주머니 안에 오늘 찍은 필름들이 다 들어 있겠구먼이?
여자 : 그래요. 자, 다 되었어요, 다시 한 번 해봐요.
남자 : 그만 해도 되지 않겠소이.
여자 : (렌즈를 교체하며) 아주 좋아요, 훌륭한 작품이 될 거예요.(민첩하게 완료하여) 자, 다시 한 번 해봐요.
남자 : 그러다 정말로 싸버리면 어떡하겠소이?
여자 : 좋아요. 그럼 조금 쉬었다 다시 하죠.
남자 : 쉬었다가, 다시?
여자 : 이제 새점이나 봐주세요.
남자 : 그려. 천 원이여.
여자 : 아까 드렸잖아요?
남자 : 아,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또 새로 이 새한테 모이를 주어야 한다 이 말이여.
여자 : 그런 법이 어딨어요?
남자 : 이 아가씨가 잘 모르네이. 아까 장에서, 아가씨가 상담료를 내고, 이 좁쌀을 손바닥에 요만큼 얹어 갖고 있었제이.
여자 : 그랬죠.
남자 : 그래서 내가 이 새장 문을 열고, 요러코롬 새를 꺼냈더더니, 새가 아가씨 손바닥 위에 올라 앉아서 모이를 먹었다 이 말이여.
여자 : 예.
남자 : 분명히 그랬제이? 그라고 여그 이 새가 점괘를 하나 쑥 뽑아 물고는 나를 갖다 주었다, 이그여.
여자 : 그래요.
남자 : 고것이 바로 아가씨의 점괘였고, 거그까지가 바로 천 원이다, 이 말이여. 아가씨가 그것을 찢어 부린 것은 아가씨 책임이고, 이 새한테는 아무 죄가 없다 이 말이여.
여자 : 그래서 돈을 또 내야 한다는 말이에요?
남자 : 아, 돈이 아니고, 상담료여, 상담료.
여자 : 없어요, 차표 끊느냐고 잔돈을 다 써버렸거든요.
남자 : 없으면, 못 보제이.
여자 : 좀 생각해봐야겠군요.
남자 : 머시를?
여자 :차례를 바꿔드리겠다고 했던 거 말예요.
남자 : 그건 이미 유효한 것 아니여?
여자 : 천만에요, 난 아직 허락하지 않았어요.
남자 : 보소이. 말을 바로 하소이. 아가씨가 분명히 순서를 바꿔주겠다고.
여자 : 난, 그런 적 없어요.
남자 : 오매, 이 여자 보소이. 사람 환장하긋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어. 하늘이 듣고 땅이 들었어. 분명, 아가씨가.
여자 : 협조해 주신다면, 생각해보겠다고 했을 뿐이에요.
남자 : 그래서 협조해 주었잖여이?
여자 : 그래서 생각 중이죠.
남자 : 뭐여?
여자 : 조금만 더 협조해주신다면 생각을 마무리 짓겠어요.
남자 : 나, 이런, 여우같은.
여자 : 또 돈을 내야 하나요?
남자 : 아, 돈이 아니고, 상담료라니께.
여자 : 어쨌든요.
남자 : 하 참. 좋소이, 어차피 이 박종달이 오늘 일진 재 뿌린 날이니께. 나 참 더럽고 치사해서.

새장 문 열고, 새 꺼내며

남자 : (새에게) 야, 이 눔아, 이리 나오너라이.
(여자에게) 자, 모이 한 줌 집으소.

여자, 모이를 집어들면, 새가 올라앉아 쪼아먹는다

여자 : 아야, 손바닥이 따가와요.
남자 : 그건 따가운 게 아니고, 간지러운 거여이.
여자 : 다 먹었어요.
남자 : 이눔아야. 맛은 없겠지만서도이, 다 먹었으면 하나 뽑아 봐라이.

새, 점괘를 뽑아, 남자에게 가져다준다.

남자 :(점괘를 읽는다)‘ 양호상투’니,‘ 망자실색’이라. 두 호랑이가서로 싸우니, 바라는 자가 빛을 잃도다.
여자 : 무슨 뜻이죠?
남자 : 남과 싸우지 말라, 고런 말이오.
여자 : 어찌 저 새는 그런 괘만 뽑지요?
남자 : 새를 탓하지 말고, 아가씨 운수를 탓하시오.
여자 : 또요?
남자 :‘일모청산’인디,‘ 귀객망망’이라. 해가 저무니, 돌아가는 길손이 바쁘구나 그런 뜻이오이.
여자 :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남자 : 말 그대로제이. 암담허다, 이 말이요.
여자 : 피.
남자 :‘일시영화’이나‘종견곤고’라. 한때 영화로왔으나, 마침내는 어렵고 고됨을 보게 되리라.
여자 : 집어치우세요.
남자 : 으잉?
여자 : 그런 엉터리 점괘는 처음 보겠어요.
남자 : 이런 더러운 점괘만 뽑는 여자도 처음 보겠소이.
여자 : 그 멍청한 새도 날려보내고요.
남자 : 날려보내야? 이 새를? 이래봬도, 얼마나 영특한 지 알기나 혀? 이 새가 멍청하다니, 당치도 않소이.
여자 : 인간이 고작 새한테 의지해서 돈벌이를 해야 하다니, 너무.
남자 : 보소이,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지 마소이. 이 새란 놈은 말이여.하늘 높이 솟아 훨훨 날아다니면서, 세상 물정을 다보고 다 아는디다가, 거 뭐라더라, 천상의 신과 지상의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매개체다, 이그여.
여자 : 그런 새를 왜 새장 안에 가두어 두죠?
남자 : 이 새란 놈은 말이여, 변이 마렵다해도 참는 법이 없어야. 우리처럼 이렇게 빈소 앞에 나란히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기 아니고, 훨훨 날민서, 공중에서 아무 데나 내갈겨 버리지이. 뭔 소린지 알겠소이?
여자 : 새의 속성이지요, 그게. 불필요한 건 잠시도 지니고 있지 않으려는. 새들이 하늘을 날기 위해선 어떡하든 몸무게를 줄여야 하고, 그래서 쓸데없는 것들을 즉시 배출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새들은 뼈도 통뼈고, 새끼도 알로 낳아.
남자 : (가로채며) 보소이. 유식한 체 하지 마소이. 새의 속성은 내가더 잘요이. 이 새란 놈들이 그렇게 공중에서 아무데나 내갈기는것은이, 한마디로, 새란 놈들은, 이 세상을 빈소로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이요, 아시겠어요이.
여자 : 그건 좀 너무하군요.
남자 : 세상이 얼마나 더러우면, 새란 놈들이 다 그라겠소이?
여자 : 세상이 왜 더러워요? 화창한 햇살도 있고, 향긋한 꽃내음도 있는데.
남자 : 보소이. 이 아가씨가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네이. 세상은 향긋한 꽃내만 있고, 따스한 햇살만 있는 기 아니여. 똥냄새 나는 빈소도 있고, 더러운 시궁창도 있다 이그여. 나가 돈을 뭉청뭉청 만지던‘마도로스 박’시절 야근디, 싱가포르를 왕래하면서사업을 쪼깨 했으야. 그때 그 더러운 놈들이.
여자 : 밀수꾼이셨군요?
남자 : 으응. 아, 아니여, 난 그저 항, 항해사였는디. (참는) 아, 아, 아이고. 급해라이, 나가 그저 새라면, 아무데나 내갈겨 뿌릴긴데. 이이그, 못참겠구나이.

순간, 남자,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쓰러지며, 여자의 몸을 더듬는다. 이 때문에 여자도 함께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이에 여자가 들고 있던 사진기가 떨어질 뻔 한다. 이와 동시에, 여자 발길에 채여 새장도 넘어간다. 새가 놀라 퍼득인다.

여자 : 어머, 내 카메라!
남자 : 아이구야, 갑자기 와 이렇게 넘어진다야.
여자 : 이것보세요. 넘어지려면 혼자 넘어질 일이지, 왜 남까지.
남자 : 아, 나가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졌겠소이.
여자 : 그래도.

털고 일어나, 자신의 장비를 챙긴다.

남자 : 그라고, 왜 남의 새장을 걷어 차요이. 새가 날개쭉지가 뿌러질뻔 했지 않소이.
여자 : 이것보세요. 당신이 날 붙잡고 넘어지다가.
남자 : 그렇더라도 남의 새장을 발로 차면 안 되지요이.
여자 : 당신한테 그 새장이 소중한 것처럼, 나한텐 이 카메라가 소중해요.
남자 : 그까짓 사진기는 돈 몇 푼 주면 살 수 있지만서도이, 이 새는 안그래야.
여자 : 뭐예요? 이런 못 된 사람 같으니.
남자 : 좋소이. 넘어진 건 어디까지나 나 실수고, 남의 새장을 발로 걷어찬 건 당신 실수니, 서로 없었던 걸로 합시다이.
여자 : 좋아요. 그렇다면 아까 얘기도 취소예요.
남자 : 아까? 아까 무슨?
여자 : 차례를 바꿔주겠다는 거요.
남자 : 뭐시야?
여자 : 그런 우악스런 모습을 보니 댁 같은 남자한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싹 없어졌어요.
남자 : 자비? 나 좀 그만 웃기시요이. 고건 자비하고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오이, 고건 계약이란 말이요, 계약.
여자 : 그렇다면 그 계약은 댁의 무성의 때문에 깨진 거예요.
남자 : 뭐시여? 보소이. 사람 웃기지 마소이. 고건 이미 성립이 되어서 실행만을 앞둔.

여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지그시 노려본다.

여자 : 후회하실 거예요.
남자 : 후회?

여자, 화장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여자 : 내가 이 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내내, 쭈욱 후회하고 계셔야 할 거예요. (화장실 안을 향해) 이 분 정말 너무 오래 계시는군요. 이젠 그만 나오세요.

여자, 거침없이 화장실 문을 연다. 화장실 안엔, 아무도 없다. 남자, 대단한 충격.

여자 : 이젠 내가 들어가야겠어요.
남자 : (망연자실하여) 아, 아 아니.
여자 : 그럼 조금 있다 만나요.

여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닫는다.망연자실해 하는 남자.

남자 : 아, 아니. 이럴 수가! 안에는 아무도 없지 않소이!
여자 : (화장실 안에서) 그래요, 원래부터 없었어요, 아무도.
남자 : (분노를 억제치 못하여) 이, 이런, 여우같은!
여자 : 여우도 배설은 하지요.
남자 : 뻔뻔스러운 년!
여자 : 배설은 수치가 아니에요.
남자 : 나쁜 년!
여자 : 배설은 죄악도 아니죠.

남자, 분노가 극에 달하여, 화장실 문 앞으로 달려간다. 문을 마구 두드린다.

남자 : 못된 년! 옘병 3년에 누렇게 떠 뒈질 년!
여자 : 좀 얌전히 기다리세요.
남자 : 부숴버리고 말 거야, 이 문을.
여자 : 숙녀가 용변을 보고 있는 중이에요.
남자 : 상관없어이. 내 이 문을 부서버리고, 네 년을.
여자 : 국제신사라는 분이 폭력을 꽤나 좋아하시는 군요.
남자 : 그려, 나가 때리고 부수는 걸로만 별이 네 개여이.
여자 : 그만 두세요. 정말 이러다간 문 부서지겠어요.
남자 : 이. 이 못된 년!

남자, 제 풀에 죽어, 문 두드리기를 멈춘다.

여자 : 침착히 기다려 주세요, 다 차례가 있고, 때가 있는 법이에요.
남자 : (분노를 간신히 참으며) 도대체, 왜 날 속였어요이?
여자 : 난 속인 적 없어요, 아무도.
남자 : 속인 적이 없어? 아, 나가 마려운 변을 30분씩이나 참았는데도?
여자 : 기다리시는 동안 이 문에다 노크 한 번 해보셨나요?
남자 : 노크?
여자 : 열려고 하는 모든 문은, 일단 두드려봐야 하는 거예요.
남자 : 그, 그건 당신이, 이 앞에 서 있으니까.
여자 : 난 용변을 보려고 거기 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어요.
남자 : 그람 왜, 여그 냄새나는 이 빈소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서.
여자 : 난 신문을 읽고 있었어요.
남자 : 글쎄 와, 하필이면 여그서?
여자 : 사진을 찍으려고요.
남자 : 사진?
여자 : 저기 저 남쪽으로 산이 하나 보이죠. 그 원경을 찍으려고 했어요.
남자 : 그람 후딱 찍고 가버리지이.
여자 : 그런데, 광선이 맞지 않았어요.
남자 : 으잉?
여자 : 빛의 각도가 맞지 않았어요. 태양이 좀더 서쪽으로 가야 저 산의 부드러운 맛을 제대로 살릴 수가 있었죠.
남자 : 보소이, 그까짓 사진 하나 찍는디.
여자 : 사진 예술을 잘 모르시는군요.
남자 : 모르긴 나가 왜 모르오이. 나도 누든가 뭔가, 거 벌거벗고 찍은
여자 : 사진 있제이. 고건 끔찍히 좋아하요이.
여자 : 수준에 맞군요.
남자 : 그라믄, 여그가 비어 있다고 말해 주어야 쓰지 않았겠소이?
여자 : 그러려고 했죠.
남자 : 그란디?
여자 : 다른 사람이라면.
남자 : 그라니까, 나라서?
여자 : 그래요.
남자 : 아까 장에서 사진을 못찍게 했다고 앙심을 묵고 그랬다 그 말이 제이?
여자 : 어차피 정든 사이는 아니었죠.
남자 : 사람이 그라믄 못써이. 그 교활하다던 여우도, 아가씨는 못 따를 것이요이.
여자 : 그 음흉한 너구리도 제 꾀에 빠질 때가 있지요.
남자 : …못된 년.
여자 : 이제 침착히 기다리세요. 그래봐야 손해는 댁뿐이니까요.
남자 : 손해?
여자 : 댁이 그럴수록 내가 여기서 나가는 시간이 늦어져요. 그러면 댁한테 이로울 게 아무 것도 없죠.
남자 : (어이가 없어) 흠.
여자 : 좀 물러나 주세요. 숙녀가 용변을 보고 있는 중이예요.

남자, 어쩔 수 없이 물러선다.

남자 : 저런, 여우같은 년은 처음이요이.
여자 : 아 참, 아까 들고 있던 그 휴지 좀 주세요.
남자 : 나 원. 들고 있던 신문은 뭐에 쓰자는 거요이?
여자 : 이걸 어떻게 써요? 신문지라고요.
남자 : 그럼 휴지도 없이 뭐하러 들어갔어야.
여자 : 이 문 틈으로 밀어 주세요.
남자 : 참, 내.

남자, 문틈으로 휴지를 밀어 넣어준다.

여자 : 고마워요.
남자 : 참말로 못된 여자구먼이. 빨리 나오기나 하소이. 나가 여그 있어도 아가씨 변 보는 모습이 똑똑히 다 보이오. 눈을 감아도 보이고, 뒤로 돌아도 보이오. 그기 좋소? 나가 여그서 아가씨 모습 상상하고 있는 기 조금도 좋지 않제이? 그럼 어서 나오소이.

잠시 사이.

남자 : (점차 회상에 젖어)참말로, 우리가 인간이니께. 새들처럼 아무데나 싸부릴 수 없는 것이여이. 사는 게 다 그렇더라고이. 먹었다고 다 쌀 수도 없는 것처럼, 안다고 다 말할 수도 없더라 이그여. 그저 들어도 못들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 그기 그래야,이 험한 세상 살겠더라 이그지. 나가 어릴 때, 우리 할머니가 나를 붙잡고 신신당부를 했제이.일정 때 왜놈들한테 쫓기던 우리 할아버지는‘더러운 세상 더럽다’고 소리치다 그렇게 되었고,‘ 못살겠다 갈아치우자’고 머리끈 동여매고 나섰던 우리 아버지도 또 그리다 그키 됐지. 그라니 너는 지발 참고참고 또 참아서, 그런 짓은 아예 말라 그라키 당부하더라고이. 불쌍하신 우리 할머니, 아흔 둘 나이로 5년전에 돌아가셨어야.
여자 : 그래서 할머니 말씀을 충실히 지켰나요?
남자 : 아, 그란디, 나가 촌에서 열심히 일을 혀서, 그러니까 숯을 구워 팔았는디, 아, 아무리 일을 혀도, 입에 풀칠하기가 바쁜 거여. 그러자 어머니가 그라데이. 뒷간에 사는 쥐는 똥을 먹고살고, 곡간에 사는 쥐는 쌀을 먹고산다. 그래서 나도 곡간에 살기로 마음을 먹고 도회지로 나왔다 이그여.
여자 : 그래서 쌀만 먹고 살았나요?
남자 : 나가 그때부터 안 해본 게 없어야. 닥치는 대로 이긋저긋 다 해봤는디, 하여튼, 껌팔이, 신문팔이, 구두딱이, 중국집 보이에, 들치기, 날치기, 소매치기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했다 이그여. 밀수도 했재이, 응. 생각해보면 그때가 좋은 때였는디, 돈을 왕창왕창 만지던 때 는 그때밖에 없었어야. 그때 한밑천 잡을 수 있었는디.
여자 : 왜요? 실패했나요, 그것도?
남자 : 다 나 입이 싸서 그렇재이, 할머니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디. 나가 글쎄 붙잡혀 갈 때, 나만이 알게시리 옥포만 깊은 물 속에 숨겨놨던 보물을 그저 한 2년만 더 참으면 되는 걸, 거, 마누라년 이 면회를 왔는데, 하두 딱한 거 같아서, 슬쩍 가르쳐 주었지, 뭐여. …고년이 그걸 찾아가지고 도망을 갔어야, 나가 나오기 도 전에.
여자 : ….
남자 : 싸고 싶다고 다 쌀 수는 없는 거여.
여자 : 아까울 것도 없네요. 어차피 범죄로 번 것이었으니.
남자 : 나가 중국집에 있을 땐, 또 어쨌는지 알아요이. 주인 마누라가 바람을 피우는디, 나가 그걸 알았어야. 주방장하고 배가 맞았는디, 나가 주인 아저씨한테 일러줄 수도 없고, (참는) 아, 아, 아이고, 또 아파지네. 이젠 정말 못참겠구만이. 막 나올라고 하네이.
여자 :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남자 : 뭐가 어떻게 되어, 되긴. 그 연놈들은 간통죄로 잡혀갔다 남편이 고소를 취하하는 바람에 풀려나오고, 나만, 무고죄로 한 1년 살았지, 뭐. 아, 아이고, 아이고 배야.
여자 : 끝까지 비밀을 지키지 그랬어요. 주인 아저씨가 아무리 닥달을 해도.
남자 : 하지만서도,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걸 어찌어찌해서 알게되믄, 말 안하고는 못 배겨야. 그것때문에 신세를 망치는 한이 있어도.
여자 : 그게 배설이라는 거죠. 그게 우리에게 있는‘배설의 욕망’이라는 거예요.
남자 (화를 내며) 빨리 나오기나 혀! 남 급한디. 무슨 헛소리여, 그 안에서.
여자 : 좀 기다리세요. 급할 건 없잖아요. 아직 버스가 오려면 5분이나 남았어요.
남자 : 뭔 소리를 하는 거여? 당신은 안 급혀도 난 급혀이.
여자 : 배설은 권리예요. 내 권리를 아무에게도 양보할 수 없어요.
남자 : 별소릴 다 듣겠네야. 아, 그럼 그기, 당신한테만 있는 권리여? 나한티도 그런 권리가 있다 이그여. 왜 나한티는 그런 권리를 뺐냐, 이 말이여, 내 말은.
여자 : 거기도 순서는 있는 법이죠.
남자 : (더이상 못참겠다는듯) 아이고야, 보소이. 우리 합분하는 것이 어떻겠소이, 합분!
여자 : 합분?
남자 : 아, 같이 누자 이그여, 사이좋게 둘이서
여자 : 이것보세요. 화장실이란 혼자만이 있을 수 있는 곳이에요.
남자 : 사람 사는 게 어디 혼자서야 살 수 있는개비여? 더불어 협동하여 사는 기 인간이지.
여자 : 화장실엔, 누가 대신 갈 수도 없고, 또 더불어 협동하여 용변을 볼 수도 없어요. 그게 화장실의 속성이죠.
남자 : 인간은 협동하여야 사는 벱이여.
여자 : 물론 그래요, 하지만 때때로 소외당하고 싶어할 때도 있어요. 그래서 화장실은 영원히 고독한 곳이죠. 결코 2인용일 수는 없으니까요.
남자 : (소리치며) 그라믄, 빨리 이 문을 열고 나와야 할 게 아니여.

남자, 다시 화장실 문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린다.

남자 : 이건 벽이 아니고, 문이란 말이요이.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 문이란 말이여. 나올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는.
여자 : 하지만 아무 때고 열리는 건 아니에요.
남자 : 이제야말로 열려야 할 때여, 급하니까?
여자 : 댁이 급한 것하고는 관계없어요. 내 볼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남자 : (격분해서) 이런 몹쓸! 좋소이! 그럼 그 안에서 아주 사시오이! 그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해 줄 것이여이.
여자 : 마음대로 하시지.

남자, 화가 몹시 나 있다. 두리번거리다, 옆 화장실 문의‘사용불가’라고 쓴 팻말을 뽑아 뺀다. 못까지 함께 딸려 나온다. 돌멩이를 하나 찾아 들어, 이를 여자가 들어가 있는 화장실 문에다 박는다. 문이 폐쇄된다.

남자 : 이제 여그서 아주 영원히 사이오이.
여자 : (당황하여) 이곳보세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이건 불법 감금이라고요.

남자, 아랑곳 않고 못질 계속한다.

여자 : 빨리 이 문을 여세요!
남자 : 못 열것소요이.
여자 : 빨리요!
남자 : 그건 내 문제니께 당신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어요이.

여자, 안에서 문을 두드리며.

여자 : 빨리 이 문을 여세요.
남자 : 참 보기 좋소이. 사용불가라는 팻말까지 옮겨다 놓으니, 아주 보기가 좋네요이.
여자 : 어서 여세요!
남자 : 뭔 소리를 하는 거여! 인간은 때때로 소외당하고 싶어한다면서이.
여자 : 농담이 아니에요.
남자 : 차 올 시간이 다 됐네이. 나는 이대로 가버릴 모양이니께.
여자 : 빨리 열어 달란 말이에요.
남자 : 이 문은 아무 때나 열리는 문이 아니여.
여자 : 이건 불법감금이에요. 당신은 지금 범죄를 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남자 : 당신은 갇혀 있는 게 아니여. 그긴 감옥이 아니고, 말하자면 빵틀과 같은 것이어서, 밀가루가 빵이 되듯.
여자 : 열어 주세요, 어서!

이때 무대 뒤에서 버스 다가오는 소리.

남자 : 어허, 저기 차가 들어오는구먼이. 이제 가야 쓰겠구먼이.
여자 : (다급하게) 이곳보세요. 한 가지 제안이 있어요.
남자 : 제안? 또 뭐여? 또 뭐로 날 속이려는 거여?
여자 : 이제 3분 후면 차는 떠나요.
남자 : 잘 아는구먼이.
여자 : 그 차가 다음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당신은 배설을 참고 가야해요, 자신 있으세요?
남자 ….
여자 : 날 내보내 주세요. 당신이 용무를 마칠 때까지 차가 떠나지 못하도록 얘기해 놓을게요.
남자 : ….
여자 : 어때요? 날 내 보내 주세요.
남자 : ….
여자 : 아무리 맛난 음식도 잠시후면, 변이 되지요. 목구멍으로 넘어 가기만 하고, 배설을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죠.
남자 : ….
여자 : 세상 이치가 그런 거예요. 댁도 어서 배설을 해야 해요. 망설이지 말고.
남자 : 아그야. 정말, 더럽네이.
여자 : 어서요. 시간이 없어요.
남자 : 정말이지, 울며 겨자 먹기구먼이.

남자, 화장실 앞으로 다시 가 폐쇄된 문을 연다.여자, 나온다.

여자 : (여유 있게) 고마와요.

남자, 여자를 노려보다, 황급히 뛰어 들어간다. 화장실 문이 힘있게 닫힌다.

여자 : 여기 휴지 남았어요.

화장실 문 다시 열리며.

남자 : 고맙소이.

화장실 문 닫히고.

여자 : 아, 노을이 지는군요. 햇살이 아름다워요. 보세요. 산이 한결 부드러워졌죠? 저 산을 찍어야겠어요.
남자 : (화장실 안에서) 좋도록 하시오이.
여자 : 새 한 마리가 저길 날면 더욱 멋지겠는데요. (새장에게 다가가며) 이 새를 놔줘야겠어요. 새는 원래 공중을 훨훨 날아야 해요. 아무도 가둘 권리가 없지요.
남자 : 뭐시여? 그건 안되여. 절대 안되여!

여자, 새장을 열고, 새를 날려보낸다.

여자 : 보세요. 얼마나 좋아요.

여자, 사진 찍는다.

여자 : 새들은 이 세상을 화장실로 생각한다고 했지요? 그래요. 이 세상은 더럽고 치사하지만, 그러나 새들이 있어서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이죠.

여자, 사진기를 챙기며

여자 : 자, 그럼 안녕히!

버스 시동소리.

여자 : 잠깐만요, 잠깐만.

여자, 뛰어서 퇴장한다.

여자 : (목소리만) 기사 아저씨 고마워요. 어서 가세요, 더 탈 사람이 없으니까요.

버스, 떠나가는 소리. 사라지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침묵.

이윽고 화장실 문 열리며, 남자 나온다.남자, 빙긋 웃으며, 여러 개의 필름을 들고 있다가, 하나씩 화장실 안에 던져 넣는다.

남자 : 지가 약으면 얼마나 약어야? 여그 필름을 다 내불고, 빈 사진기만 가지고 가면 어쩐다야. 지가 하루종일 찍어댔어도, 그기 전 부 여그 빈소에 버려지는 걸. 나가 전직이 소매치기였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었는데도, 저 여자가 그걸 몰라야. 나가 붙잡고 넘어질 때야,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인디. 세상 이치는 나만큼도 모르면서 혼자 약은 척 해야.

남자, 필름 다 버리고.
이윽고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본다.

남자 : 오, 그려, 너도 잘 가거래이. 자고로 새란 놈은 하늘에 살아야 하는 기여. 그저 하늘을 날다 아무데나 팍팍 싸버려야 그게 새 지, 안 그러냐이? 훠어이, 훠어이, 멀리멀리 가래이! 옳지, 옳지 잘 가거래이! 훠어이 훠어이!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