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0호2010년 [소설-강호삼] 속 초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57회 작성일 10-12-29 17:11

본문

그가 갓길로 들어가서 페달에서 한쪽 다리를 내려 땅을 딛고 자전거를멈추고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페달을 있는 힘을 다해 밟았지만 한 참이나 뒤처졌다. 땀이 나고 상기 된 얼굴로 숨을 헐떡거리면서 그의 뒤쪽에 자전거를 세웠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얼굴의 땀을 닦으면서 나는 무척 심통이 났다.

“쉬어가지?”

그가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나는 대답대신 식식거리며 입술을 쫑긋 내밀며 하얗게 눈을 흘겼다. 아무리 경주라고 하지만 기다려주지 않고 혼자 앞서서 내 달린데 대한 불만이었다. 우리는 대포(大浦)를 지나 설악산 입구에서 상도문(上道問) 삼거리까지 누가 먼저 빨리가나 내기를 했다.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그는 다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그런 미소가 좋다. 좋을 정도가 아니라 홀라당 빠져버렸다고 해야 옳다. 내게 있어서 그 미소는 가히 살인적인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그 때마다 나는 팬티가 흥건히 젖으면서 그와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에 몸을 떤다. 실제로 그럴 때마다 나는 그를 집요하게 유혹해서 호젓한 길가에서나 숲 속이나 냇가에서 섹스를 했다. 실은 지금도 나는 그와 섹스를 하고 싶다. 조금 전의 심통은 그를 끌어 들이기 위한 내 교활한 전초전에 불과하다. 아무튼 그는 여자인 내가 질투라도 할 만큼 희고 조각같이 단아하고 여자같이 맑고 섬세한 얼굴을 가졌다.
그가 자전거 안장에서 내려 받침대로 자전거를 세운 뒤 내 손에서 자전거를 억지로 넘겨받았다. 나는 아직까지 심통이 난 척 입을 한껏 내밀고 핸들을 거칠게 넘겨주었다. 그가 내 자전거도 받침대를 펴서 세우고 여전히 심통이 난 척하고 있는 내 손을 잡아끌어 잔디가 촘촘히 잘 자란 무릎만큼 높은 길가 언덕에 가서 나를 앉혔다. 나란히 내 옆에 앉아서 내 얼굴을 똑바로 처다 보았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손으로 옆구리에 간지럼을 태웠다.

“우리 공주님, 무엇 때문에 또 심술이 났을까?”
“피이! 공주는 무슨 놈의 공주.”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무릎에 달랑 올라앉았다.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입안 가득히 그의 입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와의 입맞춤은 언제나 달고 감미롭다. 길고 숨이 막힐 듯 한 키스가 끝나서도 나는 그의 이마와 눈과 귓불과 목덜미 어디고 할 것 없이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조금 전에, 한낮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라도 할 듯 이글거리던 늦여름 해가 내설악 산 아래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산 밑으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 윗부분의 한 조각 붉은 해가 아쉬운 이별을 아꼈다. 점점이 떠 있는 밝은 황금색 구름 사이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방사선 섬광이 참으로 신비하고 경이롭다. 이윽고 해가 영(嶺) 너머 백담사, 인제의 내설악 산 아래로 완전히 떨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늘이 진 것처럼 사방이 어둑해지면서 동해 바다 쪽으로 펼쳐진 외설악은 금 새 공기가 서늘해졌다. 해가 떨어지자 오히려 산과 개울과 들녘이 활기 찬 제 모습을 찾으면서 사방의 풍경 더욱 선명해진다. 그 제서야 길 건너 저편 큰 바위 돌 틈으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들린다. 그 시냇물은 천불동 계곡과 양폭, 토왕성 폭포 등에서 합류하여 비선대(飛仙臺) 앞 쪽을 감돌아 동해로 흘러나간다. 한 여름이라도 발을 담그기가 시릴 정도로 차고 맑은 물이다. 산 위 한 뼘쯤 높이에 그 맑고 찬 개울물에 빨기라도 한 듯 한 반쪽의 백옥 같은 상현달이 떠 있다. 절구질 하는 토끼의 모습이 선명한 달은 점점파란 빛을 더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물 위에 떠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길가 아스팔트 포장을 뚫고 솟아나온 코스모스가 한 두 송이 이른 꽃을 피우고 있지만 이맘 때 외설악 길가의 꽃은 단연 달맞이 꽃이다. 물이 있고 약간 습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이 꽃은 이름 그대로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저녁에 꽃을 피웠다가 아침 해가 뜨면 꽃잎을 접는다. 달맞이꽃은 꽃 이름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무척 수수하고 소박한꽃이다. 다 자라면 1미터가 채 못 되는 줄기에 무딘 창날 같은 타원형의 솜털이 많은 길쭉한 이파리가 있다. 줄기에서 층층이 가지가 번지고 줄기위쪽으로 올라가면서 꽃잎이 네 개인 노란 꽃이 달린다. 겨울이 되면 줄기는 마르지만 뿌리는 그대로 동면해서 그 다음 봄에 다시 자라는 두 해살이 초화(草花)인데 독성이 있어 소나 가축들은 먹지 못한다. 우리나라 재래종이 아니고 남미에서 묻어 들어 온 식물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여름저녁, 속초와 설악산 일대의 낯설지 않는 풍경으로 친숙하게 자리 잡았다. 이 꽃에 얽힌 슬픈 인디언 처녀의 이야기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랑했던 남자가 짝짓기 파티에서 다른 여자를 택하자 인디언 처녀는 다른 남자의 구애를 뿌리치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뒤 늦게 처녀의 소식을 들은 남자가 산속으로 들어가 처녀를 찾았으나 처녀는 어디에도 없고 달맞이꽃만 있더라는 이야기다. 달맞이꽃이 여느 다른 꽃들과 다른 점이라면 해가 진 여름 저녁, 사랑하는 남자가 오는 길에 등불이라도 밝히듯 노란 꽃을 피우는 꽃의 특성에 있을 것이다.

“저기 누가 와!”

그쯤에서야 나의 극성적인 키스 공세가 끝난다. 황급히 그의 얼굴에서얼굴을 떼고 사람이 온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설악산으로 이르는 아스팔트 길이 말갛게 텅- 비어 있다. 자동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다. 순진하게도 그는 내 거짓말에 번번이 곧잘 속아 넘어간다. 이맘 때 쯤, 여름 한 더위에 지쳐 있다가 비로소 이 시간 식구들이 한데 모여 오이를 채 썰어 넣은 시원한 미역 냉국으로 저녁을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멀리 바라보이는 우리가 지나 온 동해바다에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이 불야성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햇볕에 구리 빛으로 얼굴이 검붉게 탄 뱃사람들이 뱃전에 걸어둔 릴을 돌리는 대로 팔뚝만한 오징어가 바닷물을 찍찍 뿜으며 갑판 위에 계속 떨어질 것이다. 동해안에서 이맘 때 오징어가 가장 많이 잡히고 살이 찌고 크다. 잠자리 한 마리가 달맞이 꽃 줄기 맨 꼭대기에 앉아 있다. 그 너머 점 짙어가는 설악산의 산 그리매가 있고 산 위에 말갛게 물에 씻은 듯한 상현달이 있다. 나는 그 순간, 산 속으로 들어가 달맞이꽃이 되었다는 인디언 처녀의 전설을 떠 올리며 마음이 서늘해진다. 내가 속초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서 속초의 속초중학교에 수학교사로 첫 발령을 받고서다. 속초(束草)라는 곳이 어딘지를 지도에서 찾아보았다. 그때까지 내가 속초에 대해서 알고 있는 상식은 가끔 밥상에 오르는 명태와 오징어가 그곳에서 잡힌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속초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지방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휴전선에서 불과 62키로 미터 거리에 있는 우리나라의 가장 최북단에 있고,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속초는 북한 땅이이었다. 인구 6만, 주민 대부분이 원산이나 고성, 장전과 흥남 북청의 북쪽에서 내려 온 피난민들로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그곳에 고단한 피난 보따리 풀었던 것이다. 나는 춘천에서 잡화상을 하는 부모님 사이에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을 모두 춘천에서만 다녔다. 같은 강원도이긴 하지만 속초는 명절 때마다 경춘선 기차를 타고 가는 큰집이 있는 서울보다 아득히 먼 곳이었다. 그곳은 60년대만 해도 태백산맥을 경계로 영동의 북부지방에 속하는 은자들만이 사는 고장으로 생각했다. 속초에 가려면 서울에서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경유하거나, 군인들이 한쪽 차의 진입을 막고 교대로 통행을 해야만 했던 비포장도로의 아슬아슬한 산길인군용도로의 진부령을 넘어야만 했다. 속초가 본격적으로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 한 것은 설악산에서 히말리아등반 훈련을 하던 산악대원들이 폭설에 조난당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설악산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하다가 밤새 내린 폭설로 눈사태가 일어나 텐트가 눈 속에 묻혀버렸다.
그 해, 참으로 영동지방에 많은 눈이 내렸다. 기록적인 눈이었다. 앞이보이지 않는 폭설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2미터나 눈이 쌓였고 통행이두절되고 전기가 끊어졌다. 눈이 내리는 동안 동해안의 영동지방은 외부의 어느 곳과도 완전히 단절된 채 고립되어버렸다. 눈 속에 묻혀버린 산악대원들에게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보이면서 눈이 그쳤다. 그 제서야 서울에서 사람들이 오고 구조반이 편성되었다. 간신히 현장에 접근했으나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아 조난당한 산악대원들의 시신을 발굴하는데도 다시 여러 날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산악대원들의 조난은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보도진들이 현장에 와서 취재를 하고 라디오 방송은 시간마다 현장을 연결해서 생방송을 했다. 연일 보도되는 그곳 눈 소식에 엄마는 까닭 없이 은근히 불안하신 모양이었다. 그냥 가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말씀은 하지 않아도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가겟방 문설주에 앉아서 묵묵히 신문종이로 담배를 말고 있었다. 내가 취직을 하지 않아도 가게에서 나오는 수입이 솔솔 해서 동생을 학교에 보내고 생계를 꾸려나가는 데는 걱정이 없었다. 부모님은 이제 대학을 졸업했으니 그저 좋은 배필 만나서 시집이나 가길 바랐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 나이 이제 스물 셋이었다. 시집보다는 한번도 벗어나 보지 못한 춘천과 부모의 품을 벗어나 독립하고 싶었다. 눈이 그치고 한참이 나 도로가 개통되자 엄마와 나는 옷 보따리와 냄비와 숟가락 같은 자취도구를 준비해서 진부령 고개를 넘어 속초에 왔다. 속초에는 포장되지 않은 한길에 아직도 눈이 키만큼 쌓여 있어서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길바닥은 온통 진흙 구덩이로물이 질펀해서 사람들은 키 낮은 슬레이트 처마 곁으로 간신히 지나다녔다.
학교 뒤편의 교동이라는 곳에 자취방을 얻었다. 안채와 완전히 독립된 사랑채였다. 집 뒤쪽으로는 시가지 쪽에서부터 밋밋하게 경사가 이루어진 한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은 직각의 가파른 언덕길과 맞닿아 미시령으로 가는 길로 이어졌다. 그 언덕길에 오르면 남성다운 웅장한 설악산이 한 눈에 보였다. 엄마는 시장에서 함석으로 만든 석유풍로를 사준 뒤 다시 진부령을 넘어 춘천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가족과 떨어져 나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된것이다.
선생으로서의 학교생활은 대학 다닐 때와는 또 다른 흥분과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대학 4년 동안은 참으로 재미없게 보냈다. 남학생들이 집요하게 데이트를 신청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너무 어리고 젖비린내가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의만 끝나면 곧장 도서관에 박혀서 남학생들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학교는 교장 선생을 합쳐 스물여섯 명의 교직원이 있었다. 학생 수도 적고 학교 규모도 커지 않아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모두들 햇병아리 처녀선생인 내게 관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처녀 선생은 가사를 담당하는 주수자 선생과 영어담당의 최춘지 선생과 나, 모두 세 사람이었다. 두 선생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고 스물여섯과 여덟으로 나이가 많았으며 최춘지 선생은 서울에 약혼자가 있었다. 총각선생님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지방에서 이곳에 왔고 졸업한 학교도 달랐다. 내가 부임하자 그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들의 관심으로 학교생활이 하루하루즐겁고 살맛이 났다. 학생들도 순진하고 착했다. 내가 부임하고서 아이들의 수학성적이 부쩍 올라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 어느 무엇보다 나의 첫 직장생활이 활기에 넘칠 수 있었던것은 일곱 명의 총각선생 중에 은근히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산의 어느 사범대학을 졸업한 서른 살의 국어선생이었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문학청년이었다. 동명동의 수복탑(收復塔) 근처에서 또 한 사람의 총각선생과 같이 하숙을하고 있었다. 조수만 선생은 전공과목은 달랐지만 내가 다닌 대학의 4년 선배였고 나와 같이 춘천이 고향이었다. 수복탑은 속초의 북단인 동명동 바닷가에 있다. 영금정(永琴亭)과 영랑호(永浪胡)가 바로 곁에 있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고성군 지역으로 청간정(淸澗亭)이, 해안선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가면 화진포(花津浦)와 대진항과 거진항을 차례대로 만날 수 있었다. 수복탑은 실향민이 많은 속초의 상징 같은 조형물이다. 6.25전쟁이 끝난 후 속초를 북한으로부터 수복한 기념으로, 당시의 군인들이 콘크리트 모자상(母子像)을 만들어 세웠다. 한 손에는 보따리를, 한 손에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통일된 북쪽 고향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으로, 섬세한 조형미는 없지만 통일된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자의 희망 찬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정말, 이곳에 피난 온 실향민들은 전쟁이 끝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번듯한 집을 짓는 대신 언덕이나 바닷가에 비바람만 간신히 가릴 수 있는 루핑이나 슬레이트로 지붕을 이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시장에서 장사해 번 돈은 고향에 돌아 갈 때를 위해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새로 태어나고 어른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늙어가고 있었다. 언제, 수복 탑의 모자 상(母子像)이 탑에서 성큼 내려와 그리운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날이 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국어선생의 하숙집은 수복 탑의 맞은 편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는 골목길 안쪽에 있었다. 일요일, 춘천 집으로 가지 않으면 우리 세 사람은 자주 어울려 인근 양양의 낙산사를 찾기도 하고 설악산 등산을 같이 가기도 했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 이곳의 속초(束草)라는 지명은 아무래도 생경하고 생소했다. 어떤 계제에 내가 그에게 이 의문을 토로했다. 그러자 그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면서 나름대로의 자신의 생각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자의 뜻으로는 속(束)자가 묶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草)자는 풀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속초(束草)라는 글자는 풀을 묶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약속의 의미로 실을 묶거나풀을 묶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이곳 속초의 지명은 어떤약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약속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국어선생 다운 그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속초의 지명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었다. 속초에는 지명이나 관동팔경(關東八景)같은 명승지 말고도 명물이 하나 더 있다. 청호동은 청초호(靑礁湖) 앞쪽 해안에 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졌다. 그곳에 가려면 2키로 남쪽의 조양동으로 돌아오거나 수협 어판장 앞에서 건너편 청호동까지 백 미터 남짓한 폭의 청초호로 들어가는 물길을 건너야만 한다. 여기에 청호동 사람들이 어판장과 청호동 양쪽에 쇠줄을 걸고 드럼통 위에 나무 판때기를 얹어 만들어 쇠줄을 당기면서 건너는 갯배를 만들어 띄운 것이다. 갯배에는 사공이 따로 없다. 갯배를 탄 사람들이 직접 쇠갈고리로 쇠줄을 걸어 당겨 갯배를 움직였다. 청호동 사람들은 이 갯배를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건너며 잡은 고기와 해산물을 속초의 중앙시장으로 내다 팔았다.
우리는 갯배를 타고 자주 청호동으로 갔다. 그곳에 바다로 길게 뻗은 방파제가 있고 방파제 끝에는 동명동 쪽에서 뻗어 나온 방파제와 함께 한 쌍의 무인등대가 있다. 등대 앞으로는 한 점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동해 바다다. 그곳에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아니어도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그즈음부터 늘기 시작한 외지의 관광객들과 바다낚시를 하는 낚시꾼과 젊고 발랄한 연인들이 그들이었다. 일요이라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우리 세 사람은 청호동 갯배를 건너자주 방파제로 갔다. 더러 다른 남자 선생이나 여자선생이 끼일 때도 있지만 대게는 세 사람일 때가 많았다.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작은 도시라서 학교 선생은 학생들이거나 학부형들의 눈에 잘 띄게 마련이었다. 두 사람만 같이 다니면 쓸데 없는 오해와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살찐 여인네의 허벅지를 연상케 하는 방파제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에서 게를 잡거나 무연히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돌아 올 때는 속초에서 유일하게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가야다방에서 슈벨트의 겨울 나그네나 쇼팡의 연습곡과 모짤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그래도 미진하면 제일극장 뒤쪽 부두의 팔도강산 가자미회 무침 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처음에 나는 총각인 국어선생에게 약간의 핑크 빛이 가미된 관심을 가졌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국어선생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는 시일이 지나도 그저 그뿐 이렇다 할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없었던 것이 그 원인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우리 사이의 중간에 있었던 당시의 선배 마음을 잘알 수 없다. 당시 선배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다. 이후로도 선배는 같은 태도를 견지했다.세 사람 사이의 구도가 허물어진 것은 국어선생의 갑작스러운 사직 때문이었다. 고향인 부산의 여자 사립 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무책임하달 수밖에 없이 신학기가 막 시작된 3월에 학교에 사표를 냈다. 우리는 팔도강산에서 그의 송별연을 했고 이튿날, 하루에 오전과 오후 두 차례 뜨는 속초 발 대한항공편의 비행기로 서울로 떠났다. 금호동의 대한항공 사무실 앞에서 출발하는 공항 행 서틀 버스를 타고 선배와 함께 비행장으로 국어선생을 배웅했다. 그를 만난 것은 바로 국어선생의 배웅을 하고 돌아오는 서틀 버스 속이었다. 버스를 탈 때는 그의 존재를 몰랐다. 버스가 강현 초등학교를 지나 동해바다를 오른 쪽에 끼고 달리고 있을 때 그가 내 눈에 들어왔다. 천정에 매달린 버스의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선배의 뒤쪽에 그가 서 있었다. 희고 조각처럼 단아한 한 얼굴이었다. 그의 존재를 인식하는 그 순간 나는 버스 안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내눈 빛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당황한 듯 일순 그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가볍게 목례하고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렸다. 서울서 비행기를 타고 온 관광객이거니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가 풍기는 맑고 깨끗한 이미지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내 얼굴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감지한 선배가 뒤쪽으로 얼굴을 돌렸으나 이미 그가 바다 쪽의 버스 차창으로 얼굴을 돌린 후였다.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해의 물치(勿淄) 앞바다에 줄줄이 하얗게 파도가 밀려오는 게 보였다. 버스가 산모롱이를 돌아 대포에 이를 때까지 넓고 넓은 동해바다가 계속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조양동을 지나 시내로 들어선 서틀 버스가 금호동의 항공사 앞에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다. 버스를 내린 그는 무심하게 속초의 가장 번화가인 중앙동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내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왠지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문제는 국어선생이 떠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에서 미지의 그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었다. 그는 오늘 버스 속에서 처음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그가 어디에 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미혼인지 기혼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처음 본 그의 강렬한 이미지가 머리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유 선생! 커피 한잔하고 들어가요.”

선배가 나의 의향을 물었다. 색깔은 다르지만 선배도 매일같이 어울려 다니던 국어선생이 떠났다는 사실에 역시 마음이 허전한 모양이었다. 나는 자취방으로 돌아가려던 발길을 돌렸다. 선배가 이끄는 대로 조금 전, 미지의 그가 사라진 길을 걸어서 가야다방으로 갔다. 그냥 자취방으로 돌아가면 더 못 견딜 것 같이 외롭고 허전할 것 같았다. 가야다방에 가서 고전음악 마니아라는 마(馬)씨 성(姓)의 주인에게 부탁해서 차이코프스키의 6번 교향곡 2악장이나, 아니면 드볼작의 첼로곡인 <아메리카>라도 듣고 싶었다. 만약 그런 판이 없다면 슈벨트의 <겨울 나그네>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조금 음색이 어둡고 차악 가라앉은 그 곡의 선율들은 국어선생이 떠난 마음의 빈 자리를 얼마간이나마 채워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 쪽 문이 열린다고 말했다. 자취방의 60와트 알전구 필라멘트가 떨어졌다. 문간방이긴 하지만 전등이 없으면 낮이라도 어두웠다. 전구를 사기 위해 학교에서 퇴근길에 바로 중앙시장으로 갔다. <명전사>라고 간판이 붙은 전기재료상은 한길에서 시장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다. 나는 가끔 그 재료 상에서 금성라디오에 쓸 건전지라든가 작은 전기용품을 구입하고 다시 시장으로 들어가서 반찬거리를 사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가게 안이 한산했다. 점원이 건네주는 전구를 받고 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가게의 문이 열리고 남자 한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내가 서있는 유리 진열대 앞에 나란히 섰다. 남자는 점원에게 건전지를 달라고 했다. 옆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랬다. 며칠 전 서울로 가는 국어선생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틀 버스 안에서 본 바로 그남자가 분명했다. 거짓말처럼 그 남자가 내 옆에 서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며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진땀이 나면서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남자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남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날 버스 안에서 남자도 분명 나를 의식했음이 확실해졌다.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네요.”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걸어왔다. 저음의 낮고 약간 콧소리가 섞인, 무어라 꼭 꼬집어 말 할 수 없는 매혹적이고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성이 귓속을 울렸다. 나는 정신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머리를 약간 숙이고 간신히 그렇게 인사했던 것으로만 기억한다. 급히 전구 값을 치르고 나는 쫓기듯이 황황히 명전사를 나왔다. 그의 시선이 나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을 의식했다. 시장에서 과일과 반찬거리를 사면서 나는 가까스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새삼 그 앞에서 왜 그렇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는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도록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다음 다시 만나게 되면 여자와 남자로서 당당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얼굴을 확실하게 알게 된 이상, 이 작은 도시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어쩐지 점잖고 세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보기보단 나이가 많았다. 서른여섯, 나와는 열두 살이나 나이가 많은 띠 동갑이었다. 직업은 서울 석탄공사의 속초 책임자였다. 양양의 중석광산에서 채굴되는 광석의 원석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서울에 결혼한 부인이 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속초에 혼자 와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부인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마음 편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꼴 키퍼 있다고 꼴 안 들어가라는 법이 없다는 당돌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 에게 결혼한 부인이 서울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사이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단순히 나이 차로 본다면 그는 나에게 아저씨뻘이다. 처음에는 이 나이 차와 기혼이라는 사실에 그는 많이 주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얼른 내게 다가오기를 꺼렸다. 그는 나와 달리 기존의 도덕적인 굴레를 쉽게 뛰어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유혹하는 나의 집요하고 앙큼한 유혹에 별 수 없이 그는 손쉽게 무너져 내렸다. 그 해 여름방학 내설악의 캠핑을 겸한 민박집에서 나는 그에게 여자로서의 처음으로 몸을 열었다. 아무리 그를 사랑하지만 여자가 처음 자신의 몸을 여는 일은 두려움과 호기심과 흥분을 겸한 대 사건이다.

“예화! 내가 정말 이래도 괜찮겠니?”

어둠 속에서 옷을 벗은 뒤 가만히 내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두터운 도덕률을 뛰어 넘기가 어려운모양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나는 오늘밤 그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야만 그가 확실히 내 남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남자와 여자에게 있어서 섹스가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부질없는 말장난에불과하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엷은 내 네글리제를 헤집고 들어와 젖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이 꼿꼿하게 경직되었으나 이내 그의 부드럽고 능숙한 애무에 몸을 내 맡겨버렸다. 그의 얼굴이 가슴으로 내려와 혀로 젖꼭지를 애무하다가 입에넣고 가볍게 깨물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짐승이 내지르는 것 같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매달렸다.
그가 이미 점액으로 흥건히 젖어있는 나의 팬티를 조심스럽게 밑으로밀어 내리고 다시 네글리제를 위로 걷어 올린 뒤, 반듯이 나를 방바닥에 눕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 질은 완벽하게 내 생애, 처음으로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내 위로 올라왔다. 그의 우람한 음경이 극히 조심스럽고 천천히 내 살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어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했다. 나는 아픔을 참기 위해 다시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아픔과 마침내 내가 그의 것이 되었다는 희열과 내 질속 깊숙이 하나 가득 들어와 있는 그의 장대하게 부푼 음경으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살이 떨리고 목이 말랐다. 한사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마구 빨았다. 누구나 생애의 첫 정사는 잊지 못하게 마련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도둑질도 처음 할 때가 들킬까봐 제일 겁나게 마련이다. 첫 번의 섹스가 있은 후 우리는 마치 막힌 봇물이 터지기라도 한 듯이 기회만 있으면 섹스를 했다. 그와의 섹스는 언제나 황홀하고 만족스러웠다. 그 해 겨울 방학에는 설악산의 양폭으로 가는 길목의 비선대(飛仙臺) 산장에 방을 빌려 일주일을 같이 보냈다. 산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날에는 산장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리지 않을 정도로 1미터가 넘게 깊이 쌓였다. 온 산이 하얗게 눈으로 덮였다. 계속 눈이 내렸다. 온통 눈으로 덮인 설악산에 들어와서야 왜, 설악산을 설악산(雪嶽山)이라 이름이 붙였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산장 아래쪽, 비선대 바위아래 넓은 마당만한 소(沼)에 두꺼운 얼음이 얼었다. 그와 나는 철없는 아이마냥 그곳에서 눈싸움을 하고 장난을 하다가 눈밭에서 그대로 눈을 맞으며 섹스를 했다. 한바탕 폭풍 같은 섹스를 끝난 후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높은 하늘에서 시루떡 가루 같은 무수한 함박눈이 경쟁이나 하듯 서로의 몸을 부비면서 춤을 추듯 가벼운 몸짓으로 떨어져 내렸다. 추위를 느끼면 방으로 들어왔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 구들장이 절절 끓었다. 젖은 옷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녹인 뒤 다시 섹스를 했다. 그와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지만 그 중에서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가을 늦은 저녁, 남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내 자취방으로 찾아온 그를 위해 나는 저녁을 지었다. 퇴근길에 중앙시장에서 사온 문어를 삶아 초고추장과 함께 반찬으로 내 놓았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바다에서 나는 생선 종류라면 무엇이든지 잘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한참 섹스에 몰두하고 있는데 방문 하나사이의 부엌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하던 동작을 갑자기 멈추고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색시 있수?”

춘천에서 온 선배의 어머니였다. 선배의 어머니는 밥과 빨래를 하면서며칠간 선배의 자취방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동안 선배가 자신의 어머니를 내 자취방으로 모시고 와서 소개했다. 선배의 어머니는 자신이 만들어온 밑반찬을 내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한번 다녀간 후 다음 날에도 선배 어머니는 길을 건너 혼자서 내 자취방을 찾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밤이 이슥해서 돌아갔다. 같은 학교, 같은 직장의 선배 어머니이고 동향이기도 해서 별 생각 없이 가족상황 같은 것도 묻는 대로 대답했다. 그 뿐이었다. 그런데 다시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 온 것이다. 그와 나는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다행히 방에서 나는 소리를 선배어머니가 듣지 못한 것 같았으나 사태가 급박했다. 나는 간신히 음성을 가다듬었다.
어머님! 좀 기다리세요. 제가 뭘 좀 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우선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몸뚱이에 치마부터 먼저 뒤집어썼다. 팬티나 브래지어를 입고 찰 겨를이 없었다. 급히 저고리를 찾아 입었다. 그는 아직 알몸이었다.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옷을 찾으려고 허둥대는 동안 선배의 어머니가 부엌의 댓돌로 올라와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절망적인 시선을 보내자 그는 벗은 몸 그대로 집 뒤 툇마루 쪽으로 난 문을 급히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눈에 띠는 대로 그의 옷을 쓸어다 이불속에 감추었다. 선배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날밤도 선배어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늦게 돌아갔다. 그 동안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어쩔 수 없이 툇마루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일을 두고 오래 동안, 깔깔 웃으면서 그를 놀려 먹었다. 당시의절박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 체 툇마루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그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도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쑥스러워 하며 시익- 웃었다.
나는 너무나 그에게 열중해 있었으므로 한참 후에야 선배 어머니가 몇번이나 나를 찾아 온 이유를 알았다. 은근히 선배인 아들의 색시 감으로 나를 탐색하고 있었던 것인데 나는 까맣게 몰랐다. 설사 알았다손 치더라도 별 관심이 없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선배는 그저 선배였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그와 나 사이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화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서울에서 그의 부인이 온 것이다. 당장 마땅한 구실을 댈 수 없었던 그는 그의 부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러한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끓어오르는 질투심으로 고통스러웠다. 적반하장인 셈이지만 나는 이 일을 계기로 새삼스럽게 그와의 관계를 되돌아보았다. 얼마 후 그의 부인이 서울로 돌아갔지만 나는 이제 어쩔 수 없이 그와의 결별을 준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그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선배가 마침내 내게 구혼을 해왔다. 나는 그에게 내 결심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이별 여행을 다녀 온 뒤 서둘러 선배와 결혼했다. 학교도 선배를 따라 춘천으로 옮겼다. 속초와 설악산, 곳곳에 그와의 추억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는 영동을 넘어 영서인 춘천으로 돌아왔다. 그도 속초에서 업무가 끝나 서울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거리상으로 보면 춘천에서 속초보다, 춘천에서 서울이 더 가깝지만 선배와 결혼 후 나는 한 번도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나의마음이나 사랑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춘천에서 그가 서울로 돌아 간지 얼마 후 부인과 이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이 순전히 내 탓인것 같아 한동안 괴로웠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나는 선배와 결혼 후 열 달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피임기구를 사용하지도 않고 그와의 수백 번을 헤아리는 섹스에도 임신이 되지 않았는데 선배와 결혼을 하자마자 아이가 들어섰던 것이다. 이런 것들로 미뤄 보아 어쩌면 그와는 인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의 아이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아이가 세 살이 되면서 우리는 은근히 다음 아이를 기다렸다. 기왕이면 여자아이를 낳고 싶었으나 쉽게 아이가 들어서지를 않았다. 첫 아이가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다시 중학교를 거처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끝내 아이의 동생은 생기지 않았다. 독신으로 만년을 보내고 있는 서울의 그가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선배와 나는 그런대로 두 사람의 생활을 잘 꾸려 나갔다. 잘 꾸려나간다는 말은 내게 있어서 애정과는 다른 일종의 체념과 타협 같은 것이었다. 내가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선배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선배가 위암 3기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부터다. 선배가 그렇게 되도록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선배가 입원을 해 있는 동안 비로소 선배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았다. 선배는 한번도 나 외에 다른 곳을 바라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극진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선배는 위암 수술 후, 내 손을 잡은 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내가 그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았다. 선배의 위암 발병은 순전히 나로 인한 것이었다. 한 번도 내색하지않았으나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위암 덩어리를 배속에 키워 왔을까. 선배는 오래전부터 아이가 자신의 피를 받은 아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병원기록에서 그가 무정자 증임을 알았다.
아이가 서울의 명문대학교 합격소식을 듣고 나는 속초로 왔다. 동명동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렸다. 터미널에서 불과 50 여 미터 거리의 바닷가에 수복탑(收復塔)이 옛날 그대로 서 있었다. 아직도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 예대로 수복탑의 모자상은 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무연히 수복탑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정말로 저 모자가 성큼 탑을 내려와 통일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결코 나와 내 아이는 그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아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선배의 아들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속초(束草)는 풀을 묶어 은혜를 갚는다는 말로 결초(結草)라는 고사성어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