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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2010년 [수필-노금희] 그녀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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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23회 작성일 10-12-2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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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첫 근무지인 면소재지 마을에 거주했던 때이다. 그때야 면사무소를 몇 번 방문하고, 마을 주변에서도 보고 얼굴이 익을 정도였지 내가 인사를 드릴 정도로 친분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직업상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이 있다 보니 누구건 이름을 익혀서 어느 동네 사는 누구라는 것만 나 혼자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작년 여름, 사무실 앞에 노점상이 하나 생겼다. 은행 정문 앞에 자리 잡았던 노점상은 은행 업무에 불편을 주었던지 어느 틈 엔가 자리를 조금 비껴 터를 잡고 있었다. 이곳은 1층이 은행이라 일을 보는 사람들이 항상 많았고, 인근 버스터미널과, 해수욕장과 연결되는 길목은 여름이면 최고의 상권이었다. 그녀의 노점상은 여름이라 옥수수를 쪄서 파는 일이었는데 알이 꽉찬 옥수수 삶는 냄새는 2층 사무실까지 풍기고, 색색의 파라솔은 검게 그을린 그녀의 얼굴과 손을 가려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무실을 들며 나며 마주 칠 때마다 , 그분도 낯이 익어서인지,아님 사무실 근무자라 생각해서인지 나와는 가벼운 눈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즈음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들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자리를 비우자 모두들 그녀의 근황을 궁금해 했다. 그냥 여름 한철 장사로 생활을 하였구나, 싶었는데 우연히 시내에 나갔다가 여러 계절과일을 놓고 시장 어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되자 그녀의 빛바랜 파라솔이 등

장했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지만, 그 열기를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또다시 옥수수를 직접 벗겨내고, 삶아내면서 그녀의 손은 더욱 바빠졌다. 사무실에서도 간식으로 몇 번 사먹었는데 그날 장사가 여의치 않아 남을 요량이면 사무실의 직원들에게 먹으라 건네기도 했다. 또한 잠시 쉴 틈이면뜨거운 햇빛도 마다 않고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길의 잡초를 손수 뽑아주기도 했다. 모르는 척 지나치면서도 그녀의 그 아름다운 마음씨와 거칠어진 손에 대하여 늘 가슴깊이 고마움을 표하곤 했었다. 그녀의 주변엔 밭에서 금방 따내 온 옥수수 자루와, 솥단지, 그리고 항상 책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대략 예순은 되었으리라 싶은데 손님이 없는 시간은 지나가는 행인을 관찰하거나, 잠시 눈을 붙이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 일일 수 있지만, 짬만 나면 그녀는 항상 책을 펴고 읽곤 했다.
또한 언젠가는 소설책인지, 오래되어 색이 바랜 책을 손에 들고 독서삼매에 빠져 있기도 했다. 무슨 책인지 호기심이 가득 차올랐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시간을 방해할 수 없어 모른 척 지나기도 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면 어디서나 책을 읽을 수 있겠지만, 뜨거운 여름, 뜨거운 화력 옆에서, 파라솔을 벗 삼아 책을 읽는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더구나 그 그늘 아래가 그녀의 유일한 독서 공간일 수밖에 없었으니… 몇 해 전 시 낭송모임에서 책을 읽는 것도 때가 있더라는 말에, 읽고 싶어도 자꾸 잊어 버리고, 돋보기를 쓰면서 읽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여 왠지 모를 쓸쓸함에 눈물이 날 뻔했다. 뭐든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 그냥 바쁘다는 핑계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시간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간 뒤에야 허우적거리는 게 내 일상이라 주어진 생에 감사하며 올 여름도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서 내 자신에게 부끄러운 약속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