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0호2010년 [수필-서미숙] 공존의 이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386회 작성일 10-12-29 18:00

본문

상대가 갑자기 나를 멀리하는 느낌이 들 때 너무 힘들다는 표현을 많이하면서 나를 만나주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의 손을 가끔 놔주기도 하자. 나이가 들수록 더 멋을 내고 더 우아스럽게 밥을 먹자. 단어 하나라도 더 멋지게 쓰고 더 어린 후배들을 배려하자. 더 많이 씻고 더 많이 향수를 뿌리자. 늙는다는 것은 초라하지 않지만 자칫 초라하고 우울하게 보일 수 있다. 더 힘들수록 더 한껏 멋을 내고 더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 하자. 내 기력이 주저앉아 힘들어 질 때도 기죽지 말고 더 당당한 모습으로 나도 아직은 열정이 남아 있다고 오히려 내 기를 나누어 주듯이 행동하자. 그리고 절대 우울한 모습을 보여주지 말자. 나이 늙은 모습조차 우울하고 주름조차 젊은 세대에게 초라하게 보여 질수 있다.

요즘 주름개선 화장품이며 별의별 기능성 화장품으로 일부들 사람들은 젊어지려고 난리를 치고 있다. 성형수술이며 그 흔한 보톡스 주사는 이미 젊은이들 사이에서 더 흥행하고 있다. 더 예뻐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세상,보기만 해도 그냥 예쁜 20대, 30대 들도 난리다 더 예쁘게 보이려고 코, 눈 수술은 요즘 기본 아닌가,늙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하지 말자. 당연히 받아들이자 생각하지 말고 가꾸자. 좀 더 덜 늙기 위해 노력하고 좀 더 늙지 않는 모습으로 힘을 쓰자. 운동도 더 젊은이들 보다 열심히 하고 더 뛰고 더 열심히 활력을 내게 자신에게 쏟자. 세상살이가 힘들다 생각하면 옷에 더 요란하게하고 악세사리를 더 많이 주렁주렁 달자.
가끔은 나 힘들어요, 나 힘들어요. 외칠 필요도 없다. 더 감추고 싶으면 감추고 더 꼭꼭 숨겨두어 비록 위선일지라도 그들에게 당당하게 밝은 모습을 내 보이고 싶어진다. 나의 힘든 기 빠진 모습들이 혹여 내 주위사람들의 기력조차 뺏을까 힘들지만 더 힘을 내어 더 예쁜 모습으로 활기를 나눠 갖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왜 힘들지 않겠느냐, 우리는 늘 힘들고 외로운 인생을 산다. 각자 자신만의 힘겨움 들에 고통을 호소하며 나름 자신이 이겨내는 법을 익히며 세상을 견디며 살고 있다.난 나의 우울한 모습, 슬픈 모습들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난 혼자 슬프고 힘겨울 때 나만이 홀로 찾는 곳이 있다. 한적한 바닷가인적이 드문 그 바닷가에 가서 다 토해놓고 오곤 한다. 내 힘들고 나 외롭다고 남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하소연 나의 외로움들도 그들에게 때론 빚이 된다. 언젠가 잘 아는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남편과의 관계가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의 매일 나에게 전화를 해서 상담을 한다. 정말 바람을 피웠을까? 정말 여자가 있는 걸까? 정말, 정말… 그 선배의 의문점은 끝이 없다. 줄줄줄… 가지를 쳐대어 가지가 자라고 또 자라서 이야기 하고 또 이야기 하고 머리 골이 아플 만큼 우리 집 문지방을 드나들었다.
난 그 당시는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었다. 하루 종일 피곤한 나를 붙들고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끝도 없고, 해답도 없는 제자리 하소연을 나에게 늘어놓았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어떠한 결말에 승복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조언이나 충고를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결국은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결정을 내리고 마는 그리고 다시 되짚어 또 이야기 하고 또 의문을 갖고 또 푸념을 했다. 다시는 그 선배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도 정해져있지 않았었다. 새벽이고 낮이고 밤이고 하루 내내 나는 그의 하소연을 들어야만 하는 귀일뿐이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큰맘을 먹고 이야기해야겠다고 맘먹는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시외전화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지근거린다. 휴 생각하기 싫다. 다시 만나기도 싫다. 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 했다. 일 년이면 한건씩 그런 친구를 만나게 된다. 하루 종일 죽치고 제집인양 가지 않는 질긴 친구들을 난 거절하지 못하고 끙끙대었다. 어느 날부터 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십 여 년, 어느 날부터 그녀들의 존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전화번호와 늘 잠겨있는 우리 집을 인식시켰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있을까? 그래, 그래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거절하는 법을 배우자. 나도 힘들 때가 있다고 당당히 이야기 하자. 그리고는 사람과의 관계를 배우기 시작했다. 거절할 줄 아는 내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너무내 것을 다 주지 말자. 내 것을 적당히 주고 적당히 받아가며 힘들거든 혼자 마지막 까지 그 힘든 것을 견디고 난후에 그래도 힘들면 조금 힘들다고 손을 내밀어 보자. 그러면 그들은 당신의 손을 살며시 잡아 줄 것이다. 톡톡 어깨를 쳐주며마음을 위로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힘들다고 내 모든 것을 다 들어내 우울한 단어를 몰고 다니면 그들은 자신의 기를 빼앗길까봐 멀찌감치 뒷걸음 치면서 도망을 가버린다. 그 우울함이 자신에게도 걸쳐질까봐서…

조병화님의‘공존의 이유’이 詩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 이라든지,
우리들 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을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생략)

처음에는 이 시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그러나 시를 현관 문 앞에 붙여놓고 매일 한 번씩 읽고 나간다. 보면 볼수록 얼마나 현명한 詩인지, 읽으면 읽을수록 얼마나 지혜로운 시인지, 성경말씀에도

‘이웃집이라고 너무 자주 드나들지 마라, 질려서 너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알맞게 표현된 말은 은쟁반에 담긴 황금 사과와 같다고 했다. 그래 처음에는 섭섭할지라도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사는 사람들의 세계가 더 현명할 것이다. 죽고 못 살아하면서 우리나라 여자들은 시장이든 목욕탕이든 화장실이고 어디든 붙어 다닌다. 외국 사람들이 우라나라 여자들이 화장실을 떼 지어 가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는 조금 서운하면 토라져서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바쁘다. 사랑한다고 해놓고 이놈, 저놈하면서 돌아서 서로 죽일 듯 하며 헤어지는 우리네 연인들은 이미 흔하지 않던가. 저 잔인한 詩처럼 잔인하다 하며 산 세월이 나도 있다. 그러나 하루, 하루 살다 보니 정말 현명한 시이다. 아주 세상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지혜의 시이다.

평행선으로 살아가는 거 슬픈 것 같지만 우리의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가장 오래가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다. 그 평행선을 긋고 살다 가버려 잃어버린 친구들도 꽤있다. 그리고 참 좋아했던 사람도 놓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지난 시간을 생각하면 그렇게 큰 후회는 하지 않는다. 적당히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얼마나 현명한진 알아가는 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행히 나에게 어린 나이부터 그렇게 적당한 자제력을 우리 부모님은 아주 현명하게 남겨 주셨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미련이나 슬픔은 그리 많지는 않다. 사람에 대한 힘든 것은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지혜가 자꾸 쌓아지기 때문이다.언젠가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 넌 아주 이기적이라고, 상대가 널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 싫다고 도망가는 나쁜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그 말을 들으니 슬펐다. 그래 내가 이기적인가? 내가 나쁜가? 하고 생각해 보면 사실 우울해 지기도 했다. 그러나 순간의 아픔이 서로의 영원한 부담과 힘겨움보다는 낫다 하며 위로를 했지만 마음이 아프기는 사실이다.
늘 내 곁에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난 가끔 그들이 너무 힘겨울 때가있다. 늘 지워지지 않는 나의 미소 속이지만 나도 힘겹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다.그러나 그 틈이 여간해서 생기지 않아 곤혹스러운 적이 많이 있다. 연애를 할 때에도 나는 여러 명의 친구들을 달고 다녔다. 그래서 연애할때 가장 불만으로 제발 단둘이 만나보자 했던 그 사람의 소원을 난 결국못 들어 주었다. 그래 삐쳐서 가버리기도 했다. 또 자꾸 사랑이란 단어로나를 확인하려고 했고 옭아매려고 했다. 난 사랑하는데 더 사랑하라고 하고 더 확인을 보여 달라 요구 했다. 숨이 막혔다. 난 그 자리에 그냥 가만히 사랑하면서 변함이 없는데 조바심을 내며 내게 달려오는 그 사람에게 난 스트레스가 생기기 시작했다.

“너한테는 보이지 않는 유리막이 있어. 다가 가다보면 막히고 마는 그런 알 수 없는 유리막이 있어.”

도대체 무슨 유리막?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그 당시는 하도 여러 사람에게 들은 터라 알 수 없다고 하기도 싫었다. 결국 그런 이유로 헤어져 그 사람은 엄청난 상처를 받고 떠나갔다. 친구들도 그런 이유로 많이 가버렸다. 난 가만히 있는데 그들은 내게 막 달려오다 내가 쳐버린 유리벽에 부딪쳐 나가 떨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난 쳐버린 유리막도 없고 그들에게 싫다고 표현 한 적도 없고 어디를 가자해도 거절 한 적도 없고 그들을 미워 한 적도 없는데 울며불며 쪽지편지를 주며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왜 너는 나를 안 좋아 하느냐고 환장할 노릇이다. 나 때문에 아프다는 것이다. 초등시절이며 중고등시절이며, 나를 들들 볶아대던 동성친구들, 다들 대학들을 가면서 또는 직장들을 가고 또는 일찍 시집들을 가고 뿔뿔이 흩어지며 자신의 길을 가면서 잠잠해졌다. 그러나 난 또 다른 이성으로 또는 동성으로부터 힘겨운 싸움들을 했다.
날 가만히 두질 않았다. 팔짱끼기 제일 싫어하는 나를 철면피라고 손가락질 하며 감정도 없는 친구라며 악담을 퍼붓고 떠나간 친구도 있다. 난 날보고 어쩌라고 난 내가 이 모양으로 생겨먹었는걸 어쩌라고 하소연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혼을 해서도 수없이 이웃친구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을 드나 들었다. 속초에 이사와서도 우리는 많은 손님을 치루느라 한 달에 쌀을 60키로 먹었다. 힘겨웠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아이들은 엄마친구고 아빠친구들이고 우리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자제시켜 달라고 하소연 했다. 지금도 우리아이들은 집에 누가 방문하는 것을 너무 싫어한다. 이상스럽게 우리 집에 놀러오면 꼭 낮이고 밤이고 들어 누워 자고 간다. 친구내외건 동생내외건 놀러와 이곳저곳 구경하고 잠깐 우리 집에 들려놓고는 들어 누워버린다. 여자들은 빨리 바닷가라도 가자고 하고 남자들은 잠깐만, 잠깐만 하다가 그냥 하루를 버리고 부부싸움을 하거나, 여자가 먼저 가버린 애피소드도 있다.
한번은 서울서 그렇게 친분이 있던 선배도 아니였는데 집을 나와 오갈데 없다고 무작정 찾아와 우리 집에서 3개월을 지낸 적 있다. 서울서 남편이 내려오고 난리를 부리고 우리아이들은 징징대고 나중에는 미안하다고 가라고 했지만 난 그이야기를 하는데 3개월이 걸렸다. 지금 생각하니 나어릴 적도 우리 집은 늘 남의 집 사람들이 번갈아 살곤 했다. 삼촌, 이모, 사촌언니들 등등 그렇게 우리집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았다, 그 영향이 컸을까? 그렇게 잘했는데도 나한테 유리막이 있다고 하니 혹여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성격을 바꾸어 볼까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오래 묵힌 친구들과 나를 아는 친구들은 진국이라 하며 그나마 남아있는 친구들이 몇이 있기는 하다. 이것을 가끔 나는 인덕이 없어 하며 속상해 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들인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신세를 지고 가고 많은 것들을 내게서 얻어갔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 가장 많이 김장을 했다. 동네 김장을 못하는 사람들을 나눠주기 위해서 였다. 그중 더 아주 가난한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엄마는 그 집을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우리가 힘들어지고 그들은 갑자기 잘살게 되었다. 언젠가 엄마가 나를 데리고 그 집에 간적이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형편이 어려워 그집에 돈을 빌리러 간 것은 아니었나, 어린 마음에 생각했었다. 당연히 거절을 당한 것 같았다. 엄마의 그 쓸쓸했던 표정을 난 기억한다. 내가 보기에도 엄마는 그 집에 거의 쌀이며 김치며 나눠주고 심지어는 돈도 수시로 빌려줬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엄마가 돈을 빌리러 간 것이 아니라 빌려간 돈을 받으러 간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모습은 그 어릴적 이후로 본적이 없다. 내 또래 친구였는데 점심도 우리 집에서 거의 늘먹다 시피 한 것도 기억이 난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부침과 먹을 것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동네사람들로 늘 북적거렸고 그 사람들이 돌아가는 손은 거의 빈손이 없었다. 그런생각으로 가득 찬 어린 난 무엇을 생각하며 컸을까?

이제와 생각하면 난 어렸지만 무언가 남을 주면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컸을까? 주는 것에 익숙한 나에게 왜 많은 사람들은 늘 받기만바랬을까?

그리고는 날보고 유리막이네 어쩌네 하면 살았던 그 사람들이 난 지금 생각하면 너무 싫다. 그래서 그런 생각들이 가득 차올라 난 언젠가부터 사람들을 기피하며 나름 내 방어전을 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거절하는 법을 배우면서 아프게 말이다. 그나저나 난 가끔 우리 애들 혼사며 다른 잔치를 치룰 때 정말 사람이 없어서 이거 친목계라고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요즘은 많이든다. 내 주위에 그렇게 아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내가 손을 내밀 때 과연 몇이나 와서 그런 잔치들을 치러줄까 많이 걱정된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들 몇 명이라 해도 조용히 잔치를 치루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위로를 하고 살지만 내심 나도 이제 부터라도 친목계를 많이 들어놔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 집을 자기집 드나들듯이 나를 자기의 핏줄인양, 연인인냥, 분신인양 생각하는 그 고마운 마음이 부담이 되는 것을, 너무 내게는 힘겨움이 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야속하다 하지만 친구의 마음처럼 이기적인 마음이 될지라도 난 적당한 것이 좋다고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을…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도 앞으로 난 공존의 이유처럼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짧은 것으로 깊은 상처를 받는 것보다 긴 오램으로 덜 받는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가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다.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울 정도로 사귀세’ 슬프지만 가장 멋진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