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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2010년 [시-신민걸]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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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1,801회 작성일 11-01-04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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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바람은 언제나 열정이 떠나버린 허전한 자리로 불어온다

출근길 문을 열지도 않은 모닝글로리 앞에서
인사불성의 사내를 본다
충혈된 시선을 피해 지나치다 아차 싶어 돌아본다
밤새 어디에서 머물다 여기까지 불어온 것일까

조금만 취하면 아무 나무에나 기어 올라가
야심을 만만히 다지던 그때는 어렸으니까
그리고 몰랐으니까 참 다행이라고
이제는 바람이 수시로 덤벼드는 까닭을 알아버렸는데도
五方을 잃고
시간도 잊고
다정한 간판 하나 보이지 않아
집으로 가는 길을 까무룩 잊어
털썩 주저앉아 맥 놓고 있다가
회오리쳐 오르는 검은 비닐봉지 불콰하니 바라보다가
이제 와서야 그게 제 묻은 검댕이라는 걸 알아차리는가
따가운 햇살을 피해 모닝글로리 계단에 기대어 휘청이다가

밤새 쏟아내고도 남은 아픈 말들 게워내다가
그저 그대로 인사불성의 시대를
하염없이 걷거나 주저앉는 이 사내가 하필
앳되어 불굴이던 잎사귀를 손바닥 펴듯 활짝 펼치던 나무라고
하염없이 걷다 보면 문득 주저앉아 하염없이 있고 싶다
지금 여기로 들이닥치는 바람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할 것 같아서
나무 아래 가만히 누워서 올려다본다
갈기갈기 찢겨진 하늘 아래
저들끼리 은밀한 악수를 건네며 인사를 한다
바람개비처럼 씨를 빙글빙글 떨구며
인사불성의 계절은 하염없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