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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2010년 [특집 시-고형렬(시인)] 속초의 가을 콤비—高炯淑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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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76회 작성일 11-01-0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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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속초를 한번씩 내려가면 누이가 늘 오빠는 가
을에도 반팔만 입고 내려온다고
청학동에서 가을 콤비를 하나 사준다
 
두 팔을 팔에 끼워주며 오빠는 옷걸이가 좋다고 뒤에
서서 거울을 보고 농을 한다
아버지 생각일 것이다
 
문득 거울을 보니 늙은 오라비 혹은 아버지의 나
양복 한번 해준 적 없는 가족이 있지만 나도 그에게
옷 한번 해드린 적이 없다 설악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
면 떠나고 싶고 색과 옷이 필요하리
다 서로 사랑해서 섭섭한 생각 하고 산다 새 옷을 두고 남루한 몸처럼
 
그 옷을 입고 동명동버스터미널에서 금강을 타고, 북
쪽 진부령 쪽으로 넘어간다 벌써 해가 지고 있다
 
해가 지고 있다, 오늘의 이것만이 테마인지 모른다 모
든 것이 다 가고 남은 산령(山嶺)
 
속초와 진부령, 이미 지나온 간성과 서울 쪽은 어두워
지고, 어디선가 퇴근하는 나의 검은 머리 위에 비췄을
가등의 안개가 무릎에 내려가 있는 옷자락을 만져본다
그러면 저무는 산처럼 속초도 어두워졌을 누이를 생각한다
 
이곳에 올 수 없는 설악의 저승은 어디쯤일까, 혼자
떨어져 사는 누이야
옷이 나를 깔끄러워한다 어디선가 아직도 슬픔이 지
워지지 않아, 이 속초 기성복에선
오징어 냄새가 난다
 
기다려서 더 어두워 이젠 손을 가리고 밖을 내다본다
직행으로 가는 버스 유리창 속
생각다나는졸아도이망념뒤에모든것이따라온다이제
두 시간만 가면 강원도 물 내려가는 양평이 온다 그
물과 나는 만난다
 
긴팔로 돌아가는 동서울행 버스 유리창 안에
알 길 없는 골혼(滑昏)으로 함께 눈뜨는 나는, 한덩이
유리 눈알로 부서졌을 것이다
 
 
 
 
| 편집자 주
고형렬 님은 1954년 속초 사진리 출신으로 갈뫼 7집부터 18집 까지 가장 젊은 날을 갈뫼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79년『현대문학』등단. 시집《대청봉 수박밭》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기도 양평군 지평에서 살고 있으며「시평」사를 운영하고 있다. 지훈상, 일영문학상,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