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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2010년 [특집 수필-이반(극작가)] 노가리불알과 청양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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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89회 작성일 11-01-0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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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하고 속초에 와서 산지도 이 년이 되어간다. 스무 살에 떠나 예순 다섯에 돌아왔으니 어지간히 오래 타향에서 살다 속초로 온 셈이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는 한 달에 한번, 늦어도 한 학기에 두 세 번은 속초에 들렀다. 그렇게 자주 들려도 이곳에 사는 친구들에겐 타지에 가서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칠십대를 바라보는 친구들은 옛날과 다름없이 반기고, 추억을 이야기하며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말하자면 자연과 인심은 변한 게 없는데 피차간의 의식과 생각에는 많이 차이 날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자손의 성비에 대한 생각이다.

속초 친구들의 남아선호 사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공수산의 박영남 사장에게 물었다.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냐고 하니까 거침없이“아들도 없는데 사업을 확장해서 무얼 하느냐”고 한다. 너무 단호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돌감자 장학회 박무웅 회장의 남아선호 사상은 19세기 급이다. 그와 마주 앉으면 나는 한두 세기를 역류해서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하나뿐인 며느리가 손녀를 출산하니까 축하의 말도 해주지 않고 중국으로 도망갔다 한 달 만에 돌아와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내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사내아이들만 좋아한다. 아내와 며느리 또는 딸이 옆에 있어도 개의치 않고 사내아이들만 예뻐한다.

아들 둘인 김홍도 형은 손자가 다섯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말이 길었는데, 이제는 말이 더 길어지고 목소리까지 높아지고 있다. 손녀 둘뿐인 내게 며느리 보고 하나 더 낳으라는 영을 내리라고 한다. 나는 홍도 형이 내 며느리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할까 겁이 나서 애써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 둘을 낳아준 내 며느리가 내게 말했다.

“아버님요, 지는 부산에 안 가겠습니다.”

“그라면 쓰나, 자주 찾아뵈어야지.”

“부산 가면 어머니가 자꾸 아들 낳아야 된다고 성화하셔서예.”

내 며느리는 여자만 사형제다. 지난 추석에 며느리 보고 부산 안 가느냐고 하니까 심드렁하게 안 가겠다고 한다.

성묫길에 백촌 김형준씨의 밭에 들렀다가 역습을 당했다. 내 두 손녀를 본 김형준 씨가 내 며느리에게 아들 하나 더 낳으라고 뜬금없이 제안했다.

시나리오나 각본에 없는 대사를 작가나 연출의 허락도 없이 배우가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해버린 셈인데, 나는 하늘에 두고 맹세하지만 그에게 그런 말 하라고 시킨 적이 없다. 속초 지역의 남아선호 사상이 내 며느리에게 아들 하나 더 낳아 달라고 했을 뿐이라고 이해하려 애쓸 뿐이다.

옛날 속초에는 구마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구획하기 좋고 부르기 쉽게 1구, 2구 할 때인데 지금의 교동이 그때는 4구였다. 4구 낙천양조장 앞으로 작은 개울이 남쪽으로 뻗어있었는데 개울물은 청초호로 흘러들었다. 개울 양쪽엔 나란히 작은 집들이 서 있고, 그 집에서 나온 개들과 고양이가 서로 눈인사를 하고 다투기도 하며 정겹게 살 때였다.

원산 어머니는 울화가 치밀어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빨래거리를 문지르고 방망이로 때려도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원산 어머니가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좀 길다. 4구 낙천양조장 앞 개울가의 원산 어머니는 내 친구 영규의 모친이다.

영규는 우리와 같은 학년 여학생의 동생과 결혼했다. 아름답고 건강하고 얌전해 모두들 부러워했다. 첫째 아이를 순산했다. 딸이었다. 그때까지 영규는 오석이네 알파약국 앞에서 득남하지 못한 친구들을 멸시한다고 했다.

둘째도 딸이었다. 아들이 없이 딸만 있는 친구들에게 대한 영규의 멸시도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셋째도 딸이었다. 딸만 셋을 둔 동광, 주영, 성룡에 대한 영규의 시선이 따스하게 변해 갔다.

영규 부인이 네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은 기대와 희망으로 아들을 기다렸다. 뜬소문인지, 진실인지 알 길은 없으나 점쟁이에게 가서 물으니 이번에는 틀림없이 아들이라고 한다고 했다. 임산부의 배도 아들을 품고 있는 형태라 했다. 모든 가족이 아들 낳기를 바랐지만 원산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기대는 상식선을 넘고 있었다. 어머닌 이번에 아들만 낳으면 딸 셋을 낳은 며느리와 아들에 대한 섭섭함도 다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규네 넷째는 쌍둥이었다. 둘 다 딸이었다. 원산 어머니는 기가 찼다. 밥이 목구멍으로넘어가지않고일이손에잡히지않았다.‘ 하늘이하는 일을 사람이 어쩔 수는 없지.’체념을 하고 잠을 청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세상에 딸만 둔 집이 어디 한두 군데야, 괜찮아.’하고 자신과 며느리에게 말하지만 둘째 아들인 영규가 딸만 다섯 두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없었다. 그런데 낙천양조장 들머리쯤에 사는 동광이네가 네 번 만에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애써 섭섭함을 억누르고 있는데, 옆에서 친구가 아들을 낳다니, 부아가 치밀어 왔다. 화를 누르기 위해 청소도 해보고 빨래도 해보지만 마음을 다 잡을 수 없었다.

김동광은 영규나 나 같은 학년이었는데 태권도를 열심히 해서 여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 연애 같은 것은 할 줄 모르는 친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꼬셨는지 우리 동기생 여학생 증 건강하고 음전해 언제나 안정감을 지니고 있는 강옥선이와 결혼했다.

강옥선 여사의 오빠는 우리가 고등학교 일학년일 때 고등학교 삼학년이었는데 규율부 부장이었고 축구부 주장이었다. 속초 4구 후생호집 딸 강옥선 여사도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넷째도 딸을 낳았다. 우리는 그것으로 끝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또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주책이란 친구도 있고, 건강이 있으니 문제없을 것이란 이야기도 들려왔다. 집념의 강여사는 아이를 낳았다. 순산이었다. 아들이었다.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김동광은 아들을 낳은 기쁨에 땅위를 걸어다니는 게 아니라 날아다니는 기분으로 학교와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그날도 학교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안고 낙천양조장 앞으로해서 청초호 쪽으로 가던 길에 원산 어머니를 만났다. 동광이는 아들을 안고 점잖게 원산 어머니, 영규 모친에게 인사를 했다. 원산 어머닌 동광이와 그의 갓난 아들을 보자마자 이제껏 참아왔던 울화가 터지고 말았다.

“야, 이 녀느 간나 새끼야, 그까짓 아들 하나 놓구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위세 떨고 지랄이야! 노가리 불알만한 고추 하난 달구 나왔다구 지랄이야. 햇아 데리구 꺼져. 이 간나새끼야! ”

그리고 들고 나온 세수 대야의 개숫물을 동광이와 갓난애 앞에 뿌렸다.

동광이는 개숫물을 피해 얼른 오던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동광이는 이 지역에서 교장으로 승진해 정년을 맞았다. 넷째 딸을 시집보내던 날 강옥순 여사는‘나도 장을 하나 갖고 싶다’고 해 늙은 아내에게 장을 하나 사줬다. 장이 김 교장네 안방으로 들어오던 날, 우린 장 앞에서 소주를 마셨다. 속으로 눈물이 났다.

2010년 10월 15일이면 이제 한 열흘 남았는데 그날 김 교장네 막내아들이 장가간다. 한화콘도에서 결혼식 한다고 한다. 노가리 불알만한 고추를 달고나온 김 교장네 막내가 장가를 간다.

영동지역의 문학동인지‘갈뫼’가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것은 사십 년 전이다. 영동지역에서 문학동인지가 발간되다니, 가슴 뛰고 흥분되는 사건이었다. 친구 성선이가 내 곁으로 와 제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원곡 김기승선생 글씨를 받을까, 이제하 형의 디자인을 받을까 고민하다 시인 김상옥선생의 글씨를 받기 위해 화신백화점 뒤로 찾아갔다.

‘갈뫼’창간호가 발간되었다. 노가리 불알 같은 고추가 아니라 튼실하고 매운 청양 고추였다. 나는 감격하고 감동했다. 이 잘난 아들을 낳으니 사십이 되도록 총각으로 늙어 죽이는 부모들이 야속하다. 총각에서 홀애비로 넘어가는‘갈뫼’를 장가보내는 것이 내 희망이다. 노가리 불알도 장가가서 자식을 열 명은 낳아야 된다고 하는 세상에, 청양 고추를 달고 나온 갈뫼가 장가가서 일 년에 네 번씩 아들 딸 가리지 않고 자식을 낳아 이 땅을 푸르게 가꾸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을까 상상해본다.

| 약력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나 속초에서 성장. 1961년 숭실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입학. 1992년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예술철학) 학위 수여. 1966년 잡지‘새벗’에 작품 발표. 1968년 서울YMCA 소극단‘탈’의 연극활동 주도 극작가로 활동 시작. 1969년 동극집‘주근깨미 꼬마천사’출간. 1976년 극단 현대극장 창단 멤버로 연극의 전문화, 현대화 운동에 적극 가담. 1979년 희곡‘그날, 그날에’로 제3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희곡상 수상. 1984년 희곡‘바람타는 城’으로 제20회 동아연극상 희곡상 수상. 1989년 희곡‘아버지 바다’로 문예진흥원 우수희곡 공연 지원금, 크리스찬문학상 수상. 2005년 희곡‘소현세자, 흔적과 표적’으로 제2회 창조문예상 수상. 숭의여대 교수, 덕성여대, 한국외국어대, 카톨릭대, 동국대 강사 역임, I.T.I 한국본부 희곡분과위원장, ASSITEJ(한국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이사장 역임, 동북아시아 기독작가회의 한국회장 역임, 2008년 8월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정년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