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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2010년 [특집 회고-이상국] 갈뫼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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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07회 작성일 11-01-0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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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973년 4집부터 참여해서 20집을 마지막으로 갈뫼를 떠났다. 그간 많은 세월이 흘렀다. 40집 출간을 축하드리며 비교적 초기에 같이 했던 선후배들을 회상해 본다.

  30여 년 갈뫼의 회장이셨고 지금은 고문이신 소설가 윤홍렬 선생은 내 고교 은사다. 카리스마가 대단한 분이다. 그것이 갈뫼를 대한민국 최장수 동인지로 존속시킨 힘이기도 하다. 설날 문우들과 새배가면 술상 머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 하셨다. 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싶어하셨는데이번생엔어려우신것같다.“ 다리밑에는언제나물이흐르고 인생은 벼르다 마는 것이다”선생님이 수업 중에 하시던 말씀이다.

  시인 이성선. 71년 등단을 하고 그는 갈뫼의 중심이 되었다. 동명동 언덕배기, 지금은 나무와 담쟁이 넝쿨이 무성한 그의 옛집 서재에서 나는 그가 보던 헤세의 책들을 물려받기도 했다. 그는 다치기 쉬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술 마시면 이성선 최명길 강호삼을 비겁한 40대라고 시비를 걸고는 했는데 나에게도 그 사십대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내가 만났던 갈뫼 회원들 중 그만 하늘나라에 가 있다. 형, 거기서도 시 써? 언젠가 물어보고 싶었다.‘ 화접사’의 시인 최명길 선생이 어떤 처녀를 사모해서 어떤 날 예비군 훈련중에 그 처녀의 집 앞에서 보초(?)를 섰다고 이성선 선생이 놀리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처녀가 지금 사모님인지. 더러는 수줍고 도덕군자 같은 선생에게 그런 열정이 있었다니……. 백두대간 종주하고 언젠가 시내를 걸어가는 걸 보았는데 반은 산신령처럼 보였다. 좀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분이다. 시도 깊고 삶도 깊은 분이다.

  소설가 강호삼 선생은 나에겐 격의 없는 선배다. 좀체 늙지도 않는다. 그의 청학동 자취방이 비면 나는 거기를 아지트로 삼았다. 대부분 불량하게 사용했다. 그는 백수인 나에게 기상청 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주었으나 나는 게을렀다. 가을에 밤을 주어다 주면 좋아하던 두어 살짜리 딸아이는 나를 밤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영화감독이라고 한다. 그가 속초에 안 왔으면 갈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못 말리는 문학소녀, 박명자 시인, 그의 열정과 공부는 아직도 나에겐 숙제다. 69년 갈뫼 발기 모임에 갔었는데 동인 명칭을 갈뫼로 하자며 갈뫼의 의미를 설명하던 미모의 여교사가 눈에 선하다. 그는 갈뫼의 교주이자 신도이며 갈뫼에 대하여 아직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는 회원이다. 속초 중앙동 철광석 부두로 가는 길 근처 자택, 책으로 가득한 서재에서 그의 남편에게서 술대접 받던 일 그윽한 기억이다. 강릉생활은 편하신지…

  내가 73년 입회하니까 김성숙은 한 해 먼저 선배가 되어 있었다. 흔치 않은 처녀회원이었다. 거의 20년을 동인지 울타리 속에서 지내다보니 별로 흉허물이 없었다, 피차 나이는 자꾸 들어가는데 그러지 말고 나에게 시집오라면 장난치지 말라면서 커다란 눈을 있는데로 흘겼지. 나는 뭐 잘났다고 그이를 그렇게 놀려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소설은 야무졌고 열정이 있었다. 등단하고 서울로 시집가고 만난지 오래 됐다.

  아동 문학가 김종영. 나와는 고교 동기인데 자다 만져봐도 양반이다. 언젠가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았는데 어릴 때부터 보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들과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많이 늙었구나(나는 내가 나이 먹은 생각은 안하고 사니까) 했는데 그는 실제 교장이 되어 있었다. 73년 동시‘아침’의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은 우리에게 사건이고 충격이었다. 갈뫼는 그의 훌륭한 아동문학 전통을 잇지 못했다. 그는 술을 못 마시는 범생이었다.

  김춘만 시인은 젊어 한 때 내 지갑이었다. 내기 당구로 그에게서 얻어 먹은 보신탕만 해도 개 몇 마리는 된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어서 훗날 고스톱으로 그에게 뜯긴 돈이 무릇기하이냐. 그에게는 부드러운 리더쉽이있다. 그것도 갈뫼의 자산이다. 그의 데뷔작‘장지에서’는 시름없이 눈 내리는 작품이다. 그는 꺽다리 교장이 되었다. 교장 선생보고 내기 당구치잘 수는 없고 날 잡아 고스톱이나 한 판.

가야다방 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고형열 시인은 고성 군청인가 어느 곳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잘나고 신중했다. 우리는 부둣가 회집에서 고은이나 군사독재 이야기 끝에 술병을 쓰러뜨리기도 했다. 80년 대 중반 까지였다. 그 때 우리는 속초의 집창촌<금호실업> 같은 곳에 간 적도 있었다. 물소리 시낭송회를 함께하던 그는 어느 날 훌쩍 서울로 갔다. 그의 현대문학 데뷔작‘대청봉 수박밭’은 지금 읽어도 높다.

  이충희 시인, 시의 윤곽이 뚜렸하고 깊다. 언젠가 내 중신 섰지. 삼척에 계실 땐가 담벼락의 능소화가 뚝뚝 떨어지는 학교 관사같은 곳에서 초등학교 교사와 선을 봤지. 그리고 나는 가타부타 암말도 안했지.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내가 천방지축 헐떡이며 사는 게 안쓰러워서 늘 염려를 해 주었는데 나는 그걸 잘 따르지 못했다. 늦게 본 딸아이가 대학에 갔다고 만년필을 사 주시기도 했다. 누님은 그렇다.

 

 

 

| 약력

1946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동해별곡》《집은 아직 따뜻하다》《어느 농사꾼의 별에서》외.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등 수상. 현 만해문학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