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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2011년 [수필-이구재] 東里 선생님을 回憶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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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329회 작성일 12-01-1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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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지방에, 3월에 내린 눈으로는 20년 만이라 했다.

 

춘설치고는 엄청나게 내렸던 눈이 봄 햇살에 녹아내리면서 아스팔트길에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정확하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오늘 날자가 쓰여 진 대학노트를 펼쳐놓고 옛 강의록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서울 미아리에 있던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학생 시절 이야기를 피워 올리기로 한다.

 

1965년 3월 15일이라는 날자가 있고 <제 1장 개설 >이라는 큰 제목 다음 줄에<제 1절 소설의 미학과 방법 >이라 필기한 동리 선생님의 강의 노트를 나는 지금까지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입학시험 날 이었다.

 

그날을 상기하면 초로가 된 지금도 파안대소 할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입학시험 문제 중에“ 수진이”“ 날진이”의 뜻을 설명하라는 문제가 있었다.

 

영 떠오르지 않는 답을 궁리궁리하다가 그만 시간에 쫓기게 되었고 곧 기상천외한 답을 써서 제출하게 되었다.

 

수진이 _ 물에서 사는 고기 중에 가장 맛있는 진미.
날진이 _ 날아다니는 조류 중에 가장 맛있는 진미.

 

시장기가 들 시간쯤 이었던지 웃기지도 않는 뚱딴지를 써서 제출했다.

 

채점하시던 선생님께서는 그때부터 내 이름을 기억 하셨던 것 같았다.

 

입학 며칠 후 그 당시 학과장 이셨던 선생님 방에 들린 때였다.“ 이구재, 그래 수진이 날진이를 알아 봤나? 상상력이 풍부하더군.”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지만, 하회탈처럼 빙그레 웃으시는 모습에 당황감이 사라지고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국어사전을 찾아 알아두었던 답을 계면쩍게 말씀드린 기억이 난다.

 

수진이 _ 사람의 손으로 길들여 사냥에 이용하는 매, 새매.
날진이 _ 길들지 않은 야생의 매, 새매.

 

선생님의 첫인상은 내면의 고뇌를 침전시킨 듯 한 고요와 매우 통찰력있고 성찰적인 분이셨다고 기억된다.

 

강의시간은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셨는지, 또 노트 검사에 도장까지 찍어 주셨던 치밀함도 모두 공정한 학점 매기기의 한 방법이었음을 회상한다.

 

한자를 많이 사용 하시는 바람에 노트정리 하는데 여간 애먹은 게 아니었으나 그 덕분에 한자 공부 좀 한 셈이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는 칠판에 손수 문제를 써주시고는 그 중에 세네 문제만 출제하시겠다는 배려도 있으셨다.

 

소설 감상 노트에 이런 문구가 눈에 뜨인다.“ 노력은 곧 수련이다, 그러므로 쓰고 읽는 것을 쉬지 말고 계속하라.” 문창과 학생들의 기본 철칙이었다.

 

창작실기 시간에는 학생들의 자작품을 본인이 낭독하고 서로 평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기억이 없고 목소리가 낭낭 하다는 칭찬의 말씀이 생각난다.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첫 강의 날“ 방학동안 경험한 일들을 한 사람씩 나와서 얘기 해보시오.” 했을 때 내 차례가 되었는데“ 저는 공개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경험 했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 무엇인가 가슴깊이 느껴지는 것이 있을 테니 인생의 내적체험을 소재로 좋은 작품 써보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나는 용기를 얻어 어설프게나마 생애 첫 산문 작품 인 단편 <싸디스트>를 써서 교지‘ 서라벌’에 발표 했었다.

 

또 이런 기억도 있다. 학점이 궁금한 학생은 열람하러 오라 하셨는데, 여러 학생이 우르르 선생님 방으로 몰려갔다. 다 물리고 한 사람 씩 열람시키셨는데 나는 내 성적을 본 후에 그 당시 관심 있었던 P학생의 성적을 보여 달라고 청하였으나 거절당한 기억도 난다.

 

2학년 어느 가을날 선생님 댁을 불쑥 방문한 적이 있었다.

 

서울을 떠나 멀리 산지가 30여 년이 넘어 그때의 선생님 댁 동네 이름도 아리송하지만 오장동 이었던지 을지 6가 메디칼 쎈터 뒤쪽 어디쯤이었던 듯싶다.

 

대문을 들어서면 큰 나무들이 빼곡하여 그늘을 이루고 그 사이 사이 바위들이 앉아있는 긴 정원이 있었지, 집안 구조는 적산가옥 인 듯 하였으나 자세히는 기억이 없다.

 

깊은 방 안에는 묵향이 흐르고 책상 위에는 붓글씨를 쓰시던 도구들이 있었고 방바닥에도 이미 써 놓으신 붓글씨들이 여러 장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쩐일 이냐”하시며 소리 없이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으셨다.

 

그 당시 학생들은 수시로 들락이며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고 추천 해 주시기를 바랐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해서요.” 나는 좀 궁색한 대답이었지만 솔직한 대답이기도 했다. 손소희 선생님께서는 안쪽의 더 깊은 방을 따로 쓰고 계셨는데, 고양이를 네다섯 마리는 키우고 계셨다. 나는 워낙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기꺼이 야옹이들과 반가운 상면을 했으나, 모르고 들어간 대다수의 학생들은 기암을 하든지 질겁을 했을성 싶다.

동리 선생님께서는 내 이름자를 세필로 李 玖 宰라 쓰시고 “ 옥돌 구에 제상 재라.” 한참을 생각에 잠기시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글로 성공하려면 이름을 바꾸어야겠다, 이 이름으로는 가정은 잘 꾸리겠는데.”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변변한 글쟁이노릇을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지만 후회는 없다.

 

1967년 3월 1일 선생님께서는 3. 1 문화상을 수상하셨다.

 

수상식장 인 남산에 있는 드라마쎈타로 과 학생 몇이 참석 하였으나 나를 비롯한 아무도 축하 꽃다발 하나 준비하지 못하고 그냥 박수만 치고 내려왔던 일이 지금 생각 해봐도 매우 안타까워 후회된다.

 

내가 초등학교에 잠시 재직하고 있을 때 2학년 글짓기 반이었던 꼬마학생이 지금은 시인이 되었다. 그 제자는 지금도 편지로 소식을 전해 오는데, 편지 머릿글에 꼭 이렇게 쓴다.

 

“선생님 선생님 나의 선생님”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나의 존경하는 선생님께 안부 글월 한 번 올리지 못했고 졸업 후에는 찾아 뵌 적도 없었음에 내 제자에게 이런 호칭 받는 것이 오히려 동리 선생님을 향하여는 죄송한 맘 그지없을 뿐이다.

 

졸업하던 해 결혼했고 이곳 강릉, 서울서 먼 바다동네로 이사 와 분주한 생활 열심히 산 것으로 핑계를 대 본다.

그 당시 문창과에는 훌륭하신 박목월 선생님, 손소희 선생님, 미당 서정주 선생님, 이범선 선생님, 김구용 선생님 함동선 선생님 등 대단히 존경받는 선생님들이 출강 하셨지만 문예창작과 학과장 이셨던 김 동리 선생님과의 이런 저런 자잘한 일들이 추억이 되어 주마등처럼 스친다.

 

지금 내 앞에는 동리 선생님과 둘이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 놓여있다.

 

아마도 2학년 봄 야유회에 가서 찍은 사진 같다, 수유리나 정릉 골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큰 바위 위에 솔이 서있는 그 아래 작은 바위에 엉거주춤 걸터앉은 포즈가 우스꽝스러운 게 아마도 급하게 서둘러 찍은 모양이다.

 

훤하신 이마와 미소 머금은 표정은 지금도 살아계신 듯 고요히 나를 응시 하신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그 서라벌 시절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릅니다.”

 


* 이 글은 지난 2005년 김동리 선생님 추모 10주기 기념책자인“ 영원으로 가는 나귀”에 실렸던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