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1호2011년 [수필-노금희] 사용자 우선원칙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373회 작성일 12-01-18 15:51

본문

 

엄밀히 말하자면 냉장고보다 냉동실이라고 해야 맞겠다. 대개의 주부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먹다가 남으면 버리기는 아깝고, 몇 번 망설이다가 넣어두다 보면 긴요하게 쓰일 거 같아 냉동실에 넣어두게 된다. 냉장고가 없던 엄마 세대에는 음식을 매끼마다 해야 하는 수고로움과, 김치도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거나 찬물에 담가 두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지금은 전자제품사용의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다.


결혼 혼수로 장만했던 냉장고는 어느새 맨 아래 칸이 계속 얼어버려 새로 장만하면서 쓰던 것은 중고품에 팔아도 제값을 받지 못하는 거 같아 그냥 쓰다 보니 냉장고를 2대를 사용하고 있다. 금방 먹지 많을 빵을 얼려두고, 고모가 명절에 주신 취떡, 여름에 시원하게 먹으려고 얼려둔 과일들...나름대로 냉동실 문을 열면 과일종류, 생선, 양념들을 분리해서 투명비닐에 넣어 찾기 쉽도록 정리해 두었다. 가끔 잡지나 TV에 나오는 수납의 달인 만큼은 못하지만 말이다.


지난 6월 연휴에 휴가를 온 여동생이 나의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언니 냉동실엔 뭐가 그리 많아? 내가 정리 좀 해줘야 할까보다”


이러길래


“아니, 냅둬라, 내꺼 내가 정리해야 알지”


옆에서 듣던 남편도 처제 말에 한마디 건넸다


“그래, 냉장고 정리 좀 해줘라, 언닌 아까워서 못 버릴 껄”
“괜찮다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손대지 마라”


자잘한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습관을 잘 아는 남편은 나의 약점을 툭 건드렸다.

‘뭐, 내가 하지 말랬으니 하지 않겠지’ 생각하고 출근을 하였고, 동생은 뭐하는지 연락도 없다가 오후에야 전화가 울렸다.


“언니, 나 지금 서울 올라가는 중이야, 그런데 언니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언니집 가서 냉동실 정리했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순간‘ 아고…’ 머리가 아득해졌다. 도대체 뭘 어떻게 버리고, 정리했다는 건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언니, 냉동실을 너무 믿는 거 아냐? 유통기한이 너무 지난 거 같아 버렸는데” 아직 상황파악이 안되었는지 잘한 일 인양 무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그대로 놔두라고 했지, 왜 시키지도 않은 걸 했어? 어제 분명 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물어보지 않고서 네 멋대로 하니? 어떤 것이 오래되고, 버릴 건지, 먹을 수 있는 건지 너가 어떻게 알구 막 버리냐구? 뭐를 버렸는데?”


“얼려 둔 과일 하구, 은행, 들깨가루, 떡 이런 거 다 버렸는데”


나는 화를 참기 힘들었다.


동생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미안해, 언니 내가 언니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몸이 약해 피곤해 하는 언니를 도와준다는 생각만 하구 ... 내가생각이 짧았어”


이미 엎질러진 일이라, 근무하면서 도대체 어떤 것들이 버려졌는지 아까운 생각에 궁금하기만 했다. 퇴근하자마자 냉동실 문을 열었다. 그 많던 나의 비상식량들이 다 사라진 후였다. 몇 가지만 남은 냉동실은 텅 비어 냉기가 푹푹 나오고 있었다.


후끈 달아오르는 열기를 다스리지 못한 채, 얼른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함으로 달려갔다. 그리 덥지 않은 날씨라 냉동한 것들이 뭉쳐 있으면 금방 녹지 않았을 거 같았다. 쓰레기 분리수거함을 열어봤으나 언제 비워졌는지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침 일찍 비워지는 쓰레기들인데 누가 치운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이지 아껴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에 눈물이 폭 쏟아질 거 같았다.


제철에 나온 밭 딸기를 사서 여름에 먹으려고 넣은 건데 그것도 버리고, 친구가 나눠준 들깨가루 사라졌다. 남편이 먹고 싶다고 해서 샀던 속살 발그스레한 바다 송어도 다 먹지 못해 넣어둔 반쪽이 있었는데 그것도 버려졌다. 손수 껍질을 제거한 은행, 냉동실 자리 차지한다고, 야채랑 달걀 섞어서 부침개에 쓰려고 알알이 떼어낸 옥수수 알, 김치 할 때 쓸 다진 생강, 방앗간에 묵은쌀을 가져가 뽑아둔 떡볶이 떡, 아, 또 뭐가 있었을지... 아마 뒤늦게라도 필요해서 뒤적여야만 생각날 많은 것들.


오랫동안 시장보기를 포기해도 먹거리가 든든하다 싶을 나의 보물창고인 냉동실. 시간을 쪼개서 만들어 놓은 것들이 너무나 아쉽게도 사라져버렸으니 나의 신경은 날카로울대로 날카로와져서 동생에게 속상한 마음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너 다음부터는 언니 집 올 생각도 하지 마! 내가 시간 아껴가며 얼마나 힘들게 해서 넣었는데, 너 그걸 알기나 해”


동생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가 오지랖 넓게 그렇게 했는지, 계속 후회가 되네, 언니야, 미안해”


야속한 마음에 동생을 탓하기도 했지만, 냉동실을 너무 맹신하고 있는 내게 경각심을 준 계기가 되었다. 직장생활 한다고, 조금 아깝다고 나중에 먹는다고 넣어두고 막상 먹으려면 해동시간이 걸려서 포기하게 되는 것이 냉동실 음식인데 말이다.


살림꾼 동생은 식품의 유통기한도 항상 신경 쓰고, 음식 만들면서 허투루 버리는 일 없이 알뜰한 아이다. 직장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꽉찬 나의 냉장고를 보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고, 그리 맥없이 화를 낸 내가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그렇게 나의 냉동실 청소사건은 절대 남의 냉장고는 들추지 말아야 한다며 두고두고 우리 네 자매들 간에 얘깃거리가 되어 웃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강한 냉기를 뿜어내던 냉동실은 다시 조금씩 채워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