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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2011년 [수필-이은자]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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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389회 작성일 12-01-1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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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님’은 누구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님’이 있다.


젊은 날 풋 시절엔 열병처럼 뜨겁게 연모하는‘ 그대’가‘ 님’이다.


인생의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애국심 같은 신념이요 때론 순교를 불사하는 신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자가 시집가고 아이 낳아 기르다 마침내 그 자식이 성년이 되어 둥지를 떠나면 그들이‘ 님’으로 바뀐다. 시집보내거나 군(軍)에 가거나 간에, 내가 그 나이에 그러했듯이 그들도 앞만 보고 날으느라 여념 없건만 빈 둥지 지키며 전화기를 하루에도 몇 번 들었다 그냥 내려놓는다.“ 보고싶다고, 그리웁다고, 아니 허전하다고”. 속내를 들킬세라 아닌 척 그저 혼자 짝사랑 하며 지낸다.


태중에서부터 어미의 투병으로 인해 병약하게 태어난 내 작은 아들이 군에 입대한 것은 88 올림픽 전후였다. 대학 중도에 육군으로 입대, 증평훈련소에서 퇴소식을 치렀다. 사전 에 아무런 예고 없이 연병장에 도열한 신병들 사이로 빗금 하나 그었다. 그 줄 좌우로 두서너 걸음 옮겨 세우더니 3분의 2가 자대(自隊)배치랍시고 전경(戰警)이 돼 버렸다. 기가 찼지만 그게 군대고, 그게 국가의 권력이다. 잘못 된 권력은 한 집단이나 개인을 엄청난 도탄에 빠지게 하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증언이다.


민주화 바람이 한 고장에서 불씨로 피어오르다 급기야 서울 종로, 세종로, 광화문 거리에‘ 넥타이 부대, 까지 총체적으로 불붙어, 더는 막을 수 없게 되던 그 시기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어엿한 육군이고져 입대한 아들들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정영 아니고 싶은 전경이 되고 마는 날, 면회갔던 많은 부모 형제들 눈시울을 적시고 돌아오게 했다. 오전에 퇴소식이 끝나고 가족과 만남을 가지려 일제히 흩어졌다. 고만 고만한 키에 똑같은 복장, 까까머리, 불과 몇 주 전에 집을 떠난 아들을 어미가 선 듯 찾아내지 못 했다. 너무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리둥절 멍하니 서 있는 가족 앞에“ 충성” 거수경례 붙이기까지.


서울 전철 경복궁 3번 출구엔 지금도 전경이 양 쪽에 석고상처럼 서 있다. 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요즘은 전경도 자원하여 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나라는 여전히 전경을 필요로 한다는 데는 변함없다. 전쟁을 쉬고 있다는 점이 그중 한 이유지만.


내 아들이 아직 군에 가기 전 일이다.


나는 그 출구를 오르내리며 그네들이 한없이 가엾었다.“ 권좌(權佐)가 이렇게 자신 없으면 자기가 물러앉을 일이지 어쩌자고 남의 집 새파란 자식들을 저 지경으로 세워놓고 있단 말인가? ” 모시적삼 입고도 부채질 하는 이 무더위에 두터운 정복에 무장한 채 세워 두다니. 초가을이라도 우측에 선 전경은 인왕산 능선에서 비수처럼 내리꽂는 석양(夕陽)을 이마 정 가운데로 받으면서 여전히 부동자세, 엄동설한은 또 어떻고….


- 어느 어미의 아까운 아들일 텐데 여기 이렇게 벌(罰)서고 있노.-


나는 법이고 규칙 이전에 한국식 엄마 맘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거나, 몸 이리저리 쓸어 만져주었다.“ 고생 한다 젊은이, 힘 내거라.”


어색해서 약간 주춤거리며 한 마디.“ 넷, 괜찬씁니다.”


어느 날엔 닭장차 선임하사(?)를 찾아내서“ 저 사병 챙 있는 모자 하나씌어 주던지 아니면 서 있는 위치 각도를 약간 만이라도 돌리게 해 주던지, 안될까요?”


“규칙입니다. 곧 교대 합니다.”


아들이 전경되고 난 뒤로 내 아들이 저들처럼 어느 장소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나라(國)가 야속했다. 너무 억울했다.


병약한 아들이 잘 커줘서, 군에 입대판정 받았음이 감사했는데. 정의를 외치는 학우(學友)들 데모를 폭력으로 맞서야 하는 신분이 된 것이다. 이 땅의 아들들은 지금도 이렇게 슬픈 역사 한 복판을 걷고 있다. 전시(戰時)가 아닌데, 서로 적(敵)도 아닌데, 친구 간에 질시(疾 視)의 대상이 돼 버린 것이다.


삼십 여년 전 내가 속초 양양 간 완행 버스를 탔을 때 봤던, 한 노파가 떠오른다.


아침 등교시간 차 안은 콩나물 시루였다. 한 발짝도 옮겨 디딜 틈이 없어, 비록 창가 의자에 앉았던 어린 학생이 노파에게 자리를 내어 주려해도 응신 할 수 없어 거북한 얼굴을 하며 단발 머리카락만 바람에 흩날렸다. 노파는 막무가내 비집고 기어이 창문 쪽으로 윗몸을 구푸렸다. 헐거운 몸뻬(일본식 작업복) 에 흰 무명 적삼, 머리엔 수건을 쓰고 있었다. 삼각으로 귀를 접어 쓰는 흰 머리수건, 오래전부터 우리네 여인들이 하나 같이 쓰고 지내는 것이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가다듬는 위생모자, 볕에서 일 할 때는 햇볕가리개, 땀나면 땀 수건 겨울엔 방한모자로 두루 소용이 되는 물건이다.


비릿한 생선냄새로 봐선 생선장수 같고 쉰 땀내로 봐선 농부 인 것도 같았다. 노파가 풍기는 체취는 코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는 창쪽 좌석에 앉은 학생 무릎에 옆으로 반은 누운 자세로 머리수건을 벗어, 열린 창 밖에 내밀고 흔들었다. 그냥 내밀어도 들이치는 바람에 펄럭이겠건만 그는 훠이- 훠이- 소리질러가며 흔들었다가 멈추었나 하면 또 다시 흔들곤했다. 아! 그는 군 초소에 대고 수건을 흔드는 것이었다. 왜일까, 돌았나?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곁 눈짓 하며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휴전 중인 우리나라는 1970~80년대 까지도 전체 해안선에, 그 지세(地勢)에 따라 촘촘히 군 초소가 있었다. 북에서 끊임없이 도발해옴으로 국부적 전쟁은 계속인 셈이다. 내륙 깊숙한 곳에서는 임진강, 한강하구 같은 물길을 따라 간첩이 침투 했다. 철조망을 이중 삼중 설치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수중에 까지 설치하고 그 위로 서취라이트를 비춰도 도둑에겐 틈새가 있게 마련, 초소병은 생명 걸고 자기부대와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그의 소임이기 때문이다.


그 노파, 거기 초소에 자기 아들이 있음이다.


그렇다면 한 번으로 족하지 왜 초소가 보일 때마다 똑 같이 흔들어 대는가.


그땐 나도 아이들이 어려서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 했다.


내가 아들을 군에 보내고서야 그 노파의 행동을 이해하게 됐다. 거기 초소에‘ 님’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군에 보낸 어미 눈엔 얼룩무늬 군복입은 청년이면 모두가 제 아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오랜 적 아침, 속초에서 양양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흰 머리수건을 내졌던 노파는 아들이 군인이었을 것이고, 해안 초소에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어느 초소건 그 속에‘ 받들어 총구’를 바다에 대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아들이면 모두가 제 아들이었던 것이리라.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그 노파의 마음이 이제야 알아진다.


젊은 날 이성(異性)에 대한 풋 정은 잠깐이고, 자녀들이‘ 님’이 되고부터 어미는 세상 하직할 때까지 그들이 가슴 절절한‘ 님’인 것이다.